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는 며칠 내내 장맛비가 쉴 틈 없이 쏟아졌다. 그치는가 싶다가도 돌풍과 함께 사방에서 비를 뿌리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쌀쌀맞게 뚝 멎는다. 광화문에서 종각까지 걷는 중에도 우산을 몇 번이나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게 하는 요사스러운 날씨다. 비가 그쳐도 선선한 바람 한 줄기조차 허락지 않는 하늘이 야속할 뿐이며 하루 종일, 밤새도록 너무 축축해 덩달아 축축 처진다.
엄마는 장마철에 국수를 자주 말아 냈다. 어릴 때는 국수 삶는 일이 밥 짓는 것보다 간단한가 싶었지만, 손수 차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엄마의 국수는 멸치국물에 소면을 말고 애호박과 달걀지단을 고명으로 얹은 것이다. 엄마는 그 자리에서 매운 고추와 대파를 쫑쫑 썰어 넣은 양념장을 척척 만들어 찻숟가락을 꽂아 냈다. 때때로 양념 털고 국물 짜낸 신김치를 잘게 썰어 사발 가득 담아 내놓기도 했다. 오빠와 나는 김을 부숴 밥상 주변으로 신나게 날리며 국수 위에 잔뜩 얹어 먹는 것도 좋아했다.
지금도 빗줄기가 세차게 땅을 두드리는 날이면 지글지글 지져 먹는 전보다 가족이 둘러앉아 가만히 말아 먹던 국수 생각이 먼저 난다.
뽀송뽀송하게 씻고 나와도 금세 습기가 온몸에 들러붙는 장마철에 뜨끈한 국수가 웬 말인가 싶겠지만 멸치국수는 그럴 만하다. 감칠맛이 우러난 시원한 국물로 가슴을 채우면 하루의 시름이 배꼽 아래로 착 가라앉는다. 부들거리는 국수 가락을 이리저리 다루다 보면 내 맘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일도 있구나 싶어 안도의 숨이 절로 나온다. 하루 종일 열기와 냉기를 오가며 치열하게 보낸 여름 하루의 선물 같은 음식이 바로 멸치국수다. 몸과 마음에 들어찬 더위나 시름의 응어리를 살살 어루만져 녹이는 그립고 부드러운 손길 같다.
멸치국물은 질 좋은 멸치를 수분 없이 말리거나 마른 팬에 볶은 뒤 물을 담은 냄비에 잔뜩 넣고 끓여 만든다. 멸치는 센 불에 오래 끓이면 국물 맛이 씁쓸해진다. 처음부터 내장을 일일이 빼거나 아주 약한 불에 뭉근하게 우리면 오래 끓여도 쓴맛이 덜 난다. 서울 삼각지에 있는 ‘옛집국수’는 연탄불로 천천히 우려 쓴맛을 잡는다. 멸치국물을 끓일 때 소금이나 국간장으로 간을 보태면 감칠맛이 살아난다. 물론 다시마, 무, 대파, 양파 등을 더해 개성 있는 국물 맛을 낼 수도 있다. 국수는 야들야들한 소면도 좋고, 탄력 있는 중면도 어울린다. 고명은 집집마다 다르다. ‘옛집국수’는 통통한 유부와 얇게 썬 다시마, 대파를 올린다.
서울 공릉동 국수거리에 있는 멸치국숫집들에서는 김과 양념장이 고명의 주인공이다. 서울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앞역 앞에 있는 ‘맛있는 잔치국수’는 달걀지단, 부추, 애호박 등을 곱게 올려준다. 전남 담양 관방제림 근처의 유명한 ‘진우네국수’는 약간의 양념 외 고명은 일절 없이 국수를 낸다.
유명한 멸치국숫집의 업력은 최소 10년이다. 그 오랜 비법과 정성을 한 그릇에 푸짐하게 담아 아직도 3000~4000원에 내놓는다. 마음 무겁고 주머니 가벼우며 푹 젖은 발걸음을 옮기기 힘들 때 주변에 있는 국숫집에 들러보자. 버거운 여름 한순간이 잠시 멎을지도 모른다. ‘생각의 여름’이 부른 노래 ‘엎드리는 바다/ 시리게 앉은 뭍/ 흥건한’이라는 가사를 닮은 멸치국수와 함께 가만히 가라앉는 시간을 만끽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