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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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예술적 권위가 ‘팔로어 수’ 앞에서 무력화되는 시대

[김재준의 다빈치스쿨] 문화권력 중심축, 미술관 큐레이터에서 추천 알고리즘으로 이동

  • 김재준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입력2025-09-1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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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비욘세(왼쪽)와 제이지 부부가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을 배경으로 촬영한 ‘에이프싯(APESHIT)’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루브르박물관은 이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작품을 중심으로 ‘아트 투어 프로그램’을 마련했고, 관람객이 급증하는 효과를 봤다. 유튜브 채널 Beyonce′ 캡처 

    가수 비욘세(왼쪽)와 제이지 부부가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을 배경으로 촬영한 ‘에이프싯(APESHIT)’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루브르박물관은 이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작품을 중심으로 ‘아트 투어 프로그램’을 마련했고, 관람객이 급증하는 효과를 봤다. 유튜브 채널 Beyonce′ 캡처 

    서울에 있는 베이글 전문점 ‘런던 베이글 뮤지엄’ 앞. 베이글을 사려고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보면서 이 글의 구상이 떠올랐다. 사실 상호의 ‘런던’과 ‘베이글’ ‘뮤지엄’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그러나 이 조합이 사람들 마음을 휘어잡았다면 그것도 하나의 사회문화적 현상이다. 

    가까운 과거를 돌아보면 20세기 미술계는 작가, 미술관, 비평가가 삼각축이 돼 작품의 가치를 결정했다. 전문가들은 작품의 의미와 맥락을 해석하며 ‘권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21세기 디지털 플랫폼 시대에서 가치는 도달률, 체류 시간, 공유 횟수 같은 ‘지표’로 계산된다. 30초짜리 틱톡 영상 하나가 무명작가를 스타로 만들고, 수십 년 경력의 큐레이터가 기획한 전시장은 한산한 빈 공간으로 남는다. 리움미술관은 방탄소년단(BTS) RM의 소셜미디어 영향력 덕분에 개관 이래 최다 관람객을 기록한 적이 있다. 이처럼 오랜 세월 쌓인 예술적 권위가 ‘팔로어 수’ 앞에서 무력화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예술가와 인플루언서 사이 긴장 관계

    이를 단순히 ‘문화 저급화’ 현상으로 치부한다면 우리가 마주한 변화의 본질을 반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문화권력 중심축은 미술관 큐레이터에서 추천 알고리즘으로, 비평가의 언어에서 데이터의 숫자로 옮겨가고 있다. 이는 한국만의 현상도, 일시적 유행도 아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틱톡 채널을 운영하고, 파리 루브르가 비욘세의 뮤직비디오 촬영지가 되는 것은 이런 변화에 대한 제도권의 불가피한 적응이다.

    예술가와 인플루언서 간 갈등의 본질은 다른 시간과 보증 방식의 충돌이다. 순수예술은 긴 시간의 축적을 통해 권위를 쌓는 반면, 소셜미디어는 빠른 확산과 즉각적 반응으로 가치를 증명한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과 유튜버의 협업이 있었다. 이에 대한 한 원로 작가의 “30년 작업이 셀카 배경으로 전락했다”는 한탄과 갤러리의 “인스타그램 포스팅 후 판매가 60% 늘었다”는 현실 보고는 서로 다른 잣대로 같은 현상을 평가한 결과일 뿐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경고한 ‘문화산업’은 예술을 표준화하고 상품화했다. 오늘날 그 과정은 추천 알고리즘의 최적화와 피드백 루프의 자동화로 더욱 정교해졌다. 푸코가 말했듯이 권력은 소유물이 아니라 관계의 효과다. 인플루언서는 단순히 팔로어 수가 많은 이가 아니라, 사람들이 정보를 얻고 행동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더 주목할 점은 창작자 자체의 변화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용어를 빌리자면 오늘의 창작자는 작가이면서 편집자, 스트리머이면서 기획자를 오가는 ‘혼종적 주체’가 됐다. 아서 단토가 말한 것처럼 예술이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제도와 담론이 형성하는 특정한 ‘공간’이 필요하다. 과거에는 이 공간이 미술관이나 화이트큐브 같은 오프라인 현장이었지만, 지금은 온라인 플랫폼으로 많이 옮겨갔다. 그래서 오늘날 창작자는 전통적인 예술가 역할을 넘어 다양한 형태로 창작과 소통을 동시에 하는 복합적 주체가 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인스타그래머블’ 전략을 택한 미술관은 관람객 증가라는 성과를 얻었지만, ‘놀이공원화’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에 대한 해법은 단순한 ‘셀카 금지’나 규제가 아니라, 접근성과 콘텐츠의 깊이를 동시에 추구하는 체계적 설계에 있다. 입구는 짧은 하이라이트와 쉬운 동선으로 구성해 진입 장벽을 낮춘다. 그러나 일단 들어온 관객에게는 작업노트, 연구 아카이브, 큐레이터 토크로 이어지는 심화 경로를 제공해야 한다. 평가할 때도 단순 노출이나 클릭이 아닌 체류 시간, 재방문율, 심화 콘텐츠 전환율 등에 가중치를 두는 지표를 사용해야 한다. 이는 도달과 깊이의 교환이 아닌 결합을 추구하는 것이다.

    미술 애호가로 알려진 방탄소년단(BTS) 멤버 RM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이승조 도열하는 기둥’ 전을 감상한 뒤 소셜미디어에 올린 사진. 인스타그램 rkive 계정 캡처 

    미술 애호가로 알려진 방탄소년단(BTS) 멤버 RM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이승조 도열하는 기둥’ 전을 감상한 뒤 소셜미디어에 올린 사진. 인스타그램 rkive 계정 캡처 

    새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문법

    경계가 무너지는 현상도 주목할 점이다. 유명 원로 화가가 인스타그램을 시작했고, 카우스가 유튜브를 통해 작업 과정을 공개하며, 침착맨이 전시를 열고, 킹기훈이 퍼포먼스 아트를 선보이는 것은 시대 변화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제 “누가 진짜 예술가인가”를 묻는 대신 “누가 분산된 주의력을 더 정당하게 오래 붙들어 지각을 변형시키는가”를 물어야 한다.

    갤러리와 아트페어는 인플루언서 마케팅을 인정하되, 작가의 목소리와 작품 맥락이 드러나는 동선을 필수로 설계해야 한다. 비평과 저널리즘은 ‘저급화’ 프레임을 벗고 주의력의 정치경제학을 새로운 분석 도구로 삼아야 한다. 정책당국은 공공 플랫폼의 알고리즘 감사를 제도화하고, 교육 현장은 데이터 리터러시와 맥락 해석 능력을 동시에 가르쳐야 한다.

    문화권력의 전장은 더는 갤러리의 흰 벽이 아니다. 5인치 스마트폰 화면, 그 안에서 작동하는 추천 알고리즘이 새로운 큐레이터다. 깊이를 포기한 도달은 공허하고, 도달을 포기한 깊이는 고립된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느린 가치’와 ‘빠른 지표’라는 두 문법을 모두 발명하고 운용하는 지혜다. 

    변화의 흐름을 읽고, 새로운 원칙을 만들고, 그 기준을 내세우는 자만이 시장과 세상을 이끌 수 있다. 새 시대는 새로운 문법을 요구하며, 그 문법을 먼저 창조하는 자만이 다음 시대의 문화권력을 쥐게 될 것이다. 놀랍게도 한국은 그 가능성을 가진 나라가 됐다. 

    김재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경상대학장, 국민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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