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우병 시위가 이명박 정권의 향방을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우병 시위대가 매일 밤 서울 시청 앞 광장을 메우고 유모차를 끈 아줌마들까지 몰려나왔을 때 이명박은 측근이 쓴 이른바 ‘아침이슬’ 발표문을 읽기 직전까지 갔던 것이다.
그 순간 이명박을 ‘위대한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신의 기적이 일어났다. 이명박이 마음을 바꾼 것이다. 그때까지 이명박이 가슴에 품었던 사상은 ‘중도실용’이었다. 좌도 우도 다 끌어안고 함께 실용노선으로 나아가자. 우리에게 경제가 최우선 아닌가. 그렇게 확고하게 무장했던 것이다.
이명박이 만일 측근이 써준 ‘청와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을 따라 불렀다’라는 내용의 발표문을 읽었다면 그때부터 레임덕이 시작되었을 게 분명하다. 집권 4개월 만에 레임덕이 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은 ‘중도실용’을 집어던졌다. ‘아침이슬’ 원고를 찢어 던졌고 530만 표차로 밀어준 ‘건국세력’ ‘자유민주세력’ 편에 섰다.
그리고 2009년 8월 이명박은 1년 6개월 만에 역대 대통령 5명이 30년 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수많은 일을 해냈다. 그야말로 이승만에 이어 ‘제2 건국대통령’으로 불릴 만했다. ‘쥐박이’ ‘겁쟁이’로 부르며 조소하던 좌익 세력은 쥐구멍에 머리만 박고 있다 지금 모조리 잡혀가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파기하려고 애썼던 ‘국가보안법(국보법)’이 ‘쥐덫’이었던 것이다. 쥐를 잡으려는 쥐덫일 뿐이어서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어떤 해나 부담이 없다.
“이제는 통합입니다.”
청와대로 찾아온 이회창에게 이명박이 말했다. 집무실에는 청와대 비서실장 조순형까지 셋이 둘러앉았다. 이명박이 말을 잇는다.
“통합부터 해놓고 통일을 추진해야 합니다.”
물론 대한민국 내부 통합이다. 국보법을 통해 국회는 물론 사법부, 행정부, 언론계와 학계, 시민단체와 노조에까지 광범위하게 침투했던 종북·좌익 세력을 소탕했지만 아직 진행 중이다.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좌파는 영양분을 잔뜩 먹고 배양되었던 것이다. 좌파 번식의 시작은 김영삼 정권 때부터다. 민주화, 문민정권의 탄생에 고무된 김영삼 정권은 민주화 가면을 쓴 좌파가 번식하는 것을 방조 또는 방관했다. 그때 이회창이 머리를 들었다. 이회창은 두 번의 대선 패배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켰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좌파 정권을 탄생시킨 책임이 있다.
“어떤 복안이 있으십니까?”
이회창이 묻자 이명박은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신상필벌. 그러나 자성하고 전향한다면 최대한 관용을 베풀겠다고 공표하겠습니다.”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조순형이 말했으므로 시선이 모아졌다. 조순형이 말을 잇는다.
“뿌리가 깊고 단단해서 겉으로 나온 것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강력한 단속 때문에 종북·좌익 세력의 준동은 눈에 띄게 줄었지만 반발은 더 기술적이고 은밀해졌다. 지금도 인터넷과 트위터에는 반정부, 반이명박 세력이 잔뜩 포진해 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 같다. 이명박이 입을 열었다.
“수십 년간 단련된 종북 사고(思考)가 몇 달 만에 지워지겠습니까? 강력하면서도 끈기 있게, 거기에다 관용과 회유책을 번갈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 대통령 임기와 연임에 대한 법안이 2008년 국회에서 통과함으로써 2012년에는 4년제 대통령을 뽑는 첫 선거를 치른다. 그리고 2012년 당선된 대통령은 2016년에 재선될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가 대세지만 정몽준, 김문수, 이재오에다 이회창까지 대권 주자에 낄 테니까 말이야.”
‘항상’ 출판사 사장 서상국이 홍익대 근처 삼겹살집에서 아는 체를 했다. 오늘도 서상국은 인테리어 업자 오종택과 대녀(代女) 이애주까지 셋이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는 중이다. 이애주는 이제 고정 멤버가 됐다. 서상국의 심복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오종택의 대녀였기 때문이다. 술잔을 든 서상국이 말을 잇는다.
“2012년 여당 대선후보 경선은 볼만하겠어. 경선이 볼만해야 국민이 관심을 보이고 또 그것이 대선 승리로 이어지는 거다.”
