류정원(42·사진) 씨는 초소형 초음파 진단기를 개발하는 의료기기 회사의 대표다. 과거 초음파 진단기 무게는 100kg에 달했다. 의사 출신인 류 대표는 이를 개선해 300g 중량의 초소형으로 만들었다. 세계 최초다. 벤처캐피털과 의료계 반응이 뜨거울 수밖에 없다. 개발 과정에서 가천의대와 소프트뱅크 등으로부터 60억 원 넘게 투자를 받았다. 제품 개발을 완료한 뒤에는 세계 시장 진출을 꾀하고 있다. 의사가 개발한 의료기기라 신뢰도가 높고 반응도 좋다는 후문이다. 의료인이 이처럼 혁신적인 첨단 전자 의료기기를 개발한 비결은 뭘까. 류 대표의 대답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우연히 어머니 심부름으로 도서관에 갔어요.”
거기서 그는 새로운 세상과 마주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우연히 접하게 된 것이다. 류 대표는 바로 그 책에 빠져들었고, 이후 도서관을 밥 먹듯 드나들면서 많은 책을 읽었다.
“아인슈타인은 어릴 때 부모가 소개해준 대학생 멘토로부터 소개받은 과학책을 읽고 큰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도 우연히 그런 경험을 하게 된 거죠. 제가 어렸을 때 과외 교사는 많았지만 멘토라고 할 만한 분을 만나기는 힘들었거든요. 저는 제 인생의 멘토를 도서관에서 만난 거죠. 바로 많은 책입니다.”
그날 이후 책은 류 대표의 가장 좋은 스승이자 친구가 됐다. 개인용 컴퓨터(PC)가 나온 뒤엔 코딩에도 빠져들었다. 그는 “다른 아이들은 게임을 좋아했는데, 나는 코딩이 더 재미있었다. 특히 베이식 프로그래밍을 좋아했다”고 밝혔다. 우주공학 분야에도 관심을 뒀다. 류 대표는 2006년 4월 3만6000여 명이 지원한 ‘대한민국 우주인 선발대회’에서 최종 10인 안에 들었다. 그 비결로 류 대표가 꼽은 것이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온 우주에 대한 관심’이다. 하지만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 두루 재능이 있던 그를 학교는 반기지 않았다.
“그때 기준으로 저는 모범생이 아니었던 거죠.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잘 외우는 사람이 공부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받았잖아요. 저는 혼자 책 읽고 탐구하길 좋아하는 스타일이었거든요. 학교 공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요. 제가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칭찬받으며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했겠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죠.”
류 대표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담임교사는 “솔직히 네 성적으로는 4년제 대학에 가는 것도 힘들다”고 했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싶었던 그는 그제야 학과 공부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 성적은 쑥쑥 올랐다. 졸업 무렵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갈 정도가 됐다.
“선생님이 많이 놀라셨어요. 고3 때 반짝 공부해서 너처럼 성적이 오르는 학생을 처음 봤다고, 이렇게 1년만 더 공부하면 국내 최고 대학도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하셨죠.”
이 말은 이후 류 대표를 크게 변화시켰다. 재수하기 싫은 마음에 점수에 맞춰
4년제 대학에 들어가 1년만 다니다 군대에 갔는데 제대할 때가 되자 ‘다시 도전해보자’는 꿈이 생긴 것이다. 군 제대 후 고시원에서 3개월, 이후에는 재수학원에서 1년간 공부에 매달렸다. 그렇게 서울대 물리학과에 합격했다. 류 대표는 “남들은 안 믿겠지만 정말 교과서만 여러 번 봤다. ‘공부 잘하는 법’ 같은 책도 몇 권 읽긴 했다”며 웃었다.
“물리학도 좋아했지만 원래 꿈은 전자공학도가 되는 거여서 전자공학을 복수전공해 학위를 2개 받았어요. 졸업 후엔 디지털 보안 장비를 만드는 벤처기업을 창업해 코딩하는 일을 시작했고요. 대학 다닐 때부터 벤처기업에서 코딩 아르바이트를 했기 때문에 새로운 일은 아니었죠.”
“꿈꾸는 사람은 지치지 않는다”
그렇게 6년쯤 일했을 때 그는 또 한 번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었다. 뇌과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그 무렵 문을 연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한 것이다. 의사가 된 뒤엔 병원에서 일하기도 했다.
“응급실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위독한 산모가 실려 왔어요. 우리 병원이 산부인과 전문이 아니라 응급조치만 한 뒤 다른 병원으로 이송했죠. 나중에 소식을 들으니 산모와 태아가 모두 사망했다고 하더군요. 저는 최선을 다했지만 이동 중 응급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게 문제였던 거 같아요. 앰뷸런스 안에 초음파 기기만 있었다면, 그래서 정밀 진단이 가능했다면 산모와 태아 중 한 명은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어요.”
류 대표가 또 한 번 ‘직종 변경’을 한 건 이런 가슴 아픈 경험 때문이다. 그동안 쌓아온 전자공학, 물리학, 의학 지식과 각종 인맥을 총동원해 이동 중에도 사용할 수 있는 초음파 진단기 개발에 매달렸다. 중소기업진흥공단이 운영하는 청년창업사관학교에 입소해 투자 유치 등 창업 과정에서 필요한 각종 도움을 받고, 2012년 회사를 세웠다. 그는 “제품 개발 과정에서 저개발국가의 산모와 태아 사망률이 매우 높다는 걸 알게 됐다. 나와 팀원들이 개발한 초소형 휴대용 초음파 진단기가 널리 보급되면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 꿈을 이루고자 그는 해외에서 열리는 각종 의학 콘퍼런스와 워크숍 등을 찾아다닌다. 그와 동시에 KAIST(한국과학기술원) 의과학대학원에서 뇌과학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대학 다닐 때 두 가지 전공 공부를 한꺼번에 하면서도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고 코딩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은 힘들 겨를이 없죠. 청소년에게도 공부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좇을 수 있는 꿈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지금보다 몇 단계 더 발전할 거예요.”
