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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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몽골에서 고려로 이어진 ‘소주의 길’

[명욱의 술기로운 한국사] 세계 판매 1위 증류주 소주, 기원은 몽골에 정복당한 호라즘 왕국

  • 명욱 주류문화칼럼니스트

    입력2025-05-18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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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증류주는 무엇일까. 위스키일까, 보드카일까. 아니면 코냑이나 중국 백주일까. 의외의 정답은 한국 소주다. 국제 주류 전문 매체 드링크인터내셔널이 매년 발표하는 ‘더 밀리어네어스 클럽(The Millionaires’ Club)’ 순위에 따르면 한국 소주 브랜드 ‘진로’는 2002년 이후 20년 넘게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드카의 대명사인 스미노프와 미국 버번위스키의 대표 격인 잭 다니엘스도 제쳤다.

    제주 고소리술. 제주샘주 제공

    제주 고소리술. 제주샘주 제공

    제주 고소리술이 된 소주

    그렇다면 한국 소주의 기원은 어디에 있을까. 소주는 역사적 전파의 결과로 처음 우리 주류사에 등장했다. 소주의 유래가 등장하는 최초의 문헌은 조선 광해군 재위기에 이수광이 편찬한 백과사전 ‘지봉유설’이다. 이 책에는 소주가 몽골로부터 전래했다고 기록돼 있으며, 시기적으로는 고려가 원나라 간섭을 받던 13세기 무렵임을 시사한다.

    몽골이 증류 기술을 어디서 배워왔는지를 살펴보면 지금의 중동 지역인 호라즘 왕국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란 북부와 중앙아시아 일대를 아우르던 호라즘은 13세기 초 몽골 제국의 정복 대상이 됐고, 1231년 최종 멸망했다. 같은 해 몽골은 고려에 대한 1차 침입을 감행한다. 즉 몽골이 서방 이슬람으로부터 연금술(증류 기술)을 흡수한 뒤 거의 동시에 동방에 진출해 이것을 고려에 전파한 것이다.

    소주는 이후 고려 각지로 확산했다. 주된 전파 경로로 거론되는 지역은 당시 수도였던 개성, 몽골군이 일본 원정을 준비하려 주둔했던 경북 안동, 또 탐라총관부가 설치됐던 제주 등이다. 이 중 제주는 약 100년간 몽골의 실질적 지배를 받은 지역으로, 외세의 영향이 가장 깊게 남아 있다.

    ‘지봉유설’. 국립중앙도서관

    ‘지봉유설’. 국립중앙도서관

    제주에서 소주는 토착 곡물과 결합해 고유한 형태로 진화했다. 그 중심에는 오메기떡이 있다. 제사나 마을 행사에 빠지지 않는 이 떡은 차조로 만든다. 쌀농사가 어려운 제주에서는 좁쌀과 차조가 주식이었다. 이것을 주재료로 한 오메기떡을 발효시켜 오메기술을 만들고, 다시 그것을 증류해 고소리술을 만들었다. 고소리란 증류기 상부 덮개를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고소리술은 알코올 도수 40도에 이르는 고도주로, 제주 토양과 곡물 맛이 짙게 배어 있는 게 특징이다. 현재는 제주 애월읍 제주샘주와 성산읍 제주술익는집에서 고소리술을 경험해볼 수 있다.



    제주에 남은 몽골 흔적은 증류 기술만이 아니다. 삼별초가 끝까지 항전했던 항파두리성, ‘목호의 난’과 최영 장군에 대한 기록 등이 제주 곳곳에 남아 있다. 서귀포 법환포구에는 관련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애월읍 다락쉼터에는 김통정 장군과 최영 장군의 석상, 기념비도 설치돼 있다.

    또 다른 뿌리, 개성·안동

    개성과 안동은 한국 소주의 또 다른 뿌리다. 개성 감홍로는 지초와 용안육을 넣어 만든 붉은 증류주로, 조선 왕실에서 약용주로 사용했다. 현재는 파주 식품명인 이기숙 씨가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안동소주는 말할 것도 없이 한국 증류주의 중심이다. 명인안동소주, 조옥화 안동소주, 진맥 소주, 회곡 안동소주 등 9곳 넘는 양조장에서 다양한 소주를 생산하고 있으며, 최근 농암종택도 자체 브랜드를 출시했다.

    소주 한 잔에는 세계 역사가 담겨 있다. 중동 호라즘에서 온 증류 기술이 몽골을 거쳐 고려에 이르렀고, 다시 제주의 토양과 곡물, 문화 속에서 고소리술로 피어났다. 수천㎞를 넘는 이 여정은 시대와 삶이 얽힌 시간의 누적이다. 그렇기에 소주의 뿌리를 알고 마신다는 것은 곧 겹겹의 기억과 문화를 함께 향유하는 일이다. 고소리술에 담긴 제주의 풍토, 안동소주에 깃든 사대부 정신, 감홍로에 담긴 궁중의 향취는 결국 오감을 통해 경험할 때 비로소 온전히 다가온다. 언젠가 그 술이 자란 땅을 직접 밟아보기를. 술은 언제나 사람과 자연의 이야기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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