“안철수라고 들어봤냐?”
불쑥 오종택이 묻자 서상국은 눈만 끔벅였다. 그때 이애주가 대답했다.
“네, 저는 알아요.”
“알아?”
오종택의 시선을 받은 이애주가 말을 잇는다.
“대학가에서 인기예요. 저도 안철수의 ‘희망콘서트’라는 강의를 두 번이나 들었어요.”
“허어.”
오종택이 감탄했을 때 이번에는 서상국이 묻는다.
“강의 내용이 뭔데?”
“젊은이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내용으로, 기존 정치에 환멸을 느낀 젊은 세대에게 미래에 대한 새 비전을 제시한다는 평가를 받아요.”
“허, 그런 사람도 있나?”
서상국이 감탄했을 때 이애주가 말을 잇는다.
“대학생들이나 20, 30대층은 안철수가 미래 대통령감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때 삼겹살집 주인이 벽에 걸린 TV 볼륨을 높였으므로 셋의 시선이 그쪽으로 옮겨졌다. 그러고 보니 8시 뉴스 시간이다. 대통령 이명박이 화면에 떴으므로 셋은 가만히 있었다. 1년 전만 해도 두 전라도 중년의 입에서 당장 쌍욕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때 이명박이 이쪽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통합해야 합니다. 한마음으로 통합해 한반도 통일을 이룩해야 합니다. 따라서….”
오종택과 서상국은 물론 삼겹살집 손님들은 ‘초등학교 3학년 국어책’을 읽는 듯한 이명박을 바라본다. 10초쯤 지나면 모두의 시선이 돌아갈 것이다. 그때 이명박이 말을 이었다.
“따라서 정부는 국보법 위반자의 ‘대사면’을 실시할 것입니다. 전향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수배자나 형을 집행 중인 자까지 포함한 모든 국보법 위반자는 소정의 교육을 마친 후 대한민국 국민으로 복귀합니다. 전(前) 직장에 재취업토록 할 것이며 취업도 책임지겠습니다.”
“이런.”
오종택이 화면을 응시한 채 잇새로 말했다.
“이건 특혜다. 나도 국보법 위반을 해야 쓰겄다.”
# 그 시각, 주석궁 휴게실에서 김정일이 TV에 나온 이명박을 응시한다. 이명박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단, 진심으로 전향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위반자만 해당합니다. 우리는 한반도 통일 이전에 대한민국 통합을 이룩해야 할 것입니다.”
“꺼라.”
김정일이 말하자 뒤쪽에 서 있던 경호국 장교가 서둘러 리모컨을 눌러 화면을 껐다. 회의실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방 안에는 김정일과 김정은, 장성택, 리영호까지 넷이 둘러앉았다. 이윽고 김정일의 시선이 리영호에게로 옮겨졌다.
“2차분 쌀 받았지?”
“예, 지도자 동지.”
상반신을 세운 리영호가 대답하자 김정일이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미끼를 내주었더니 덥석 물기는 했구먼. 이것이 이명박식 대북정책이란 말이지?”
김정일이 말한 미끼는 1군단장 박격식의 박왕자 사살 사건에 대한 사과다. 그 사과를 받은 한국 정부가 2차분 쌀 10만t을 보내준 것이다. 철저히 주고받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주도권을 쥔 쪽은 북한이다. 김정일이 정색하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자, 핵사찰 받겠다고 해.”
# “세대결연으로 젊은 세대와의 소통은 다소 나아졌지만 아직 탄력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당정협의체인 국민소통위원회 위원장 정몽준이 이명박에게 보고했다.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안에는 청와대 비서실장 조순형까지 셋이 둘러앉았다. 정몽준이 말을 잇는다.
“각각 대부(代父), 대자(代子) 관계가 굳어지면서 세대 간 소통이 원활해진 효과는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층이 가진 미래에 대한 불안감, 현실에 대한 불만이 아직도 상당합니다.”
집무실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것을 수치로 표시할 수는 없다. 19세에서 30세까지, 30세에서 40세까지 분류해놓고 불안감, 불만 종류를 늘어놓은 다음 0%에서 100%까지 구분해 각각 처방을 내리는 국가는 없다. 스탈린이나 히틀러, 진시황이 살아 있어도 그렇게는 못한다. 그리고 다 좋게 만드는 국가도 없다. 그런 국가는 정신병을 가진 국가다. 이윽고 머리를 든 이명박이 묻는다.
