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과 미국은 우리보다 더 긴 보수·진보 간 경쟁과 승패의 정치사(政治史)를 갖는다. 오랜 역사만큼 두 진영 사이에 ‘선의의 경쟁’이 이뤄지고 있으니 우리로서는 부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유럽과 미국의 최근 보수·진보 진영의 흐름을 짚고 한국 정치가 배워야 할 점을 살펴본다.
6월4~7일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에서 중도우파인 유럽인민당(Euro-pean People’s Party)이 최대 의석을 유지했다. 의석 비율은 5년 전의 36.8%에서 36.3%로 소폭 하락했으나, 사회민주당의 의석 비율은 더 큰 폭으로 떨어졌고 무소속과 극우파 등이 선전했다.
이번 선거 결과는 70여 년 만의 최대 경제위기에 직면해 유럽인들이 보수 진영을 선택했다는 하나의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이 선진국을 휩쓸었을 때 영국에서는 79년 마거릿 대처 총리가, 미국에서는 81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했다. 두 지도자는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며 민영화 등을 골자로 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이처럼 경제위기 때는 시민이 보수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선거 결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번 경제위기의 주범이 지나친 규제완화와 시장 만능을 내세운 신자본주의, 즉 ‘앵글로색슨 자본주의’인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그러나 영국의 보수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FT)’도 지나친 규제완화가 경제위기의 한 이유임을 인정했다. 인구와 경제력을 기준으로 유럽의 ‘빅3’인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도 경제위기는 보수와 진보 진영에 상이한 영향을 미치고 있어 주목된다.
영국의 노동당은 레임덕에 빠진 고든 브라운 총리의 진퇴를 두고 ‘내전’에 휩싸였다. 내년 상반기로 예정된 총선에서 노동당의 재집권 가능성은 희박하다. 1997년부터 집권한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의 노동당이 주도한 경제정책이 현재 경제위기에 책임이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 까닭이다. 반면 데이비드 카메론이 이끄는 보수당은 전통적 보수 진영이 다소 등한시하던 여성과 환경문제 등에 대해 대안을 제시, 내년 총선에서 집권할 가능성이 높다.
9월 말 총선을 앞둔 독일에서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기민당의 재집권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보수진영인 기민당, 기사당은 현재 사회민주당과 대연정을 구성하고 있으나 총선에서 승리, 좀더 친기업적인 자유민주당(FDP)과 연정을 구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독일의 진보진영은 사민당과 좌파연합으로 양분돼 있다. 지난달부터 선거 모드에 진입한 사민당은 최저임금제 확대 등 분배를 중시하는 공약을 내세운다. 사민당의 슈뢰더 전 총리와 한때 라이벌이던 오스카 라퐁텐이 이끄는 좌파연합은 세계화에 반대하며 최저임금제 전면실시를 공약으로 제시, 사민당보다 훨씬 선명한 진보적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좌파연합은 옛 동독 지역에서만 지지도가 높을 뿐, 전국적으로는 소수정당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감독자’로서 국가의 역할을 중시하며 노사의 공동결정을 특징으로 하는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에서는 보수와 진보진영 모두 이번 경제위기의 원인을 앵글로색슨 자본주의의 결점에서 찾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4월 초 런던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경제정상회담에서 독일과 프랑스가 금융규제 강화를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헤지펀드 등 ‘먹튀자본’의 탐욕을 규제하지 않고 미국이나 영국의 요구처럼 경기부양책만 강조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논리다.
영·독·프 보수, 진보 뜻 저마다 달라
미국식 자본주의 비판의 선두에 선 프랑스는 자국의 경제모델이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유럽의 최대 경제대국은 독일이고, 금융산업의 강자는 영국이다. 프랑스의 독특한 경제모델을 정형화하고 이를 따르려는 나라는 거의 없다. 더구나 2007년 5월 집권한 사르코지 대통령은 집권 초기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노동개혁을 추진하려 했지만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나라마다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다. 각 나라가 처한 지정학적 환경과 역사 경험, 정치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웃나라들인 영국, 프랑스, 독일도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이 상이하다.
