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 후 80여 일이 흘렀지만 여전히 상당수 실종자 가족이 진도실내체육관에 머물고 있다.
세월호 실종자 남현철(경기 안산 단원고 2학년) 군 아버지 남경원 씨가 눈물로 써내려간 글의 일부다. 4대 독자 현철 군은 남씨에게 ‘심장 같은’ 자식이자 ‘삶의 모든 것’이었다. 그런 아들을 잃고 내내 진도실내체육관(체육관)에 머물다 몸이 상한 남씨는 지금 전남 목포 한 병원에 입원 중이다. 아들을 기다리며 80여 일 동안 “아가야, 네가 있는 그곳이 춥고 무섭더라도 조금만 힘내” “아빠는 널 찾기 전에는 네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을 거야” “비록 오늘은 널 데려가지 못하더라도 내일 우리 웃으면서 만나자”라고 일기에 써내려간 남씨는 퇴원 후 다시 체육관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태풍보다 누나를 못 알아볼까 걱정”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석 달이 다 됐지만 현철 군을 비롯한 11명의 실종자가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단원고 학생 5명, 교사 2명, 그리고 일반인 4명의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진도 팽목항과 체육관에는 이들을 기다리는 가족 수십 명이 여전히 머물고 있다. 태풍 ‘너구리’가 시시각각 접근해오던 7월 8일에도 이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태풍 피해를 우려한 합동구조팀이 5일 철수하고, 항구를 가득 메웠던 천막 100여 개가 철거됐으며, 바지선까지 전남 영암 대불항으로 대피했지만 가족들은 바다 아래 가라앉은 세월호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실종자 권재근 씨의 형 오복 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바람이 거센 체육관 앞마당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사고 첫날부터 하루도 떠나지 않은 자리다. 동생은 제주로 이사해 새로운 삶을 꾸리겠다는 꿈을 품고 아내, 아들, 딸과 함께 세월호에 올랐다 변을 당했다. 참사 속에서 다섯 살배기 막내조카 지연 양은 살아남았지만, 제수씨는 4월 23일 새벽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리고 동생과 여섯 살 조카 혁규는 여전히 소식이 없는 상태다. 권씨는 제수씨의 시신을 냉동고에 안치하면서 다짐한, 곧 남편과 아들을 찾아 함께 장례를 치러주겠다는 약속을 이제까지 지키지 못하고 있다. 강풍이 불든, 물벼락이 쏟아지든 진도를 떠날 수 없는 이유다. 그는 “술을 아무리 마셔도 새벽 여섯 시면 어김없이 눈이 뜨인다. 그러고 나면 다시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이라고 토로했다.
진도실내체육관 옆에 설치된 가족용 조립식 주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실종자 가족 권오복 씨(왼쪽)와 이영호 씨.
“머잖아 발견될 것 믿어”
진도 사고해역에서 마지막으로 실종자가 발견된 건 6월 24일. 당시 사고 70일 만에 뭍으로 올라온 단원고 2학년 윤민지 양은 DNA 분석을 통해 신원이 확인됐다. 해양경찰(해경) 관계자가 “시신이 생각보다 심하게 훼손된 상태는 아니었다”고 밝혔지만 가족들의 불안은 깊어졌다. 그리고 다시 20일 가까이 실종자 발견 소식이 끊기고, 태풍으로 수색까지 중단되면서 팽목항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러나 여전히 실종자들이 머잖아 발견될 것이라 믿고 기다리는 이가 많다. 최근 한 해군 대령은 가족들이 있는 자리에서 “천안함 사건 때도 6명은 결국 실종 처리되지 않았느냐. 시신이 아직 배 안에 있을 개연성은 낮다” 등의 발언을 했다가 격앙된 가족들의 항의에 사과해야 했다. 권오복 씨는 “그 얘기를 듣고 정말 화가 많이 났다. 밖에서는 우리가 이미 떠내려가도 다 떠내려갔을 시신을 찾느라 애꿎은 사람들만 고생시킨다는 얘기도 하는 모양인데, 여기 상황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사고 나고 벌써 석 달이나 지났으니 수색대가 배 안을 샅샅이 살펴봤겠거니, 하잖아요. 그런데 아예 들여다보지도 못한 구역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직 격실 19개를 수색 못 했고요, 수색했다는 곳도 다 살펴본 게 아닙니다. 우리 동생이 있던 장소가 어디라고 일찍부터 얘기해주고 기다렸는데, 동생 소지품 가방을 얼마 전에야 발견했다고 가져다줍디다.”