“안철수라는 사람이 대학생들을 상대로 ‘희망콘서트’라는 강연을 한다면서요?”
“예,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정몽준이 말을 이었다.
“대학생들은 안철수 씨 강의에 신선한 느낌을 받는 것 같습니다.”
“대학생뿐이 아닌 것 같던데요.”
이번에는 조순형이 끼어들었다. 조순형은 비서실장이라기보다 이명박의 자문역이다. 이제는 이런 모습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둘의 시선을 받은 조순형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미래에 대한 자신감, 불안감은 대부분 본인의 능력 유무에서 기인하는 법입니다. 없는 능력을 의지로 극복하는 젊은이도 있습니다. 우리는 능력과 의지를 배양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자 정몽준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래서 세대결연으로 나이 든 대부에게서 험한 현실에 대한 경험 이야기를 듣고 배우라고 한 것이지요.”
“그런데 현실의 불만과 불안을 모조리 기성세대, 정치권 탓으로 몰아붙이고 비판만 해서는 안 됩니다.”
조순형의 쓴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려면 정치권에 진입해 흙탕물을 뒤집어쓰면서 젊은이를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투쟁해야 하는 것입니다.”
“….”
“밖에서 딴 세상 사람처럼 온갖 미사여구로 감수성에 빠지기 쉬운 젊은이들을 대안도 없이 선동만 하면 안 되지요.”
“하지만 젊은이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품게 해준 것은 사실인 것 같더군요.”
이명박이 마침내 결론을 냈다. 머리를 든 이명박이 정몽준을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안철수 씨 강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정몽준이 긴장하고 있다. 갑자기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별생각이 다 들었는데 바로 이것이다. 이명박이 말을 이었다.
“국민소통위원회 주관으로 저명인사 300명쯤을 선정해 콘서트를 열도록 기획해주세요. 정부에서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콘서트 방법을 다양화해 ‘캠프’도 좋고 ‘수련회’도 좋습니다. 그렇지. 이건 내가 지어낸 이름인데….”
이명박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정몽준을 보았다.
“이 콘서트 이름을 ‘청춘대한민국’으로 하십시다. 위원장 생각은 어떻습니까?”
정몽준이 이명박의 시선을 받고는 숨을 들이켰다. 마치 정답이냐고 묻는 초등학생 표정이다. 어떤 미친놈이 안 좋다고 하겠는가. 정몽준이 엄숙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좋은 이름입니다, 대통령님.”
# 자수성가한 기업가가 어디 한둘인가.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기업을 이룬 기업가의 인생역정은 드러나지 않았을 뿐, 수백 수천 건이 넘는다. 그런 기업가, 존경받을 만한 기업가도 수천 명인 것이다. 그들은 그저 묵묵히 일한다. 강연할 시간이 있으면 제품을 개발하고 시장 개척 회의를 한다.
정몽준은 일단 기업가들의 수기를 모았다. 본인 대신 직원들이 써준 수기도 다 받았다. 기업가뿐이 아니다. 공무원, 군인, 교육자, 시장 상인, 해외 이주민을 대상으로도 현상 공모를 해 ‘약력’과 줄인 ‘사연’도 모았다. 사비와 국고 보조를 합쳐 입선작에도 상금 1억 원을 걸었더니 공모 나흘째부터 응모 ‘작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야, 이것만으로도 성공이오.”
정부 측 주무부서인 문화체육관광부의 유인촌 장관이 들뜬 얼굴로 말했다.
“그만큼 관심 있다는 표현 아니겠습니까?”
담당 국장 김영수가 대답했다.
“기간을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몇천 건이 올지 알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스토리가 필요하니까요. 계속해서 와야 합니다.”
책상에 놓인 목록을 들치면서 유인촌이 얼굴을 펴고 웃는다.
“이거, 여기서 수백 편의 연극, 영화 소재가 발굴되겠는데.”
맞는 말이다. 이곳에서 선정한 사연은 ‘청춘대한민국’ 교재뿐 아니라 연극, 영화, 드라마 소재로도 쓰일 것이다. 그리고 사연 주인공은 본인이 원하면 강사로 나서게 될 것이다. 그러면 수백 수천 명의 ‘안철수’가 탄생한다. 이것은 수백 수천 명의 ‘희망 전도사’가 탄생한다는 말이나 같다.