이런 한계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경제에서 친시장주의는 보수라 할 수 있다. 외교정책에선 이분법적 분류가 다소 어렵다. 영국은 보수, 진보 모두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적극 이용, 경제 규모에서 중진국임에도 국제사회에서 이에 걸맞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반면 앙드레 말로가 “우리 모두는 드골주의자였고, 드골주의자이며, 드골주의자일 것이다”라고 말했듯 프랑스는 좌우를 막론하고 국가의 독립과 주권, 위신을 중시하는 드골주의가 외교정책의 기조를 이룬다.‘빅3’의 이런 다양성을 보면 이들 나라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또한 상대방의 논리를 반박하며 상생하려는 합리적 토론이 주를 이룬다. 그야말로 ‘합리적 보수’와 ‘열린 진보’가 체질화했다.
그 비근한 예는 최근의 영국 정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국 보수당 의원들이 그동안 소속되어 활동해오던 유럽의회 내 유럽인민당 정치그룹(우리 국회의 원내교섭단체와 유사)에서 탈퇴를 선언하자 보수진영의 비판이 잇따랐다.
FT는 사설에서 “(탈퇴는) 영국을 고립시킬 뿐”이라며 “보수당은 당내의 유럽통합 회의론자들에 대한 유화 정책을 그만두라”고 촉구했다. 같은 보수진영 내에서 상대의 잘못을 논리적으로 지적하며 정책 전환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한편 제2 야당으로 보수당과 이념을 달리하는 자유민주당도 보수당의 탈퇴 결정을 합리적으로 비판해 눈길을 끌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선 경제위기 처방과 대북 정책을 두고 보수와 진보진영의 논의가 분분하다. 보수와 진보 모두 ‘한반도 비핵화’라는 목표를 공유하지만 이를 실천할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경제위기 대책도 마찬가지다.
사회민주주의의 땅 유럽은 오랜 투쟁을 통해 극단적 의견을 지닌 사람도 포용하고 상호 존중하는 분위기에서 논쟁을 벌인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토론은 아직도 제로섬 게임이다. 이념의 스펙트럼이 협소해 합리적 보수와 열린 진보의 틀을 형성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안병억 연세대-SERI EU센터 초빙연구원· 국제정치학 박사 anpye9@gmail.com
오바마 지지율 고공행진 이유
취임 반년을 갓 넘긴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주가가 떨어질 줄 모른다. 대공황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 그리고 미국의 국제적 리더십 실종이란 커다란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출범한 젊은 대통령. 그간의 성과가 눈부시다.
오바마는 무려 790억 달러(약 101조원)에 달하는 사상 최대의 경기부양안을 의회 동의 아래 통과시켰고, 금융위기의 주범인 투자은행과 헤지펀드를 감독·규제할 수단을 법제화했다. 또한 인권침해 논란을 빚어온 관타나모 기지 내 수감시설을 폐쇄하고 테러 용의자에 대한 불법 심문을 금지했다. 그리고 쿠바·베네수엘라·중동 지역 국가 등 적성국가에 대한 스마트 외교, 기후변화에 대한 적극적 대응 등 외교 정책 또한 한층 정교해졌다. 그 덕에 그간 실추된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 국민의 지지율은 높고 언론 평가도 칭찬 일색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직무 수행에 대한 국민 만족도는 취임 6개월이 지났음에도 60%를 웃돈다. 유력 시사주간지 ‘타임’은 오바마가 취임 후 100일 동안 루스벨트 대통령 이래 가장 인상적인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한다.
