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카카오 출범일 벌어진 ‘설화(舌禍)’
텔레그램이 한국에서 날개를 달기 시작한 날은 아이러니하게도 국내 모바일 메신저 시장을 장악한 다음카카오 통합법인이 출범하는 날이었다. 10월 1일 기념식 및 기자간담회에서 검열 논란과 관련해 이석우 다음카카오 공동대표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예상을 뛰어넘는 나비효과를 불러오기 시작했다. 9월 18일 검찰의 ‘사이버 명예훼손 처벌 강화’ 회의에 ㈜카카오 관계자가 참석한 것을 묻는 기자 질문에 이 대표가 “우리가 무슨 힘이 있나. (정부가) 부르면 가야지”라고 답한 것이 발단이 됐다. 국내 정보기술(IT) 전문가들은 이 발언에 대해 “한국 IT 산업 역사에 남을 중대한 발언”이라고 평가할 정도다(이 밖에도 이 대표는 논란이 될 만한 여러 말을 쏟아냈지만 이 발언의 후폭풍이 가장 셌다).
자사의 가장 큰 잔칫날 다음카카오 최고경영자(CEO)가 이렇게 내뱉은 진의는 ‘실정법에 맞춰 경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바일 메신저 이용자들은 ‘(카톡이) 검열에 적극 협조’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 발언이 알려진 직후 찻잔 속에 머물던 텔레그램은 그야말로 폭풍이 됐다. 10월 7일 텔레그램 측은 “지난주에만 한국에서 150만 명이 새로 가입했다”고 밝혔고, 다음카카오 측은 “이용자 40만 명이 줄었다”는 통계치를 내놓았다. 3000만 명 이상인 국내 메신저 유저를 감안할 때 대세에 지장을 줄 만한 수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기존 경쟁자였던 네이버 ‘라인’이나 중국 텐센트 ‘위챗’이 감히 넘보지 못한 깜짝 충격을 카톡에 안긴 셈이 됐다.
민경배 경희사이버대 모바일융합학과 교수는 “전 국민의 90% 이상이 사용하던 카톡 독점에서 분산화가 이뤄지는 분명한 신호”라며 “텔레그램에 대한 언론과 대중의 관심, 한국어 버전 출시로 텔레그램 이용자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음카카오가 출범한 10월 1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길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카카오톡 압수수색 규탄’ 기자회견에서 노동당 정진우 부대표가 검찰이 본인의 카카오톡 대화와 정보를 압수수색한 경과를 재구성해 발표하고 있다.
텔레그램은 해외에 서버를 둔 외국 기업이다. 국내 지사나 담당자도 명확지 않다. 애플리케이션(앱) 스토어 다운로드 1위를 기록하고 있다지만 가입자 수나 사용량을 정확히 측정하긴 어렵다. IT를 담당했던 필자의 텔레그램 친구 수를 통해 간접 비교할 수는 있겠다. 현재 필자의 카톡 친구는 1000여 명이다. 세계 정상을 노리는 모바일 메신저 ‘위챗’이나 ‘라인’의 친구는 각각 20명과 85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달 초 가입한 텔레그램 친구 수를 확인해보니 200명을 넘어섰다. 대부분 1~2주 내 가입한 이들임을 감안하면 카톡 위기론이 거론될 만한 폭발적 성장세다.
카톡 위기론이 탄력을 받는 이유는 모바일 메신저 시장이 이른바 프라이버시 자산을 기반으로 급성장한 ‘민감한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국내 1, 2위 인터넷 기업인 네이버와 다음카카오의 시가총액은 각각 20조 원, 10조 원을 오르내린다. 모바일 메신저 열풍이 일기 전에는 이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스마트폰 열풍과 함께 등장한 메신저 시장이 날로 확대하더니 기업 가치도 대폭 증가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모바일 메신저는 수사기관에 특히 유용한 정보 수집 수단이다.
24시간 통신기기와 연결된 모바일 메신저는 수사기관에게는 특히 유용한 정보 수집 수단이다. 유무선 전화는 통신사의 협조를 얻는다 해도 정확한 송수신지나 내용을 알기는 어렵다. 그런데 모바일 메신저는 회사 서버만 들여다보면 친구와의 대화 내용은 물론 송수신 시간, 장소, 인적 네트워크까지 고스란히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사 기법’의 혁명이자 ‘빅브라더 시대’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프라이버시 자산으로 급성장
‘사이버 망명’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독일산 모바일 메신저 서비스 ‘텔레그램’ 가입 화면.
논란이 확대되자 이재웅 다음커뮤니케이션 창업자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기업이 아닌 국가 권력 남용 탓”이라고 반박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이버 망명’ 사태를 놓고 2009년 광우병 사태 시절 MBC ‘PD수첩’ 작가의 e메일을 압수수색하면서 불거진 G메일로의 망명 사태와 엇비슷한 구도라는 설명을 내놓기도 한다. 당시 상당수 누리꾼이 정부의 강력한 온라인 단속을 피해 구글, 트위터, 페이스북 등으로 갈아타 국내 인터넷 서비스 시장이 위축되는 홍역을 치렀다.
하지만 1차 사이버 망명 사태와 달리 이번에는 오히려 정부에 대한 비난보다 다음카카오 측의 안일한 대응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특기할 만한 일이다. 한 IT업계 관계자는 “페이스북, 구글 등 글로벌 IT 서비스업체는 여러 국가기관의 정보 제공 요청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이용자들에게 밝히고 적어도 이용자의 프라이버시권을 지키기 위한 법적 저항과 기술적 보완 조치를 선제적으로 해왔다”면서 “하지만 카톡은 그런 노력을 해왔다고 볼 수 없기에 실망이 큰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10여 년 이상 사이버수사를 담당해온 현직 경찰관은 “이번 사건은 2004년 불거진 대학수학능력시험 부정행위 수사 때와 닮은 점이 있다”며 “이후 이동통신사들은 사생활 침해 논란을 피하고자 문자메시지를 서버에 보관하지 않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즉 언젠가는 터질 문제였다는 얘기다.
다음카카오의 안일한 대응
압수수색 영장을 남발하는 공권력과 이를 쉽게 허가하는 법원의 비전문성에 대한 질타도 흘러나온다. 거의 모든 개인정보가 모바일 메신저 회사에 기록되는 이상 불필요한 압수수색 영장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외부 통제 기능과 프라이버시권 보호 기능을 갖춰야 한다는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텔레그램 열풍의 이면에는 창업자의 독특한 창업 스토리가 신규 이용자의 시선을 잡아끈 측면도 있다. ‘러시아의 저커버그’로 불리는 억만장자 파벨 두로프는 푸틴 정부의 탄압을 피해 독일로 사업 둥지를 옮긴다. 그리고 검열 기관의 압제에서 벗어나고자 기술적 보안에 초점을 맞췄고, 그 결과 전 세계 여러 국가에서 텔레그램에 대한 수요가 폭증한 것이다. 10월 1일 이뤄진 다음카카오 통합법인 출범과 함께 시작된 모바일 메신저 ‘검열 논란’이 단순히 카톡 회사만의 이슈가 아니라 이용자 모두에게 중요한 이슈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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