# “씨발놈이 배가 아파서 그런 거야.”
잇새로 말한 김주상이 술잔을 들고 최재문을 보았다. 인사동 한식당 안이다. 오후 7시여서 홀 안은 손님이 가득했고 떠들썩하다. 옆자리에서 막걸리에 소주를 타먹는 대학생 무리가 가장 시끄럽다. 김주상이 말을 잇는다.
“갑자기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오다니. 어디 두고 보자.”
했지만 말끝이 흐렸고 눈동자도 흔들렸다. 앞쪽에 앉은 최재문도 외면한 채 말대꾸를 하지 않는다. 둘은 전(前) 한나라당 지역구의원과 비례의원을 지낸 전 의원이다. 둘 다 지난번 총선 때 공천을 받지 못했고, 재기를 노리던 중 안철수를 만나 멘토를 자임했다. ‘청춘콘서트’에 감동받았기 때문이다. 정치인 출신답게 둘은 안철수의 정계 진입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고는 ‘새 정치’ 기수가 되려는 꿈을 키우는 참에 이명박의 ‘청춘대한민국’이 터진 것이다. 그때 한 모금에 소주를 삼킨 최재문이 입을 열었다.
“다음 주부터 전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청춘대한민국’ 콘서트가 열려. ‘기업가’ ‘문화인’ ‘공무원’ ‘생활인’ ‘상사원’ ‘이주민’ 등 다양한 레퍼토리로 말이야.”
“….”
“각 지방의 전통 음악, 시조, 연극, 쇼 등 각종 경연과 함께.”
“씨발.”
“안철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 걸 내보이려는 거야.”
“개새끼.”
“자료수집 예산을 500억 원이나 쌓아놓고 합동공연비를 무제한으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원해준다니 우리 ‘콘서트’는 물 건너갔어.”
“좆같이.”
했다가 김주상이 눈을 치켜뜨고 최재문을 보았다.
“자네, 오후에 안 박사 만났지? 뭐라고 그래?”
그러자 최재문이 다시 한 모금에 소주를 삼키고는 말을 잇는다.
“잘되었다고 하더구먼.”
“뭐가?”
“청춘대한민국 콘서트 말이야.”
“아니, 왜?”
“방황하는 젊은 세대를 위해서 잘된 일이라고. 그래서 ‘희망콘서트’도 함께 계속할 것이라고 했어.”
이제는 김주상이 한 모금에 소주를 삼켰다. 그렇다면 윈윈(win-win)인가. 하지만 자신과 최재문의 꿈은 사라졌다. 안철수를 정치판으로 끌어들일 명분도, 뒷심도 사라진 것이다.
# 방한 시 6·25 남침 사과로 김정일은 한국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립서비스 한두 번으로 끝낼 일은 아니다. 그래서 김정일은 박왕자 피격에 대한 사과와 이번에 핵사찰 수용을 발표했지만 한국 국민에게는 그것도 아직 미흡한 느낌이 들었다. 핵사찰 수용은 김정일이 몇 번 우려먹은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국정원장 장세동이 1급 이상 간부들을 브리핑실로 불러들인 것은 2009년 8월 중순 오후 3시경이다. 아침에 긴급 소집 명령을 받은 간부들은 해외 출장 중인 세 명만 빼고 다 모였다. 장세동이 머리를 들었을 때 방 안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군기가 잡혔고 서슬이 시퍼런 분위기. 장세동이 입을 열었다.
“대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부 정비가 최우선이다. 김정일이 오판하지 못하도록 위반자를 철저히 색출하도록.”
장세동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음지에서 일한다고 흔적도 보이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반역자에게는 추상같은 존재로,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믿음직한 수호자로 보여야 한단 말이야!”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다 잡아라. 국보법 위반으로 형을 살고 나왔다가 민주화보상심의회에서 민주운동가로 인정받고 보상금 타먹은 인간들도 있다. 그 심의회 의원들을 조사하는 것이 우리 임무다. 그 반역자들한테 건네진 국민 세금을 회수하는 것도 우리 의무다!”
헌법기관인 법원에서 간첩형을 선고받은 뒤 형을 살고 나온 간첩이 민주화보상심의회(민보상위)에서 보상금을 타먹은 경우도 있는 것이다. 국무총리 산하 ‘민보상위’는 사법기관에서 내린 판결도 무시했다. 장세동의 말이 이어졌다.
“너희가 대한민국 주춧돌이다. 주춧돌은 잘 보이지 않지만, 없으면 집이 무너진다. 그것을 명심하도록.”
