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스본 전경. GETTYIMAGES
숙소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면 커피 향과 바다 냄새가 함께 들어온다. 거리 카페에서는 리스본 사람들의 일상이 천천히 흐른다. 아침 에스프레소 한 잔, 그리고 크림을 얹은 파스텔 드 나타(Pastel de Nata) 한 조각.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우며 맛은 달콤한 이 에그타르트는 대항해 시대(유럽 국가들이 대규모 해양 탐험과 식민지 확장에 나선 15~16세기) 수도승들이 남긴 작은 기적이다. 그럼에도 설탕의 달콤함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느긋하고 여유로운 아침 공기다.
포르투갈의 영광이 시작된 벨렘 지구
리스본은 7개 언덕으로 이뤄진 도시다. 그래서 여행자는 늘 오르막과 내리막을 함께 걷게 된다. 바닥을 덮은 조약돌은 반짝이고, 골목마다 세월이 쌓인 문틈에서는 삶의 냄새가 배어난다. 어디선가 노란 트램이 느릿하게 올라와 기분 좋은 바람이 뺨을 스친다. 그 유명한 트램 28번 노선은 리스본의 혈관처럼 도시를 관통한다. 알파마에서 바이샤, 그라사 언덕을 오가며 리스본의 일상과 역사를 천천히 펼쳐 보인다.리스본의 중심에는 언제나 타구스강이 있다. 강은 대서양으로 흘러가면서 도시의 심장을 적신다. 강변에 자리한 코메르시우 광장에 서면 눈앞이 한없이 넓어진다. 노란 건물과 흰 대리석 아치,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물빛. 이곳은 15세기 대항해 시대 출발점이었다. 세상의 끝을 향해 떠나는 배들이 이 부두에서 출항했고, 수많은 선원과 꿈이 이곳을 지나갔다. 지금은 그 항구에 여행자들이 모여든다. 떠났던 이들의 자리를 채우듯,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이곳에 선다. 누군가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또 누군가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해. 바다는 여전히 말이 없지만, 파도는 부드럽게 그들의 마음을 받아준다.
1755년 리스본은 거대한 지진과 화재, 지진해일로 완전히 무너졌다. 도시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절망 속에서도 다시 일어섰다. 재건된 신시가지 바이샤에는 바둑판처럼 정리된 거리와 고전적인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다. 균형 잡힌 거리의 선과 오래된 돌기둥들의 질감에서 이 도시가 가진 강인한 생존 의지가 느껴진다. 화려함은 없지만, 그 단단한 침묵이 오히려 리스본을 더 빛나게 만든다.
강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면 벨렘 지구에 닿는다. 이곳은 포르투갈의 영광이 시작된 자리이자, 지금도 대항해 시대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다. 벨렘탑은 테주강을 마주한 채 우뚝 서 있다. 바람에 닳은 석벽과 장식적인 문양, 좁은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한 시대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로 옆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그 시절의 신앙과 열망이 녹아 있는 마누엘 양식의 걸작이다. 수도원 내부 회랑에 서면 묘하게도 포르투갈이 바다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자연스레 납득이 된다.

벨렘 지구의 벨렘탑. GETTYIMAGES
삶이 무너져도 다시 빛날 수 있다
언덕을 오르면 알파마 지구가 나온다. 이곳은 그 어떤 명소보다도 리스본의 오래된 시간을 품고 있다. 세월을 비켜 가지 못한 골목과 벽에 걸린 낡은 빨래, 좁은 계단 위를 오르내리는 사람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간다. 해가 지고 나면 골목 작은 바에서 기타 소리와 함께 파두(Fado)가 시작된다. 파두는 리스본의 영혼이다. 사랑과 그리움, 상실을 노래하는 이 음악은 슬프지만 이상하게도 따뜻하다. 파두 가수의 목소리가 골목 사이에서 흘러나올 때, 그 선율은 여행자의 마음에 오래 머문다.선율이 흐르는 골목 사이로는 갓 구운 사르딘과 올리브오일, 레몬향이 섞인 음식 냄새가 함께 스며든다. 대서양에서 갓 잡아 온 생선을 숯불에 구워 올리브오일과 레몬즙을 살짝 뿌려 놓은 ‘그릴드 사르딘’은 소금의 짠맛과 바다의 신선함이 살아 있다. 현지인들은 여기에 샐러드와 구운 감자, 하얀 포르투갈 와인을 곁들인다. 와인은 달콤하기보다 부드럽고 햇살처럼 맑다. 초록빛 와인이라는 의미를 가진 비뉴 베르드(Vinho Verde)가 입안에서 청량하게 퍼지면 리스본의 바람과 햇살이 동시에 스며드는 듯하다. 그 순간, 여행자는 비로소 이 도시가 가진 단순함 속 우아함을 이해하게 된다.
하루의 끝, 리스본의 가장 높은 언덕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면 붉은 지붕들이 겹겹이 이어지고, 테주강 위로 4월 25일 다리(Ponte 25 de Abril)가 붉게 빛난다. 저녁 햇살이 다리를 물들이는 순간 리스본은 마치 대서양의 노을을 통째로 품은 듯하다. 그 순간, 도시 전체가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조용히 숨 쉰다. 리스본은 걷는 도시이자 기다림의 도시다.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트램이 언덕 오르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과 시간의 속도가 조금씩 늦춰진다. 여행하다 보면 리스본은 우리에게 “삶이 무너져도 다시 빛날 수 있다”고 말을 건넨다. 우리에게 건네는 조용한 위로이자 삶의 가르침이다. 이 도시의 바람은 여전히 항해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마음도 그 바람을 따라 다시금 길 위로 나설 것이다.
재이 여행작가는… 세계 100여 개국을 여행하며 세상을 향한 시선을 넓히기 시작했다. 지금은 삶의 대부분을 보낸 도시 생활을 마감하고 제주로 이주해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다양한 여행 콘텐츠를 생산하는 노마드 인생을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