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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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속 행정의 극치, 교육과정 개편

한국 6개월 만에 후딱 vs 미국 30년에 걸쳐 차근차근…학습 부담 경감이 목표일 수 없어

  • 정진수 충북대 물리학과 교수 chung@chungbuk.ac.kr

    입력2015-07-27 11: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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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속 행정의 극치, 교육과정 개편
    나는 가끔 일반인들에게 “초중등학교 교육 내용을 개정하려면 몇 명이 모여 얼마 동안 논의해야 할까”를 묻곤 한다. 가장 많이 듣는 답은 각 분야 전문가 100명 이상이 1~2년은 숙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육부는 지난해 9월 새로운 교육과정 총론에 대한 주요 사항을 발표했다. 교육학자 12명이 모여 약 6개월 만에 정한 내용이었다.

    교육과정 총론은 학년별로 어떤 과목을 몇 시간씩 가르칠지 정하고, 각론은 각 과목에서 학년별로 어떤 내용을 가르칠지 정한다. 교육부는 지난해 총론 발표 뒤 과목별 연구진을 꾸려 약 6개월 만에 각론 결과보고서도 받았다. 이를 약간 손질해 9월 새로운 교육과정을 고시할 계획이다. 이제 우리나라 초중등학교 교육은 바로 이 고시를 기초로 짜이게 된다.

    통합 교육과정의 간판 과목은 ‘통합사회’와 ‘통합과학’이다. 그런데 시안을 살펴본 결과 통합과학은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 네 과목이 각각 4분의 1씩 들어갔다. 과목 이기주의 구태가 여전한 셈이다. 현행 교육과정에 있는 융합형 과학에 비하면 첨단과학 분야 내용도 많이 사라졌다. 과거 개념 위주 교육으로 회귀한 모양새다. 이렇게 하면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기술 창조력을 갖춘 창의 융합형 인재’를 키울 수 있다는 것은 교육부 측 주장일 뿐이다.

    30년에 걸쳐 내딛은 교육개혁 첫걸음

    미국 사례와 비교해보면 우리나라 교육과정 개편의 문제점이 극명히 드러난다. 1957년 소련이 인류 최초로 인공위성을 발사한 데 놀란 미국은 60년대에 과학교육 체계를 획기적으로 바꿨다. 생활 주변의 지식을 가르치는 과학교육에서 과학자를 키우기 위한 과학으로 변화를 꾀한 것이다. 이에 따라 교과과정에 과학의 기초 개념을 대거 도입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이에 대한 반성이 시작됐고, 85년 미국과학진흥협회(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AAAS)는 새로운 과학교육을 위한 ‘2061 프로젝트’를 선언했다. 85년은 핼리혜성이 지구 근처를 지나간 해다. 이 핼리혜성이 다시 지구를 찾아오는 2061년까지 76년 동안 미국 과학교육의 틀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겠다는 게 당시 AAAS가 내건 목표였다. 1848년 설립된 AAAS는 세계 최대 과학자 집단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학술지 ‘사이언스’를 발행하는 곳이다.

    ‘2061 프로젝트’에는 철학, 수학, 과학, 공학, 사회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100여 명이 참여했다. 이들이 4년에 걸쳐 논의한 끝에 1989년 내놓은 것이 ‘모든 이를 위한 과학(Science for All Americans)’이란 책이다. 이 책은 첫 문장 ‘이 책은 과학적 소양에 관한 것이다’를 통해 과학교육의 목표를 선언했고, 나머지 부분에서 ‘모든 사람’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갖춰야 할 과학적 소양의 수준을 설정했다. 이 책이 제시하는 과학적 소양은 다음과 같다.

    ‘과학의 아름다움과 경이를 감상할 수 있다. 공적 논쟁에 참여할 수 있을 만큼 과학과 공학에 대한 지식을 갖춘다. 일상생활 관련 과학, 기술 정보에 대한 사려 깊은 소비자가 된다. 학교 밖에서도 과학에 대한 학습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 자신이 선택하는 직업 진로에 입문하기 위한 기술을 갖춘다.’