열어보니 아이들 갈아입힐 옷 두 벌씩이 차곡차곡 접혀 있었다. 그걸 빨아 널며 권씨는 또 한 번 눈물을 쏟았다. 그는 “처음엔 꼭 동생과 조카를 찾고 싶었다. 지금은 최소한 배 안에 그들이 없는 걸 확인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라며 “수색대가 선체 전체를 정밀 수색해 배 안에 실종자가 없다는 걸 증명해주기만 한다면 더는 버틸 이유가 없다. 그런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이 수색을 중단하려 하니 화가 나는 것”이라고 했다.
7월 8일 태풍 피해에 대비해 천막을 모두 철거한 진도 팽목항 풍경. 수색이 중단된 기간에도 상당수 가족은 항구에 남아 실종자들을 기다렸다.
“지금까지 수색경과를 보면 학생들은 원래 있던 장소에서 거의 이동을 안 한 걸 알 수 있어요. 어른들이 ‘가만히 있으라’고 하니 정말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거죠. 객실정보로 추적해 들어가면 있어야 할 그 자리에서 발견이 돼요. 이번에 찾은 민지도 있을 거라고 했던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색대가 그 주변을 수십 번 드나들었다면서도 시신을 못 찾은 거예요.”
민지 양의 방은 선체 4층 중앙부, 좌현 복도 뒤에서 두 번째였다. 사고 70일 만에 발견된 곳은 ‘4층 중앙 통로’다. 가족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제대로 수색한 것 맞아?”라는 의심이 나오는 이유다. 당시 해경 대변인은 “이미 수색을 마쳤던 중앙 통로를 재수색하는 과정에서 실종자를 발견했다. 이전 수색 때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보지 못했던 것 같다”고 밝혔다. 그러나 가족들은 이에 대해 분통을 터뜨린다.
수중재호흡기 도입키로
한 실종자 가족은 “지금은 옛날처럼 물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시신을 끄집어올 수 있는 때가 아니다. 배 안에 가득 찬 부유물을 들어내고, 켜켜이 쌓인 뻘(개흙)을 헤집어 그 안에 갇혀 있을지 모를 시신을 찾아야 할 때”라며 “그런데 현재 잠수사들의 잠수 시간은 수심 35m에서 25분, 40m 이상에서는 10분 수준이다. 물속으로 하강하고, 감압하면서 상승하는 시간을 감안하면 수중에 머무는 시간은 더 짧은데 현실적으로 수색이 가능하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장비와 잠수방법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는데 매일 ‘들어갔다 나오기’만 반복하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우리가 지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 아닌가 싶다”고도 했다.
가족들은 머릿속에 세월호 구조도를 탑재하고 있는 듯 보였다. 4층 선미 다인실과 3층 중앙 방 등 실종자가 남아 있을 것으로 짐작하는 장소들을 언급하며 “그런 곳만 꼼꼼히 살펴볼 수 있어도 좋을 텐데…” 하고 애를 태웠다. 어떻게든 잠수시간을 늘리고, 첨단 장비를 동원해 선내를 집중 수색해달라는 것이 석 달째 한뎃잠을 자는 가족들이 바라는 것의 전부다.
그들의 일상이 배와 함께 진도 앞바다에 침몰한 사이, 세상은 변했다. 팽목항에 내걸린 “마지막 한 명까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라고 적힌 노란 플래카드는 해풍에 빛이 바랬고, 정부기관이 모여 사고 수습 대책을 논의했던 팽목항 대합실도 제 기능을 되찾았다. 그러나 조은화 학생 가족, 고창석 교사 가족, 이묘희 씨 가족은 팽목항에, 양승진 교사 가족, 허다윤·황지현·남현철·박영인 학생 가족, 이영숙 씨 가족, 권재근·권혁규 씨 가족은 여전히 체육관에 남아 ‘배 안에 아직 남아 있을’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다.
“예전엔 진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내가 이젠 진도에 익숙한 것이 너무 괴롭습니다. (세월호 위치를 표시해둔) 부표를 보면 ‘아빠 나 여기 밑에 있어요. 빨리 꺼내주세요’ 환청이 들리듯 아이가 우는 것 같아서 두 눈에 눈물이 흘러넘치네요.”
남경원 씨가 쓴 또 다른 글의 일부다.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은 7월 10일 진도군청에서 브리핑을 열고 태풍으로 중단한 실종자 수색을 조만간 재개한다며 잠수시간 연장을 위해 사고 초기부터 실종자 수색에 참여한 민간 잠수업체 ‘언딘’을 ‘88수중’으로 교체한다고 밝혔다. 잠수사가 내쉰 공기를 배출하지 않고 정화시켜 재활용하는 방법으로 잠수시간을 늘려주는 장비인 수중재호흡기(리브리더)도 수색에 도입하기로 했다. 이런 변화가 ‘가족의 시신이라도 찾고 싶다’는 실종자 가족들의 바람을 이뤄줄 수 있을까. 야속한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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