이는 공화당에 대한 낮은 평가와 뚜렷한 대비를 보인다. 경제 정책에 있어 오바마에 대한 국민 지지율은 63%로 공화당의 20%보다 3배가 높다. 공화당의 전통적 아성인 국방 문제에서도 미국인 3명 중 2명은 오바마의 손을 들어준다. 여당인 민주당도 56%에 달하는 높은 지지율을 구가한다. 반면 공화당에 대한 호감은 31%로 지난 25년간의 여론조사 중 최악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진보세력’ 오바마 그리고 민주당에 대한 지지의 상당 부분은 ‘보수세력’ 공화당의 몰락에 따른 반사 효과로 해석된다. 전임 부시 대통령은 잇단 실정 때문에 미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전락했다. 무차별적 감세 정책으로 재정적자는 누적됐고, 허리케인 카트리나 참사 및 이라크 전쟁 등을 통해 부시 행정부의 무능과 독선이 드러났다. 그 때문에 미국 가계는 예전보다 더 쪼들리게 됐고, 두 번이나 전쟁을 치렀음에도 미국인들은 더욱 큰 테러와 인권 침해의 위협 속에 살게 됐다.
월가의 몰락은 지도자 한 명이 아닌 공화당 전체에 치명적인 타격을 줬다. 1980년 이래 공화당의 신조로 확고해진 보수주의적 이념, 즉 시장에 대한 무한한 신뢰, 규제의 혁파, 공급 중심의 경제담론 등이 금융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은 것이다. 한편 공화당 담론의 다른 한 축인 ‘가족의 가치(family value) 회복’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현격히 줄었다.
“정치는 대통령 혼자 하는 게 아냐”
그러나 미국 국민이 보수의 반대인 진보여서 오바마와 민주당을 선택하고 지속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오바마의 국정운영 방식은 그의 부상(浮上)을 비상(飛上)으로 격상시킨다. 대통령 오바마를 움직이는 중심 가치는 소통과 타협이다. 그는 자신의 주요 정책을 실현하는 데에 의회와 대중과의 소통을 가장 중시한다.
미국의 대통령제는 권력의 분립이 아닌 공유에 방점이 있고, 중요 정책기조는 의회의 동의와 협력 없이 실현될 수 없다. 정치는 대통령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입법, 행정, 사법 등 서로 다른 권력기관이 협력해 성과를 일궈나가는 것이다. 오바마는 이 점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비서실장 자리에 하원에서 잔뼈가 굵은 람 임마뉴엘을 임명한 것이나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시벨리우스 보건장관 등 거물급 정치인을 영입한 것은 이들을 통해 작게는 의회의 협력을, 크게는 다양한 정치사회적 협력을 유도하려는 것이라 하겠다.
대중과의 ‘수평적’ 소통 활성화는 오바마 성공의 중요 포인트 중 하나다. 기존 워싱턴 정치는 ‘대중은 계몽의 대상’이라는 뿌리 깊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일반 국민은 복잡한 정치·정책 문제를 고민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이를 소화할 능력도 없다고 간주한다. 따라서 워싱턴의 정치가들은 다면적 정책 문제를 흑과 백의 문제로 단순화하고 큰 정부는 민주당, 작은 정부는 공화당이라는 식의 논리와 이미지로 대중을 가르치려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오바마는 대중을 소통 가능한 시민이며 어려운 정책 문제를 이해할 의지와 능력을 가진 사람들로 여긴다. 그는 그간 워싱턴 정치의 잘못된 인식이 대중을 정치에서 소외시켰다고 진단한다. 오바마는 대중과의 소통에 적극 임함으로써 대중의 인식이 변하고, 그에 따라 정책도 변화하리라 믿는다고 언론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누차 강조했다.
정치에 대한 가장 고전적 정의는 ‘자원에 대한 권위적 배분’, 즉 정치란 주어진 자원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나눌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라는 시각이다.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규칙이 정립되는 과정이 바로 정치의 제도화이다. 개개인은 보다 많은 자원을 획득하길 원하고, 그 때문에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끼리 충돌한다. 여기서 사회 전체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방법은 공정한 규칙의 확립, 그리고 자원을 어떻게 소유하고 나눌 것인가에 대한 구성원 간의 합의이다.
오바마식 정치가 성공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바로 정치에 대한 ‘태도’에 있다. 숱한 국정과제 처리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보수와 진보 진영이 서로를 탓하고, 정부는 ‘탈(脫) 여의도’를 선언하며 라디오 주례연설 등 ‘일방향’ 홍보에만 힘을 쏟는 한국 정치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금 정치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다.
김준석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jspicture@dongguk.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