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경매에서 79만5000달러(약 11억6800만 원)에 낙찰된 산토리 ‘야마자키 55년’(왼쪽)과 산토리 고연산 위스키들. [명욱 제공]
일본 위스키 수입 증가는 한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2023년 전 세계 위스키 수출시장에서 스카치위스키(56억 파운드·약 10조3000억 원), 미국 위스키(14억 달러·약 2조 원), 아이리시 위스키(8억7500만 유로·약 1조3300억 원)에 이어 일본 위스키가 4위를 차지하며 위스키 강국으로 올라섰다. 2022년 일본의 관련 통계에서도 위스키 수출액이 560억 엔(약 5220억 원)으로 사케(475억 엔·약 4425억7600만 원)를 넘어섰다.
일본, 세계 4위 위스키 강국
최근에는 홍콩 경매에서 산토리 ‘야마자키 55년’이 79만5000달러(약 11억6800만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야마자키 55년은 산토리가 2020년 100병 한정 생산한 뒤 추첨을 통해 판매한 제품으로, 출시 당시 가격은 한 병에 300만 엔(약 2800만 원)이었다. 이로써 2018년 ‘야마자키 50년’이 기록한 아시아 위스키 최고가(약 3억 원)를 야마자키 55년이 2년 만에 3배 넘는 금액으로 갈아치우게 됐다.
그렇다면 일본 위스키에 대체 어떤 매력이 있기에 이처럼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것일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몇 가지로 압축할 수 있을 듯하다. 흔히 말하는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과 차별화된 위스키 생산이 가능한 일본의 자연환경,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통해 구축한 일본의 위스키 문화 등을 꼽을 수 있다.
먼저 일본에는 ‘위스키의 아버지’로 불리는 두 사람이 있다. 바로 산토리 위스키 창립자인 도리이 신지로와 사케 양조장집 아들로 태어나 100년 전 스코틀랜드에서 유학한 후 일본에 위스키 기술을 전파한 타케츠루 마사타카다. 1923년 이 둘이 힘을 합쳐 일본 최초 몰트위스키 증류소인 야마자키 증류소를 세웠다.
야마자키 지역은 우지, 기즈, 가쓰라라는 명칭의 강들이 합수되는 지점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 스승인 센 리큐가 차실을 갖고 있던 곳으로도 알려졌다. 연수가 나는 지역이라서 이곳 물로 술을 빚으면 부드러운 맛을 낼 수 있다. 다만 당시는 일본에 위스키 시장이 형성되기 전이었다. 일본인은 전 세계에서 알코올 대사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인종 중 하나인 데다, 위스키 특유의 스모키한 맛과 향이 일본 음식과 매칭되기 매우 어려웠다. 그나마 초반에는 서양 문화에 대한 동경으로 수요가 있었으나 이후 고도주(高度酒)의 폐해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면서 성장이 정체됐다.
고급화로 2000년대 재도약
이를 타개한 것이 바로 ‘위스키 킵 문화’ 마케팅이었다. 위스키를 한꺼번에 다 마실 필요 없이 남은 술을 가게에 맡겨두고 다음에 방문해 천천히 마셔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일본에서는 위스키 이미지가 ‘과음을 유발하는 술’에서 ‘소비자 선택에 따라 여유를 갖고 즐겨도 되는 술’로 바뀌었다. 또 비싼 가격을 지불해도 나중에 또 마실 수 있으니 금전적 부담도 줄어들었다.
여기에 더해 일본은 위스키를 물이나 얼음에 희석해 마시거나 저녁식사 때 음식과 함께 즐기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서양인은 동양인에 비해 알코올 대사 능력이 뛰어나 굳이 위스키를 희석해 마시지 않는다. 음식 또한 곁들이지 않는 그들에게 위스키는 늦은 밤 그 자체로만 즐기는 술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위스키 도수를 낮추고자 다른 무언가에 섞어서 마시는 방법이 유행했고, 위스키만 단독으로 마시기보다 저녁에 음식을 먹으면서 함께 즐기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그러다 보니 일본에서 위스키는 ‘고독하고 어두운’ 이미지가 아닌, 집에서 가족과도 같이 마실 수 있는 ‘밝고 경쾌한’ 느낌으로 변화했고, 이후 일본 위스키 시장은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던 일본 위스키 시장에 1984년 위기가 닥쳤다. 높은 인기에 조정기가 찾아와 일본 고급 증류식 소주 등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일본 위스키 시장은 또 한 번 정체기를 겪었다. 이때 일본 위스키 회사들이 생각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바로 최고급 제품 개발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 위스키 중에는 12년 이상 숙성된 제품이 전무했다. 최고급을 지향하기보다 대중성에 치중했던 것이다. 그러다 제품 출하량이 줄어들어 자연스레 고급화 길을 모색하게 됐다.
1984년 ‘야마자키 12년’을 시작으로 1989년 ‘히비키 17년’, 1994년 ‘학슈 12년’, 1997년 ‘히비키 30년’, 1999년 ‘야마자키 25년’ 등 고연산 위스키가 줄줄이 출시됐다. 그리고 이들 제품은 2000년대 들어 세계 위스키 대회를 석권했다. 이때 일본에서는 위스키를 생맥주처럼 가볍게 즐기는 ‘하이볼’이 등장해 메가 히트를 치기도 했다. 이후 하이볼은 생맥주 시장을 점진적으로 장악하며 일본 위스키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결국 일본 위스키의 성장 비결은 수차례 실패에도 돌파구를 찾았다는 데 있다. 시장이 어려울 때 훗날을 생각해 차세대 제품 개발에 앞장서는 자세, 그런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주류 산업뿐 아니라 어떤 산업 분야에든 일본 위스키가 전하는 인사이트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