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초당순두부는 예부터 유명했다. 양념간장을 듬뿍 치고 먹는 순두부의 맛은 너무나 부드러워 이른 새벽부터 경포나 시내에서 속을 풀려는 애주가들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비린내가 나지 않는 특유의 콩 냄새 때문이다.
어디 콩 냄새뿐이랴. 이곳 초당동(草堂洞)은 역사와 시심(詩心)이 깃들인 유서 깊은 전통마을로, 동양삼국에 이름을 떨친 여류시인 난설헌 허초희와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비롯한 많은 글을 남긴 교산(蛟山) 허균의 고향이다. 초당리에는 이들 오누이 문장가와 악록 허성(許筬), 하곡 허봉(許 ), 그리고 부친인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문장이 빛나고 있어 난향유곡(蘭香幽谷)과 같은 마을이다.
나의 집은 강릉땅 돌 쌓인 갯가로/ 문 앞의 강물에 비단 옷을 빨았어요/ 아침이면 한가롭게 목란배 매어놓고/ 짝지어 나는 원앙새만 부럽게 보았어요.
초희 죽지사(竹枝祠)(3)을 보면 시경(詩經)에 나오는 연시들처럼 냇가에서 빨래하고 있는 옛날의 고향이 어떠했음도 짐작할 수 있다. 그녀 일가가 살았던 생가터는 지금도 남아 있고, 건립 연대를 모르는 가옥은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의 안채와 사랑채가 서 있다. 또 허균의 시 억감호(憶鑑湖)에서도 초당마을을 회계난정(會稽蘭亭)에 비유하고 있다.
나의 집은 경포호의 서편에 있으니/ 찬 바위 만 계곡이 회계와 같구나/ 물고기와 새 구경으로 산 언덕 헤매며/ 명예와 이욕은 올가미 같아서 웃어버렸네
청담과 채약을 즐겼던 왕희지(307~65년)는 46세 되던 해(353년) 절강성의 비경인 회계난정에서 포석정과 같은 유상곡수거를 차리고 41인의 명류들과 풍류를 즐겼는데, 허균은 바로 고향을 여기에 비긴 것이다. 그의 자유분방한 혼만 아니었더라면 그도 이곳 냇가에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차리고 한평생 무사히 풍류남아로 살다 갔을지도 모른다.
초당리(草堂里)는 그런 곳이다. 만일 그가 통큰 사람만 아니었더라도 그의 가계는 온전히 보존되어 손두부 틀과 맷돌, 순두부를 내리는 무쇠솥이 남아 초당두부는 오늘날 진상품이 아닌 국보급 무형문화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경포호의 불덩이 같은 아침해를 끌어안고 한 시대를 절망하다가 간 사나이였다. 달이 하늘, 호수, 바다, 술잔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떠서 다섯 개나 된다고 하는 경포호의 달밤을 그는 지키지 않고, 동해 거친 물살을 헤치고 해가 끓는 愛日堂(명주군 사촌(沙村))으로 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가을이었다. 그는 화조월석(花朝月夕)이 아니라 애일당(愛日堂)을 꿈꾼 죄로 1618년 8월24일 50세 나이로 능지처참되었다. 이른바 동해 일출을 꿈꾼 죄, 신분차별이 없는 이상향 율도국을 설계한 죗값이었다.
초당두부 또한 그런 역사를 지녔다. 강릉고등학교 앞 ‘엄마손 순두부집’(033-652-2642)의 최종화씨(54) 증언에 따르면 강릉고등학교 전신(前身)은 몽양 여운형씨가 세운 학교로서 미군이 진주했을 때 통역을 못해서 그의 제자들이 통역을 도맡을 만큼 민족사상이 팽배해 있었던 데다. 6·25 후 공산주의가 들어오니, 모두 동참해 남자들이 희생되었단다. 지주가 다섯 집, 소작이 200여호나 되는 마을이었다. 그 다음부터 과부가 된 아낙들은 모두부를 쪄서 시내에 나가 장사를 해 아이들 교육을 했다는 것이다. 11대째 살아온 최종화씨의 두부 속에는 이런 아픔까지도 배어 있어 음식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시끌벅적한 밀레니엄 원단의 해맞이 때는 경포호에서 밀려온 가슴 뜨거운 관광행렬로 줄을 섰다는 이야기도 곁들인다.
사실 성호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우리 민족을 대두박 민족으로 규정했듯이 따끈따끈한 순두부해장국 입맛이야 어디 따로 있었을까 싶다. 지금도 초당두부가 명맥을 유지한 까닭은 공장두부와 달리 20여호 모두들 국산 콩에다 바닷물 간수로 무쇠솥에서 두부를 내린다는 데에 있다. 중국산 콩과는 7배의 차이가 난다. 감옥에서 나와도 맨 먼저 모두부부터 먹이는 청빈한 우리들 마음과 초당두부의 맥도 순 토박이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음은 적이 안심이 되는 일이다.