초등학생 앞에서 훈계하는 교장선생님 같았지만 나이를 따지면 그럴 만하다. 장세동은 2009년 현재 74세. 1985년에서 87년까지 제13대 안기부장을 지냈고 지금 두 번째다.
그 순간 이명박을 ‘위대한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신의 기적이 일어났다. 이명박이 마음을 바꾼 것이다. 그때까지 이명박이 가슴에 품었던 사상은 ‘중도실용’이었다. 좌도 우도 다 끌어안고 함께 실용노선으로 나아가자. 우리에게 경제가 최우선 아닌가. 그렇게 확고하게 무장했던 것이다.
이명박이 만일 측근이 써준 ‘청와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을 따라 불렀다’라는 내용의 발표문을 읽었다면 그때부터 레임덕이 시작되었을 게 분명하다. 집권 4개월 만에 레임덕이 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은 ‘중도실용’을 집어던졌다. ‘아침이슬’ 원고를 찢어 던졌고 530만 표차로 밀어준 ‘건국세력’ ‘자유민주세력’ 편에 섰다.
그리고 2009년 8월 이명박은 1년 6개월 만에 역대 대통령 5명이 30년 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수많은 일을 해냈다. 그야말로 이승만에 이어 ‘제2 건국대통령’으로 불릴 만했다. ‘쥐박이’ ‘겁쟁이’로 부르며 조소하던 좌익 세력은 쥐구멍에 머리만 박고 있다 지금 모조리 잡혀가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파기하려고 애썼던 ‘국가보안법(국보법)’이 ‘쥐덫’이었던 것이다. 쥐를 잡으려는 쥐덫일 뿐이어서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어떤 해나 부담이 없다.
“이제는 통합입니다.”
청와대로 찾아온 이회창에게 이명박이 말했다. 집무실에는 청와대 비서실장 조순형까지 셋이 둘러앉았다. 이명박이 말을 잇는다.
“통합부터 해놓고 통일을 추진해야 합니다.”
물론 대한민국 내부 통합이다. 국보법을 통해 국회는 물론 사법부, 행정부, 언론계와 학계, 시민단체와 노조에까지 광범위하게 침투했던 종북·좌익 세력을 소탕했지만 아직 진행 중이다.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좌파는 영양분을 잔뜩 먹고 배양되었던 것이다. 좌파 번식의 시작은 김영삼 정권 때부터다. 민주화, 문민정권의 탄생에 고무된 김영삼 정권은 민주화 가면을 쓴 좌파가 번식하는 것을 방조 또는 방관했다. 그때 이회창이 머리를 들었다. 이회창은 두 번의 대선 패배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켰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좌파 정권을 탄생시킨 책임이 있다.
“어떤 복안이 있으십니까?”
이회창이 묻자 이명박은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신상필벌. 그러나 자성하고 전향한다면 최대한 관용을 베풀겠다고 공표하겠습니다.”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조순형이 말했으므로 시선이 모아졌다. 조순형이 말을 잇는다.
“뿌리가 깊고 단단해서 겉으로 나온 것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강력한 단속 때문에 종북·좌익 세력의 준동은 눈에 띄게 줄었지만 반발은 더 기술적이고 은밀해졌다. 지금도 인터넷과 트위터에는 반정부, 반이명박 세력이 잔뜩 포진해 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 같다. 이명박이 입을 열었다.
“수십 년간 단련된 종북 사고(思考)가 몇 달 만에 지워지겠습니까? 강력하면서도 끈기 있게, 거기에다 관용과 회유책을 번갈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 대통령 임기와 연임에 대한 법안이 2008년 국회에서 통과함으로써 2012년에는 4년제 대통령을 뽑는 첫 선거를 치른다. 그리고 2012년 당선된 대통령은 2016년에 재선될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가 대세지만 정몽준, 김문수, 이재오에다 이회창까지 대권 주자에 낄 테니까 말이야.”
‘항상’ 출판사 사장 서상국이 홍익대 근처 삼겹살집에서 아는 체를 했다. 오늘도 서상국은 인테리어 업자 오종택과 대녀(代女) 이애주까지 셋이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는 중이다. 이애주는 이제 고정 멤버가 됐다. 서상국의 심복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오종택의 대녀였기 때문이다. 술잔을 든 서상국이 말을 잇는다.
“2012년 여당 대선후보 경선은 볼만하겠어. 경선이 볼만해야 국민이 관심을 보이고 또 그것이 대선 승리로 이어지는 거다.”
“안철수라고 들어봤냐?”
