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봄여름 컬렉션을 공개한 지난해 여름부터 80년대가 새로운 뮤즈가 될 것이라는 풍문은 자자했습니다. 예를 들면 어깨에 두꺼운 패드를 넣은 ‘뽕재킷’(업계에서 ‘파워슈트’라 합니다), 희끗희끗한 곰팡이 자국처럼 염색한 ‘스노진’, 갈라진 엉덩이선 아래로 내려앉았던 바지 허리선을 다시 끌어올린 ‘배바지’, 여성스러워 보이고 싶은 여성들이 입었던 위선적인 ‘땡땡이’ 무늬 등이 믿어지지 않게도 모두 다 2009년 S/S 런웨이에 올라선 겁니다.
아니, 이번 봄엔 ‘뽕어깨’로 한 ‘떡대’ 하는 등과 배바지로 강조된 오리궁둥이를 보여줘야 한단 말인가? 이게 전부는 아닐 거야, 다른 것을 찾고 있을 때 패션업계의 ‘황제’쯤 되는 샤넬의 디렉터 칼 라거펠트는 믹 재거의 전 부인인 56년생 제리 홀을 모델로 캐스팅했고, 루이비통의 마크 제이콥스는 58년생 마돈나를 광고모델로 모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80년대를 다시 띄워보려는 패션업계의 분위기 잡기인 거죠.
패션 브랜드의 보도자료나 패션잡지에선 경제 침체기인 만큼 오히려 ‘호황기였던 80년대 특유의 화려한 감성을 즐기라’는 팁을 읽을 수 있습니다.
뭔가 이상하죠? 80년대에 고도성장으로 경제 호황을 맞은 건 일본과 한국 같은 아시아 국가였고요, 미국은 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를 맞고 있었거든요. 지금 미국의 실업률이 8.1%인데, 82년 실업률은 10.8%까지 치솟았습니다.
르네상스를 맞은 피에르 발맹의 2009 S/S컬렉션입니다. 각진 어깨의 가죽 재킷과 스노진은 80년대의 상징이지만, 옛날 옷장을 뒤져서는 안 된다는 것도 보여줍니다. 부드러운 허리와 팔의 라인을 보세요. 80년대를 응용한 내셔널 브랜드 ‘타임’의 신상룩(위)은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거죠.
반면 부동산 거품 경기 덕을 본 일본과 한국은 과시적이고, 번쩍거리고, 부풀리는 졸부와 사모님의 천박한 취향에 흠뻑 빠졌습니다. 미국에서 전해진 불경기 아이템들, 운동화와 청바지가 ‘나이키’와 ‘조다쉬’라는 럭셔리로 수입돼 여기 끼지 못하는 아이들은 목을 매고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요즘 우리는 그걸 ‘키치’로 놀려먹는 재미로 따라하는 거고요.
공통적이었던 건 사회가 보수화하면서(레이건과 전두환의 시대) 사적이고, 달콤하고, 감정 과잉한 것들은 발전했다는 거죠. 80년대만큼 아름다운 노래가 많이 생산된 시기는 없을 겁니다.
패션업계가 2009년 봄여름을 준비한 지난해 여름, 이렇게 전 세계가 쫄딱 주저앉으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패션업계에 아주 드물었어요. 미국과 유럽에서의 불길한 조짐은 오히려 중동과 아시아에서의 천박한 호황의 부활을 기대하게 했죠. 혹시 그들은 80년대의 어떤 부분, 과장된 대중문화의 스타들로부터 럭셔리의 극한치를 보여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모든 것이 달라진 지금, 섣불리 80년대 패션을 따라하는 건 미친 짓이 될 겁니다. 80년대의 유산으론 중성적인 슈트 한 벌, 그리고 가죽 라이더재킷 한 피스면 충분해요. 이 둘은 이제 시대를 뛰어넘은 스테디셀러로 등극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