    이는 과학 개념을 단순히 주입하는 교육으로는 이룰 수 없는, 종합적 역량이다. 이후 AAAS가 다음 스텝을 내딛기까지 또 4년이 걸쳤다. 이번에는 교사와 전문가 150여 명이 참여해 1993년 ‘과학적 소양의 체계(Benchmarks for Science Literacy)’라는 제목의 결과물을 내놨다. ‘모든 사람’이 1989년 설정한 과학적 소양을 갖게 하려면 학년별로 어떤 내용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정한 책이다. AAAS는 2001년과 2007년 두 차례에 걸쳐 학년별로 가르치는 내용이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도표로 정리한 ‘과학소양기준 연계도(Atlas of Science Literacy)’도 펴냈다.

    이러한 내용을 일선 교육현장에 보급하는 것은 미국연구평의회(National Research Council·NRC)가 맡았다. NRC는 1916년 미국과학한림원이 정책 수립과 공공 정보 보급 등을 위해 설립한 실행기관이고, 미국과학한림원은 1863년 링컨 당시 미국 대통령이 과학 관련 정책자문을 위해 만들었다. 그만큼 미국에서 역사와 권위를 인정받는다. 미국은 국가가 주도하는 교육과정 고시가 없고 각 주가 교육 내용을 자율적으로 정하는데, 이 과정에 NRC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줄이는 게 능사인가

    졸속 행정의 극치, 교육과정 개편
    NRC는 AAAS 연구 결과를 토대로 삼아 1996년 ‘미국과학교육표준(National Science Education Standards)’을 출간했다. 이때 참여한 연구진이 150명에 이른다. 또 2012년에는 그간 이뤄진 과학 발전과 과학교육 연구 결과를 종합해 ‘유초중등 과학교육 체계(A Framework for K-12 Science Education)’를 발표했다. 약 100명의 연구진이 수년간 연구하고 수천 명이 이후 2년간 검토, 수정해 완성한 보고서다. 이를 교육과정 형태로 만든 ‘차세대과학교육표준(Next Generation Science Standards)’은 미국 13개 주에서 채택했고, 40개 이상의 주가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단계까지 오는 데 30년이 걸렸다. 그런데도 미국 과학계는 ‘이제 과학교육 개혁의 첫걸음을 뗐다’고 말한다. 현장 적용이 더 큰 숙제라는 뜻이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자. 현재 교육부는 새 교육과정을 만드는 모든 과목 연구진에게 ‘현 교육과정 내용의 20%를 없애라’고 주문하고 있다. 우리나라 교육과정은 1997년과 2007년에 이미 30%와 20%가 줄었다. 여기서 또 20%를 줄이면 1997년 이전에 비해 45%만 남게 된다.

    더 큰 문제는 교육부가 ‘지난 교육과정에 없던 내용을 새로 추가해서는 안 된다’는 지침도 내렸다는 점이다. 창업 10여 년 만에 세계 10대 기업으로 성장한 구글의 성장신화 배경에는 빅데이터가 있다. 검색엔진이 구축한 빅데이터를 활용해 버는 돈이 구글 수익의 절반이 넘는다. 이미 컴퓨터와 로봇이 수많은 일자리를 없애고 있고, 머지않아 사물인터넷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빠르게 변화시킬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학생들에게 이런 새로운 내용을 가르칠 수 없다.

    ‘학습 부담 경감’이 최선의 길은 아니다. 아이들이 미래에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능력을 키워주는 게 국가 교육과정의 임무다. 그런데 새 교육과정은 이를 포기한 듯 보인다.

    교육부는 9월까지 개정 교육과정을 고시하겠다고 못을 박았다. 이 시한의 이유를 설명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교육 전문가들은 새 교육과정을 9월에는 고시해야 교과서 개발과 검정을 거쳐 현 정부 임기 말까지 각급 학교에 교과서를 보급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어쨌든 정해진 시한 때문에 교육과정 각론 개발에는 시간이 6개월 정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과연 이렇게 만들어진 교육과정이 20~30년 후 우리 경제에 어떤 여파를 미칠까. 박근혜 정부의 최대 실책으로 평가될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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