불쑥 오종택이 묻자 서상국은 눈만 끔벅였다. 그때 이애주가 대답했다.
“네, 저는 알아요.”
“알아?”
오종택의 시선을 받은 이애주가 말을 잇는다.
“대학가에서 인기예요. 저도 안철수의 ‘희망콘서트’라는 강의를 두 번이나 들었어요.”
“허어.”
오종택이 감탄했을 때 이번에는 서상국이 묻는다.
“강의 내용이 뭔데?”
“젊은이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내용으로, 기존 정치에 환멸을 느낀 젊은 세대에게 미래에 대한 새 비전을 제시한다는 평가를 받아요.”
“허, 그런 사람도 있나?”
서상국이 감탄했을 때 이애주가 말을 잇는다.
“대학생들이나 20, 30대층은 안철수가 미래 대통령감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때 삼겹살집 주인이 벽에 걸린 TV 볼륨을 높였으므로 셋의 시선이 그쪽으로 옮겨졌다. 그러고 보니 8시 뉴스 시간이다. 대통령 이명박이 화면에 떴으므로 셋은 가만히 있었다. 1년 전만 해도 두 전라도 중년의 입에서 당장 쌍욕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때 이명박이 이쪽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통합해야 합니다. 한마음으로 통합해 한반도 통일을 이룩해야 합니다. 따라서….”
오종택과 서상국은 물론 삼겹살집 손님들은 ‘초등학교 3학년 국어책’을 읽는 듯한 이명박을 바라본다. 10초쯤 지나면 모두의 시선이 돌아갈 것이다. 그때 이명박이 말을 이었다.
“따라서 정부는 국보법 위반자의 ‘대사면’을 실시할 것입니다. 전향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수배자나 형을 집행 중인 자까지 포함한 모든 국보법 위반자는 소정의 교육을 마친 후 대한민국 국민으로 복귀합니다. 전(前) 직장에 재취업토록 할 것이며 취업도 책임지겠습니다.”
“이런.”
오종택이 화면을 응시한 채 잇새로 말했다.
“이건 특혜다. 나도 국보법 위반을 해야 쓰겄다.”
# 그 시각, 주석궁 휴게실에서 김정일이 TV에 나온 이명박을 응시한다. 이명박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단, 진심으로 전향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위반자만 해당합니다. 우리는 한반도 통일 이전에 대한민국 통합을 이룩해야 할 것입니다.”
“꺼라.”
김정일이 말하자 뒤쪽에 서 있던 경호국 장교가 서둘러 리모컨을 눌러 화면을 껐다. 회의실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방 안에는 김정일과 김정은, 장성택, 리영호까지 넷이 둘러앉았다. 이윽고 김정일의 시선이 리영호에게로 옮겨졌다.
“2차분 쌀 받았지?”
“예, 지도자 동지.”
상반신을 세운 리영호가 대답하자 김정일이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미끼를 내주었더니 덥석 물기는 했구먼. 이것이 이명박식 대북정책이란 말이지?”
김정일이 말한 미끼는 1군단장 박격식의 박왕자 사살 사건에 대한 사과다. 그 사과를 받은 한국 정부가 2차분 쌀 10만t을 보내준 것이다. 철저히 주고받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주도권을 쥔 쪽은 북한이다. 김정일이 정색하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자, 핵사찰 받겠다고 해.”
# “세대결연으로 젊은 세대와의 소통은 다소 나아졌지만 아직 탄력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당정협의체인 국민소통위원회 위원장 정몽준이 이명박에게 보고했다.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안에는 청와대 비서실장 조순형까지 셋이 둘러앉았다. 정몽준이 말을 잇는다.
“각각 대부(代父), 대자(代子) 관계가 굳어지면서 세대 간 소통이 원활해진 효과는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층이 가진 미래에 대한 불안감, 현실에 대한 불만이 아직도 상당합니다.”
집무실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것을 수치로 표시할 수는 없다. 19세에서 30세까지, 30세에서 40세까지 분류해놓고 불안감, 불만 종류를 늘어놓은 다음 0%에서 100%까지 구분해 각각 처방을 내리는 국가는 없다. 스탈린이나 히틀러, 진시황이 살아 있어도 그렇게는 못한다. 그리고 다 좋게 만드는 국가도 없다. 그런 국가는 정신병을 가진 국가다. 이윽고 머리를 든 이명박이 묻는다.
“안철수라는 사람이 대학생들을 상대로 ‘희망콘서트’라는 강연을 한다면서요?”
