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사동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에서 열리고 있는 김태헌의 개인전에 붙은 제목은 ‘화난중일기’(畵亂中日記)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기록으로 남긴 ‘난중일기’를 떠올리게 하는 전시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전시는 작가가 3년여에 걸쳐 기록한 일상의 기록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전시다.
전형적인 386세대로서 이른바 민중미술계열의 사회성 짙은 작품을 해온 그가 이번 전시에서 펼쳐 보이는 그림들은 철저히 사적(私的)인 일상의 기록들이다. 시기적으로 IMF 한파가 밀어닥친 99년을 전후한 때부터 현재까지 그려온 그림과 기록의 축적물을 전시의 형태로 드러내고 있다. 대학노트보다 작은 캔버스와 종이 위에 그려진 380여 점의 그림과 기록(일기)이 어우러진 이 전시는 고단한 세상을 살아가는 한 화가의 개인사이자 부인할 수 없는 우리 현대사의 단면이기도 하다. 김태헌의 그림일기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인 동시에 미술과 현실이 소통하는 통로로 작용한다.

그림일기는 작가가 ‘백수’생활을 만끽하면서 아내 ‘연주씨’와 겪은 신혼시절 에피소드, 삶의 터전이 된 성남 산동네 얘기, 지방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마주치고 겪은 기막힌 경험 등 그 범위와 관심의 대상이 실로 무궁무진하다.
그의 그림일기는 대개 이런 식이다. “…부산에서 좀 색다른 가로등을 봤다. 가로등 아랫부분이 거북이다. 거북이 네 발이 뚫렸고, 그 뚫린 자리는 볼트와 너트에 의해 조여져 있다. 가로등의 길고 무거운 쇳덩어리를 작고 동그란 등에 짊어지고 있는 모습이 위태위태하고, 또 딱하기조차 하다. 한편으론 꼭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같다는 생각을 했다.”(가로등에 대한 인상 ‘예수거북’), “내가 자주 다니는 병원의 의사는 약 1분에 한 명씩 환자를 받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환자인 내가 연민을 느낀다. 내가 처방전 갖고 가는 약국은 의약분업 이후로 일 많아 좋겠지만, 그 사람들의 바쁜 손놀림을 보면서 내가 더 행복하다고 굳게 맘먹는다.”(백수찬가 ‘쇼쇼쇼’)
이렇듯 김태헌은 우리가 평소에 무관심하게 스치고 소홀히 여기는 여러 가지 일상의 단상을 낱낱이 포착해 예리하게 풍자하고 비꼬지만 한편으론 순박한 작가의 심성을 느낄 수 있다. 전시장 한쪽 구석 책꽂이엔 미처 다 걸지 못한 그림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고 작가의 홈페이지(http://art.krart.com)를 방문하면 보다 많은 그의 그림일기를 엿볼 수 있다. 2월14일부터 3월10일까지(문의:02-733-0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