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푸티에 와인 레이블에 새겨진 점자. 사진제공 필 로저스 (flickr.com)
하지만 샤푸티에 와인에는 다양함 속에서도 일관된 것 2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레이블의 올록볼록한 점자들과 각 와인이 내뿜는 테루아(토양과 기후 등 자연환경)의 선명함이다. 레이블의 점자는 생산자, 생산연도, 포도밭, 지역 그리고 와인 색상 정보 등을 알려준다. 샤푸티에는 1808년부터 지금까지 200년 넘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데, 레이블에 점자를 넣기 시작한 것은 1994년부터였다. 샤푸티에 경영자 미셸 샤푸티에가 자신의 친구이자 가수인 길베르 몽타뉴가 TV 인터뷰에서 “눈이 보이지 않아 와인을 살 때마다 누군가를 꼭 데리고 가야 한다”고 말한 것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이 계기였다.
샤푸티에의 이런 섬세함은 경영자가 가진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도 연관이 있다. 샤푸티에가 직접 운영하는 포도밭은 바이오다이내믹 방식으로 경작되는데, 이는 유기농에서 더 나아가 생물의 다양성(biodiversity)과 천문학을 포괄하는 농법이다. 화학물질을 전혀 사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암소의 분뇨, 석영 가루, 허브 등 천연 재료를 암소 뿔에 넣거나 동물 내장으로 감싸 땅에 묻어뒀다가 천연 비료와 살포제를 만드는 데 이용한다.
이뿐 아니라 파종, 수확 등 주요 일정도 천체 움직임에 따르는데 달이 어느 별자리를 지나는지를 주시해 정한다. 포도밭을 자연과 우주의 일부로 여기는 이 지속형 농법(sustainable agriculture)은 이미 1924년 시작됐고 와인 품질이 좋아진다고 입증되면서 세계 유명 와이너리 가운데 이를 따르는 곳도 늘고 있다. 샤푸티에도 이렇게 생산된 포도가 테루아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와인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와이너리 중 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샤푸티에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기보다 해마다 다른 기후가 만들어내는 그해의 맛을 담아내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여러 품종을 혼합하는 것이 론 지방 와인의 특징임에도 샤푸티에는 몇몇 와인은 단일 품종으로 만든다. 코트로티는 백포도 품종인 비오니에를 20%까지 섞을 수 있지만 샤푸티에는 100% 시라로 만든다. 에르미타주 화이트 와인은 마르산과 루산이라는 두 품종을 섞어 만들 수 있지만 샤푸티에는 마르산으로만 만든다. 서너 가지 포도를 혼합할 수 있는 타벨 로제 와인도 샤푸티에는 그르나슈로만 만든다. 사람보다 자연이 와인을 만든다고 믿는 샤푸티에의 대담함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샤푸티에는 론 지방에서만 50종 넘는 와인을 폭넓은 가격대로 생산하고 있다. 수령 90년 이상의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로만 생산하는 르 파비용(Le Pavillon)처럼 병당 70만 원대 와인이 있는가 하면, 2만~3만 원대지만 품질 좋은 벨뤼슈(Belleruche)도 있다. 벨뤼슈 레드 와인은 탄탄한 타닌에 붉은 과일향, 그 위에 감초, 후추 같은 스파이스향이 돋보인다. 그르나슈로만 만든 로제 와인 보르부아(Beaurevoir)는 5만 원대로 선홍빛이 매혹적이고 파워풀하며 농익은 체리향이 일품이다.
\'미국의 한 바이오다이나믹 농장인 지니커에서 천연 비료를 만드는 장면(본문 기사와 관련 없음)(왼쪽). 천연 재료를 담은 암소 뿔. 사진제공 테아마리아 (flick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