“예,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정몽준이 말을 이었다.
“대학생들은 안철수 씨 강의에 신선한 느낌을 받는 것 같습니다.”
“대학생뿐이 아닌 것 같던데요.”
이번에는 조순형이 끼어들었다. 조순형은 비서실장이라기보다 이명박의 자문역이다. 이제는 이런 모습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둘의 시선을 받은 조순형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미래에 대한 자신감, 불안감은 대부분 본인의 능력 유무에서 기인하는 법입니다. 없는 능력을 의지로 극복하는 젊은이도 있습니다. 우리는 능력과 의지를 배양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자 정몽준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래서 세대결연으로 나이 든 대부에게서 험한 현실에 대한 경험 이야기를 듣고 배우라고 한 것이지요.”
“그런데 현실의 불만과 불안을 모조리 기성세대, 정치권 탓으로 몰아붙이고 비판만 해서는 안 됩니다.”
조순형의 쓴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려면 정치권에 진입해 흙탕물을 뒤집어쓰면서 젊은이를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투쟁해야 하는 것입니다.”
“….”
“밖에서 딴 세상 사람처럼 온갖 미사여구로 감수성에 빠지기 쉬운 젊은이들을 대안도 없이 선동만 하면 안 되지요.”
“하지만 젊은이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품게 해준 것은 사실인 것 같더군요.”
이명박이 마침내 결론을 냈다. 머리를 든 이명박이 정몽준을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안철수 씨 강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정몽준이 긴장하고 있다. 갑자기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별생각이 다 들었는데 바로 이것이다. 이명박이 말을 이었다.
“국민소통위원회 주관으로 저명인사 300명쯤을 선정해 콘서트를 열도록 기획해주세요. 정부에서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콘서트 방법을 다양화해 ‘캠프’도 좋고 ‘수련회’도 좋습니다. 그렇지. 이건 내가 지어낸 이름인데….”
이명박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정몽준을 보았다.
“이 콘서트 이름을 ‘청춘대한민국’으로 하십시다. 위원장 생각은 어떻습니까?”
정몽준이 이명박의 시선을 받고는 숨을 들이켰다. 마치 정답이냐고 묻는 초등학생 표정이다. 어떤 미친놈이 안 좋다고 하겠는가. 정몽준이 엄숙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좋은 이름입니다, 대통령님.”
# 자수성가한 기업가가 어디 한둘인가.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기업을 이룬 기업가의 인생역정은 드러나지 않았을 뿐, 수백 수천 건이 넘는다. 그런 기업가, 존경받을 만한 기업가도 수천 명인 것이다. 그들은 그저 묵묵히 일한다. 강연할 시간이 있으면 제품을 개발하고 시장 개척 회의를 한다.
정몽준은 일단 기업가들의 수기를 모았다. 본인 대신 직원들이 써준 수기도 다 받았다. 기업가뿐이 아니다. 공무원, 군인, 교육자, 시장 상인, 해외 이주민을 대상으로도 현상 공모를 해 ‘약력’과 줄인 ‘사연’도 모았다. 사비와 국고 보조를 합쳐 입선작에도 상금 1억 원을 걸었더니 공모 나흘째부터 응모 ‘작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야, 이것만으로도 성공이오.”
정부 측 주무부서인 문화체육관광부의 유인촌 장관이 들뜬 얼굴로 말했다.
“그만큼 관심 있다는 표현 아니겠습니까?”
담당 국장 김영수가 대답했다.
“기간을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몇천 건이 올지 알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스토리가 필요하니까요. 계속해서 와야 합니다.”
책상에 놓인 목록을 들치면서 유인촌이 얼굴을 펴고 웃는다.
“이거, 여기서 수백 편의 연극, 영화 소재가 발굴되겠는데.”
맞는 말이다. 이곳에서 선정한 사연은 ‘청춘대한민국’ 교재뿐 아니라 연극, 영화, 드라마 소재로도 쓰일 것이다. 그리고 사연 주인공은 본인이 원하면 강사로 나서게 될 것이다. 그러면 수백 수천 명의 ‘안철수’가 탄생한다. 이것은 수백 수천 명의 ‘희망 전도사’가 탄생한다는 말이나 같다.
# “씨발놈이 배가 아파서 그런 거야.”
잇새로 말한 김주상이 술잔을 들고 최재문을 보았다. 인사동 한식당 안이다. 오후 7시여서 홀 안은 손님이 가득했고 떠들썩하다. 옆자리에서 막걸리에 소주를 타먹는 대학생 무리가 가장 시끄럽다. 김주상이 말을 잇는다.