어디 콩 냄새뿐이랴. 이곳 초당동(草堂洞)은 역사와 시심(詩心)이 깃들인 유서 깊은 전통마을로, 동양삼국에 이름을 떨친 여류시인 난설헌 허초희와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비롯한 많은 글을 남긴 교산(蛟山) 허균의 고향이다. 초당리에는 이들 오누이 문장가와 악록 허성(許筬), 하곡 허봉(許 ), 그리고 부친인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문장이 빛나고 있어 난향유곡(蘭香幽谷)과 같은 마을이다.
나의 집은 강릉땅 돌 쌓인 갯가로/ 문 앞의 강물에 비단 옷을 빨았어요/ 아침이면 한가롭게 목란배 매어놓고/ 짝지어 나는 원앙새만 부럽게 보았어요.
초희 죽지사(竹枝祠)(3)을 보면 시경(詩經)에 나오는 연시들처럼 냇가에서 빨래하고 있는 옛날의 고향이 어떠했음도 짐작할 수 있다. 그녀 일가가 살았던 생가터는 지금도 남아 있고, 건립 연대를 모르는 가옥은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의 안채와 사랑채가 서 있다. 또 허균의 시 억감호(憶鑑湖)에서도 초당마을을 회계난정(會稽蘭亭)에 비유하고 있다.
나의 집은 경포호의 서편에 있으니/ 찬 바위 만 계곡이 회계와 같구나/ 물고기와 새 구경으로 산 언덕 헤매며/ 명예와 이욕은 올가미 같아서 웃어버렸네
청담과 채약을 즐겼던 왕희지(307~65년)는 46세 되던 해(353년) 절강성의 비경인 회계난정에서 포석정과 같은 유상곡수거를 차리고 41인의 명류들과 풍류를 즐겼는데, 허균은 바로 고향을 여기에 비긴 것이다. 그의 자유분방한 혼만 아니었더라면 그도 이곳 냇가에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차리고 한평생 무사히 풍류남아로 살다 갔을지도 모른다.
초당리(草堂里)는 그런 곳이다. 만일 그가 통큰 사람만 아니었더라도 그의 가계는 온전히 보존되어 손두부 틀과 맷돌, 순두부를 내리는 무쇠솥이 남아 초당두부는 오늘날 진상품이 아닌 국보급 무형문화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경포호의 불덩이 같은 아침해를 끌어안고 한 시대를 절망하다가 간 사나이였다. 달이 하늘, 호수, 바다, 술잔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떠서 다섯 개나 된다고 하는 경포호의 달밤을 그는 지키지 않고, 동해 거친 물살을 헤치고 해가 끓는 愛日堂(명주군 사촌(沙村))으로 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가을이었다. 그는 화조월석(花朝月夕)이 아니라 애일당(愛日堂)을 꿈꾼 죄로 1618년 8월24일 50세 나이로 능지처참되었다. 이른바 동해 일출을 꿈꾼 죄, 신분차별이 없는 이상향 율도국을 설계한 죗값이었다.
초당두부 또한 그런 역사를 지녔다. 강릉고등학교 앞 ‘엄마손 순두부집’(033-652-2642)의 최종화씨(54) 증언에 따르면 강릉고등학교 전신(前身)은 몽양 여운형씨가 세운 학교로서 미군이 진주했을 때 통역을 못해서 그의 제자들이 통역을 도맡을 만큼 민족사상이 팽배해 있었던 데다. 6·25 후 공산주의가 들어오니, 모두 동참해 남자들이 희생되었단다. 지주가 다섯 집, 소작이 200여호나 되는 마을이었다. 그 다음부터 과부가 된 아낙들은 모두부를 쪄서 시내에 나가 장사를 해 아이들 교육을 했다는 것이다. 11대째 살아온 최종화씨의 두부 속에는 이런 아픔까지도 배어 있어 음식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시끌벅적한 밀레니엄 원단의 해맞이 때는 경포호에서 밀려온 가슴 뜨거운 관광행렬로 줄을 섰다는 이야기도 곁들인다.
사실 성호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우리 민족을 대두박 민족으로 규정했듯이 따끈따끈한 순두부해장국 입맛이야 어디 따로 있었을까 싶다. 지금도 초당두부가 명맥을 유지한 까닭은 공장두부와 달리 20여호 모두들 국산 콩에다 바닷물 간수로 무쇠솥에서 두부를 내린다는 데에 있다. 중국산 콩과는 7배의 차이가 난다. 감옥에서 나와도 맨 먼저 모두부부터 먹이는 청빈한 우리들 마음과 초당두부의 맥도 순 토박이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음은 적이 안심이 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