류 대표의 조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우연히 어머니 심부름으로 도서관에 갔어요.”
거기서 그는 새로운 세상과 마주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우연히 접하게 된 것이다. 류 대표는 바로 그 책에 빠져들었고, 이후 도서관을 밥 먹듯 드나들면서 많은 책을 읽었다.
“아인슈타인은 어릴 때 부모가 소개해준 대학생 멘토로부터 소개받은 과학책을 읽고 큰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도 우연히 그런 경험을 하게 된 거죠. 제가 어렸을 때 과외 교사는 많았지만 멘토라고 할 만한 분을 만나기는 힘들었거든요. 저는 제 인생의 멘토를 도서관에서 만난 거죠. 바로 많은 책입니다.”
그날 이후 책은 류 대표의 가장 좋은 스승이자 친구가 됐다. 개인용 컴퓨터(PC)가 나온 뒤엔 코딩에도 빠져들었다. 그는 “다른 아이들은 게임을 좋아했는데, 나는 코딩이 더 재미있었다. 특히 베이식 프로그래밍을 좋아했다”고 밝혔다. 우주공학 분야에도 관심을 뒀다. 류 대표는 2006년 4월 3만6000여 명이 지원한 ‘대한민국 우주인 선발대회’에서 최종 10인 안에 들었다. 그 비결로 류 대표가 꼽은 것이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온 우주에 대한 관심’이다. 하지만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 두루 재능이 있던 그를 학교는 반기지 않았다.
“그때 기준으로 저는 모범생이 아니었던 거죠.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잘 외우는 사람이 공부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받았잖아요. 저는 혼자 책 읽고 탐구하길 좋아하는 스타일이었거든요. 학교 공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요. 제가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칭찬받으며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했겠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죠.”
류 대표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담임교사는 “솔직히 네 성적으로는 4년제 대학에 가는 것도 힘들다”고 했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싶었던 그는 그제야 학과 공부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 성적은 쑥쑥 올랐다. 졸업 무렵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갈 정도가 됐다.
“선생님이 많이 놀라셨어요. 고3 때 반짝 공부해서 너처럼 성적이 오르는 학생을 처음 봤다고, 이렇게 1년만 더 공부하면 국내 최고 대학도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하셨죠.”
이 말은 이후 류 대표를 크게 변화시켰다. 재수하기 싫은 마음에 점수에 맞춰
4년제 대학에 들어가 1년만 다니다 군대에 갔는데 제대할 때가 되자 ‘다시 도전해보자’는 꿈이 생긴 것이다. 군 제대 후 고시원에서 3개월, 이후에는 재수학원에서 1년간 공부에 매달렸다. 그렇게 서울대 물리학과에 합격했다. 류 대표는 “남들은 안 믿겠지만 정말 교과서만 여러 번 봤다. ‘공부 잘하는 법’ 같은 책도 몇 권 읽긴 했다”며 웃었다.
“물리학도 좋아했지만 원래 꿈은 전자공학도가 되는 거여서 전자공학을 복수전공해 학위를 2개 받았어요. 졸업 후엔 디지털 보안 장비를 만드는 벤처기업을 창업해 코딩하는 일을 시작했고요. 대학 다닐 때부터 벤처기업에서 코딩 아르바이트를 했기 때문에 새로운 일은 아니었죠.”
“꿈꾸는 사람은 지치지 않는다”
그렇게 6년쯤 일했을 때 그는 또 한 번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었다. 뇌과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그 무렵 문을 연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한 것이다. 의사가 된 뒤엔 병원에서 일하기도 했다.
“응급실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위독한 산모가 실려 왔어요. 우리 병원이 산부인과 전문이 아니라 응급조치만 한 뒤 다른 병원으로 이송했죠. 나중에 소식을 들으니 산모와 태아가 모두 사망했다고 하더군요. 저는 최선을 다했지만 이동 중 응급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게 문제였던 거 같아요. 앰뷸런스 안에 초음파 기기만 있었다면, 그래서 정밀 진단이 가능했다면 산모와 태아 중 한 명은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어요.”
류 대표가 또 한 번 ‘직종 변경’을 한 건 이런 가슴 아픈 경험 때문이다. 그동안 쌓아온 전자공학, 물리학, 의학 지식과 각종 인맥을 총동원해 이동 중에도 사용할 수 있는 초음파 진단기 개발에 매달렸다. 중소기업진흥공단이 운영하는 청년창업사관학교에 입소해 투자 유치 등 창업 과정에서 필요한 각종 도움을 받고, 2012년 회사를 세웠다. 그는 “제품 개발 과정에서 저개발국가의 산모와 태아 사망률이 매우 높다는 걸 알게 됐다. 나와 팀원들이 개발한 초소형 휴대용 초음파 진단기가 널리 보급되면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 꿈을 이루고자 그는 해외에서 열리는 각종 의학 콘퍼런스와 워크숍 등을 찾아다닌다. 그와 동시에 KAIST(한국과학기술원) 의과학대학원에서 뇌과학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대학 다닐 때 두 가지 전공 공부를 한꺼번에 하면서도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고 코딩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은 힘들 겨를이 없죠. 청소년에게도 공부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좇을 수 있는 꿈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지금보다 몇 단계 더 발전할 거예요.”
류 대표의 조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