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긴 어린 시절 환경도 천방지축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4세 때 월북했다가 6·25전쟁 때문에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는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생활능력은 전혀 없었다. 부잣집에서 고생 모르고 호사스럽게 자란 사람의 한계였다. 결국 나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우리 집의 가장이 돼야 했다. 가정교사, 신문배달 보조, 우체통 페인트칠 등을 하며 쌀과 연탄을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그러자니 학교 생활이 문제였다. 결석이 잦자 성적이 떨어졌고 장학생 자격을 잃게 돼 수업료를 내야 했다. 내 수입으로 수업료를 내는 건 어림도 없었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수업료 못 낸 아이들을 죄인처럼 교탁 앞에서 무릎을 꿇게 했다. 수치스럽기보다 치욕스러웠다. 그 수업이 마지막이었다. 학교를 그만둔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시간은 많아졌다. 난 혼자서도 잘 놀았지만 친구가 있었다. 중학 동창 황규석이었다. 야영 생활을 즐기는 친구 덕에 심심하면 서울 정릉 산속으로 들어갔다. 바위굴이 아지트였다. 밥도 지어먹고 칡, 머루, 다래, 버찌, 산딸기도 즐겼다. 밤엔 산짐승들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굴 입구에 모닥불을 피우고 쑥을 덮어놓으면 해충과 짐승의 접근도 막을 수 있었다. 허클베리 핀이나 톰 소여의 모험만큼 다이내믹하지는 않았지만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모험을 경험했다.
제주도 무전여행을 함께 떠난 친구 황규석. 힘들 때마다 옆자리를 지켜준 친구 이석태. 무한한 상상력을 키워준 어머니와 동생(왼쪽부터). 각 사진 왼쪽에 있는 이가 배한성이다.
그렇다고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초조하고 불안했다. 다행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중학 동창 이석태의 도움으로 동대문중에 편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에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약국 아르바이트를 했다. 도둑이 많던 때라 밤새 약국을 지키며 그곳에서 쪽잠을 잤다. 꽁꽁 걸어 잠근 약국은 감옥 같았다.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추웠다. 밤이면 시나리오를 읽었다. 영화배우 꿈은 어려움을 견디는 에너지였다.
한 번은 우연히 한 잡지에서 곧 촬영에 들어갈 영화 시나리오를 읽다가 소년 병사 배역을 보곤 가슴이 쿵쾅쿵쾅댔다. 그 정도 배역이라면 잘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영화사에 보낼 편지를 썼다. 내 글씨가 삐뚤빼뚤해서 어머니에게 부탁했다. 어머니는 글씨를 예쁘게 썼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영화사에서 답장이 오는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사진을 보내라고 했다. 영화배우 폼으로 사진을 찍어 보냈고, 목 빠지게 기다리던 어느 날 답장이 왔다. 거기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본 배역과 맞지 않습니다.’
나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중학교 3학년 때 나의 전설을 쓰기 시작했다”라고. 50여 년 전에도 영화배우를 동경한 아이들은 있었다. 하지만 영화사에 편지를 보낸 녀석은 나뿐이지 않았을까. ‘또라이’ 같은 나의 당돌함은 잘 노는 아이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나를 그렇게 놀게 해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5세, 7세 난 우리 형제에게 자신이 여고 시절 본 영화 얘기를 들려줬다. 동생은 심드렁해 바로 잠들었지만 나는 무척 신이 났다. 어머니는 귀신 영화를 설명할 때는 으스스한 귀신 목소리로 말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웠다. 어느 날 어머니가 내게 이불을 뒤집어쓰라고 했다. 그러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왔다. 그런데 이불을 젖히라는 어머니 목소리가 괴상했다. 고개를 드는 순간 난 기절할 듯이 놀랐다. 어머니가 하얀 소복을 입고 산발한 채 부엌칼을 물고 서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피난처에 머물다 서울로 오면서 어머니의 이런 엔터테인먼트는 막을 내렸다.
배한성 성우는 자신의 경쟁력을 목소리가 아닌 ‘노력하는 자세’라고 여긴다.
동네시장도 짓궂게 놀 일이 많은 곳이었다. 과일이 먹고 싶으면 친구들과 모자 던지기 놀이를 하면 됐다. 사과가 먹고 싶으면 모자를 사과 있는 곳으로 던지곤, 모자를 집는 척하며 사과도 잡았다. 돈은 코딱지만큼도 없으면서 문방구에 우르르 몰려가기도 했다. 한 녀석이 팽이나 딱지, 구슬을 살 듯이 이것저것 고르며 주인아저씨 시선을 분산시키면 그새 우리는 호주머니에 갖고 싶은 것을 집어넣었다. 가게를 나와 골목으로 뛰어와서는 서로의 전리품(?)을 꺼내보며 킬킬거렸다(그때 악동 짓 한 것을 깊이 사과드립니다).
제주도 무전여행 시도…21세 성우 합격
고교 3학년 때 규석이 제주도 여행을 제안했다. 그때 우리 집 형편에 제주도 여행은 실현되기 어려운 꿈이었다. 나는 꿈인가 싶었다. 친구는 “여행 장비를 사느라 돈을 다 썼으니 무전여행을 가자”고 했다. 요행히 밤 11시 목포행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차표 단속을 피하며 목포항까지 갔다. 하지만 제주도행 배를 타는 건 어려웠다. 수완 좋은 우리는 매표소 누나에게 재롱잔치를 벌였다. “서울 애들 재밌당께” 하던 누나는 각자 승객 9명을 모아오면 1명 값은 받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우리는 길을 막고 학생들을 협박해 골목에 대기시켰고, 이를 수상하게 여긴 경찰 아저씨한테 걸려 한참 혼났다. 그럼에도 궁하면 통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제주도로 출항하는 배가 뱃고동을 울리자 포청천 같던 경찰아저씨가 갑자기 배에서 표를 받는 사람에게 쪽지를 건넸고, 우리는 제주도행 배에 유유히 오를 수 있었다. 그 쪽지에는 ‘서울서 온 친척 아이들이니 잘 봐달라’고 쓰여 있었다.
내 과거를 소상히 알고 있는 아내는 종종 말한다. 만약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그렇게 천방지축 놀 수 없었을 거라고. 또 환경이 어렵지 않았다면 자유분방하게 학교 생활을 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맞는 얘기다. 그러나 학교 공부가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교실 밖에서도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다. 이제 세상은 학력보다 개인 능력에 대해 얘기한다. 그렇기에 21세의 반란이 가능했을 것이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가 창업한 나이가 21세라고 하지 않는가. 공교롭게도 내가 성우시험에 합격한 나이도 21세였다. 대안고교와 대학 1년 수료라는 초라한 스펙을 가진 나를 변모시킨 동력은 뭘까. 돌이켜보면 사회생활 40여 년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어린 시절의 다양한 ‘놀이 경험’이었다. 놀이가 나를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