“갑자기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오다니. 어디 두고 보자.”
했지만 말끝이 흐렸고 눈동자도 흔들렸다. 앞쪽에 앉은 최재문도 외면한 채 말대꾸를 하지 않는다. 둘은 전(前) 한나라당 지역구의원과 비례의원을 지낸 전 의원이다. 둘 다 지난번 총선 때 공천을 받지 못했고, 재기를 노리던 중 안철수를 만나 멘토를 자임했다. ‘청춘콘서트’에 감동받았기 때문이다. 정치인 출신답게 둘은 안철수의 정계 진입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고는 ‘새 정치’ 기수가 되려는 꿈을 키우는 참에 이명박의 ‘청춘대한민국’이 터진 것이다. 그때 한 모금에 소주를 삼킨 최재문이 입을 열었다.
“다음 주부터 전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청춘대한민국’ 콘서트가 열려. ‘기업가’ ‘문화인’ ‘공무원’ ‘생활인’ ‘상사원’ ‘이주민’ 등 다양한 레퍼토리로 말이야.”
“….”
“각 지방의 전통 음악, 시조, 연극, 쇼 등 각종 경연과 함께.”
“씨발.”
“안철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 걸 내보이려는 거야.”
“개새끼.”
“자료수집 예산을 500억 원이나 쌓아놓고 합동공연비를 무제한으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원해준다니 우리 ‘콘서트’는 물 건너갔어.”
“좆같이.”
했다가 김주상이 눈을 치켜뜨고 최재문을 보았다.
“자네, 오후에 안 박사 만났지? 뭐라고 그래?”
그러자 최재문이 다시 한 모금에 소주를 삼키고는 말을 잇는다.
“잘되었다고 하더구먼.”
“뭐가?”
“청춘대한민국 콘서트 말이야.”
“아니, 왜?”
“방황하는 젊은 세대를 위해서 잘된 일이라고. 그래서 ‘희망콘서트’도 함께 계속할 것이라고 했어.”
이제는 김주상이 한 모금에 소주를 삼켰다. 그렇다면 윈윈(win-win)인가. 하지만 자신과 최재문의 꿈은 사라졌다. 안철수를 정치판으로 끌어들일 명분도, 뒷심도 사라진 것이다.
# 방한 시 6·25 남침 사과로 김정일은 한국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립서비스 한두 번으로 끝낼 일은 아니다. 그래서 김정일은 박왕자 피격에 대한 사과와 이번에 핵사찰 수용을 발표했지만 한국 국민에게는 그것도 아직 미흡한 느낌이 들었다. 핵사찰 수용은 김정일이 몇 번 우려먹은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국정원장 장세동이 1급 이상 간부들을 브리핑실로 불러들인 것은 2009년 8월 중순 오후 3시경이다. 아침에 긴급 소집 명령을 받은 간부들은 해외 출장 중인 세 명만 빼고 다 모였다. 장세동이 머리를 들었을 때 방 안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군기가 잡혔고 서슬이 시퍼런 분위기. 장세동이 입을 열었다.
“대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부 정비가 최우선이다. 김정일이 오판하지 못하도록 위반자를 철저히 색출하도록.”
장세동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음지에서 일한다고 흔적도 보이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반역자에게는 추상같은 존재로,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믿음직한 수호자로 보여야 한단 말이야!”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다 잡아라. 국보법 위반으로 형을 살고 나왔다가 민주화보상심의회에서 민주운동가로 인정받고 보상금 타먹은 인간들도 있다. 그 심의회 의원들을 조사하는 것이 우리 임무다. 그 반역자들한테 건네진 국민 세금을 회수하는 것도 우리 의무다!”
헌법기관인 법원에서 간첩형을 선고받은 뒤 형을 살고 나온 간첩이 민주화보상심의회(민보상위)에서 보상금을 타먹은 경우도 있는 것이다. 국무총리 산하 ‘민보상위’는 사법기관에서 내린 판결도 무시했다. 장세동의 말이 이어졌다.
“너희가 대한민국 주춧돌이다. 주춧돌은 잘 보이지 않지만, 없으면 집이 무너진다. 그것을 명심하도록.”
초등학생 앞에서 훈계하는 교장선생님 같았지만 나이를 따지면 그럴 만하다. 장세동은 2009년 현재 74세. 1985년에서 87년까지 제13대 안기부장을 지냈고 지금 두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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