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문학동네 펴냄/ 428쪽/ 1만2000원
외국 소설을 읽을 때는 등장인물의 이름이 익숙지 않아 처음에는 속도가 나지 않는데, 더구나 이 소설은 주석(註釋)을 통해 도미니카의 역사 특히 억압과 폭력이 난무했던 트루히요 시대와 관련된 내용을 풍자하는 이중구조라 읽기가 다소 뻑뻑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은 조금만 참으면 된다. 누나 룰라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2장부터는 술술 읽힌다. 도미니카의 역사와 도미니카 출신 인물들의 사랑이야기가 중첩 전개되는 이 소설은 남미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더 쉽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영어와 스페인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역자의 번역 솜씨가 탁월해 나 같은 문외한에게도 어렵지 않게 읽힌다.
가끔 내 삶에 어떤 귀신이 덧씌워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의지대로 열심히 산다고 했지만 결국 어떤 예정된 각본에 의해 내 인생이 지배된 게 아닌가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걸 운명 또는 숙명이라 불러야 할까. 이 소설에서는 그것을 파멸이나 저주를 뜻하는‘푸쿠’라고 지칭한다. 이는 한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벗어나지 못하는 숙명 같은 것이다.
원래 모든 인간의 운명은 사회구조적 시스템에 의해 지배된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전 세계 시민의 운명을 뒤흔들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은 한 국가 단위로는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강력한 외부의 힘에 의해 지배받게 마련이다. 푸쿠는 그런 힘을 상징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주인공 오스카 와오가 결국 이본과 아름다운 사랑의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은 그런 힘의 자장에게 벗어나 그야말로 어떤 ‘득도’의 단계를 성취한 것과 마찬가지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그야말로 동물적인 섹스를 한다. 화자인 유니오르에게는 그게 일상이다. 그러나 여러 여자를 짝사랑하면서도 키스 한번 해보지 못했던 오스카는 죽기 전에 딱 한 번, 그것도 이본과 합일의 경지에 오른 섹스를 한다.
소설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하지만 정말 좋았던 것은 동물적인 방아질이 아니라 둘 사이의 친밀한 조우였다.”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를 빗어준다든지, 줄에 널린 그녀의 속옷을 걷거나 그녀가 알몸으로 화장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든지, 그녀가 예고 없이 그의 무릎에 앉아 목에 얼굴을 살며시 기댄다든지 하는 친밀함. 그녀의 어린 시절 얘기를 듣거나, 그가 그때껏 숫총각이었다는 말을 그녀가 들어주는, 평생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커플만의 친밀함. 그는 그 순간을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 썼다(그 오랜 기다림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자고 제안한 건 이본이었다. 뭐라고 부르지? 글쎄,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녀가 말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게 바로 이런 거로군! 젠장! 이렇게 늦게야 알게 되다니. 이토록 아름다운 걸! 이 아름다움을!”
이본은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창녀(푸타)다. 그런데도 오스카는 주위의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와 목숨 건 사랑을 감행한다. 그러고는 죽기 전에 그토록 아름다운 섹스를 한다. 그것을 인생이라 했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있는 푸쿠를 이겨내고 자신만의 의지대로 이뤄내는 ‘친밀한 조우’일 것이다. 작가는 그것을 ‘사파’라고 했다. 재앙이 똬리를 트는 것을 피하고 나와 가족을 안전하게 지켜줄 유일하고 확실한 역주문 사파 말이다.
어느 시대고 개인에게는 저주를 몰고 오는 트루히요 같은 무시무시한 독재자가 있게 마련이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인가. 비록 총칼로 죽여 사탕수수밭에 갖다 버리는 직접적인 살인행위야 거의 사라졌지만, 그와 비슷한 간접적인 인격살인은 여전히 존재한다. 아니, 폭격기의 조종사가 스위치를 한 번 누르는 행위나 금융시스템과 연결된 컴퓨터의 마우스를 한 번 누르는 행위가 무수한 인명 살상행위로 연결되는 세상이기도 한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이런 엄청난 살인행위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저마다의 사파가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 아름다운 인생이 늘어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