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뒤집고 싶은 때가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환경은 암담했고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느껴졌다. 캄캄한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봄철 쟁기로 밭을 뒤집어 갈 듯 확 바꿨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남들이 ‘청춘’이라 부르던 시기였다.
몇 달 전 대학생 1만4000명을 상대로 강연한 적이 있다.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형식으로 강연을 이어나갔다. “이제까지 살면서 여러분이 가장 힘든 때가 언제였나요?”가 첫 질문이었다. 당신은 어떤가. 언제 가장 힘들었는가.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때가 있었는가. 그 어려움을 극복했는가, 아니면 좌절해 넘어졌는가.
젊은 시절 내 경우에는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선택을 강요받았을 때였다. 중학교를 서울 청계천 무허가 판잣집에서 다녔고, 판잣집마저 철거돼 경기 성남으로 강제 이주한 뒤에는 천막에서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인문학교에 가지 못하고 원치 않던 상업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만 열일곱 나이에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할머니와 어머니, 세 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소년가장이 된 것이다. 대학 진학은 생각도 못 했다. 모든 것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뤄지던 시절이었다.
나를 지탱하고 키운 것은 ‘꿈과 열정’
직장생활을 하면서 야간대학에 진학했다. 어느 날 쓰레기통에 버려진 책 한 권을 우연히 집어 든 것이 내 운명을 바꿨다. 고시 잡지였다. 고시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던 내게 반란을 사주(使嗾)한 책이다. 낮에는 직장, 밤에는 대학에 다녔고, 더 늦은 밤에는 고시공부를 했다. 그때 누군가 내게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면 속으로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이 세상 어느 누구를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데려다 놓아도 나보다 더 열심히 할 사람은 없다’고. 고시에 붙어 공무원 발령을 받은 날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냈다.
그 시절 나를 지탱한 힘은 ‘꿈과 열정’이었다. 늘 목이 탔다. 그래서 항상 꿈을 꿨다. 허황될 정도로 큰 꿈이었다. ‘눈먼 열정’도 있었다. 결과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없이, 얼마나 오랫동안 나 자신을 쏟아부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죽기 살기로 노력하는 열정이었다. 나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반란’이었고,‘남이 낸 문제’를 푸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반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반란’이었고, 남이 아닌 ‘나 자신이 낸 문제’를 푸는 것이었다.
공무원 생활을 하다 어렵게 미국 유학 기회를 잡았다.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도 좋았다. 그러던 셋째 학기 초, 내면 깊은 곳에서 지독한 회의가 찾아왔다. 회의의 정체를 아는 데 한참 걸렸다. 질문 2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왜 공부를 하는가?’ ‘무슨 공부를 하려 하는가?’ 성적은 답이 되지 못했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답이 필요했다.
이 질문들은 결국 내가 이제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했다. 그때 깨달았다. 이제까지 내가 한 일은 주위나 사회에서 원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일로 착각해서 한 것이라는 사실을.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진정 원하는 길은 무엇일까. 답을 찾기 어려웠다.
문제는 공부보다 더 근본적인 데 있었다. 나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그래서 힘이 좀 더 들더라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먼저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러다임의 변화였다. 나 자신을 뒤집어엎는 것이었다.
익숙한 것과 헤어지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해서였다. 고통스러웠지만 공부하는 태도, 방법, 나아가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와 인생관을 바꾸려 했다. 공부를 마치고 공직에 복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왜 공직을 하는가’에 대한 대답, 그리고 어느 자리에 있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시도를 계속했다.
이 시절 나를 지탱한 것은 ‘하고 싶은 일 하기’, 즉 ‘업그레이드한 꿈’과 ‘눈뜬 열정’이었다. 당시 꿈은 전에 가졌던 꿈과는 달랐다. 되고 싶은 ‘무엇’이라는 명사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싶다’는 동사였다. 남이 주거나 진열장에서 고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은 꿈이었다. 전과 같은 눈먼 열정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에 자신을 쏟는’ 눈뜬 열정이었다. 아, 그래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눈뜬 열정을 가지려면 캄캄한 터널 속에서 쏟는 눈먼 열정의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 후에는 사회에 대한 반란을 생각했다. 세상을 뒤집고 싶다는 투박한 생각이 더 세련되게 바뀌었다.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한 건전한 반란이었다. 남이 낸 문제, 내가 낸 문제를 넘어 사회가 낸 문제를 푸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암흑기, 탈출구가 보이지 않던 터널 속에서 힘이 된 원동력은 세 가지였다. 분수에 맞지 않던 큰 꿈, 죽어라 쏟아부었던 열정, 그리고 낙관적인 마음자세.
인내와 감사를 가르쳐준 환경
누구나 이력서에 쓰지 않은 인생이 있다. 학교나 경력 뒤에 숨은 좌절과 절망, 고통과 열등감 같은 것이다. 그런 상황을 극복하려고 얼마나 절실한 마음으로 살았는지, 어떤 열정을 갖고 어떻게 노력했는지 이력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력서에서 빠진 그런 내용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학력이나 경력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경험이나 지혜, 가치관이 그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성공하려면 꼭 겪어야 할 어려움과 실패가 그 뒤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력서에 나와 있지 않은, 다른 사람이 별로 물어보지 않는 내 지난날에 감사한다. 빛 속에 가려진 그림자 같은 과거에 깊이 감사한다. 어둠이 있어 빛이 있었다. 절망이 있었기에 희망이 있었다. 시련이 있었기에 단련이 있었다. 실패가 있었기에 성공이 있었다. 너무 어려워 나를 무너뜨리기도 했던 환경은 인내와 감사를 가르쳐준 스승이었다. 마음의 근력을 키워준 자양분이었고 ‘위장된 축복’이었다. 옴짝달싹할 틈도 없어 질식할 것 같던 인생에 ‘반란’의 꿈을 꿈틀거리게 하고 결국 봉기(蜂起)하게 만들었다.
그대 많이 힘든가. 남보다 출발이 늦었는가. 이력서나 스펙 때문에 속상한가. 게임의 룰이 불공정해서, 남보다 출발선이 뒤에 있어서 때로는 억울한가. 그래서 세상을 뒤집고 싶은가. 그렇다면 반란을 일으켜라. 먼저 그대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라.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라. 더 나아가 그대를 힘들게 했던 사회를 발전시키는 건전한 반란을 일으켜라. 억지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유쾌한’ 반란을 일으켜라. 세상이 유쾌해질 것이다. 세상이 또한 그대를 유쾌하게 할 것이다.
김동연 국무조정실장은 1957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났다. 덕수상고 3학년 때 한국신탁은행에 입사했고, 이후 회사에 다니며 국제대 야간부 법학과에 진학, 82년 입법고시(6회)와 행정고시(26회)에 합격했다. 1989~93년 미국 미시간대에서 정책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통령 경제금융비서관, 기획재정부 예산실장과 2차관 등을 거쳐 지난해 국무조정실장(장관급)에 임명됐다.
몇 달 전 대학생 1만4000명을 상대로 강연한 적이 있다.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형식으로 강연을 이어나갔다. “이제까지 살면서 여러분이 가장 힘든 때가 언제였나요?”가 첫 질문이었다. 당신은 어떤가. 언제 가장 힘들었는가.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때가 있었는가. 그 어려움을 극복했는가, 아니면 좌절해 넘어졌는가.
젊은 시절 내 경우에는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선택을 강요받았을 때였다. 중학교를 서울 청계천 무허가 판잣집에서 다녔고, 판잣집마저 철거돼 경기 성남으로 강제 이주한 뒤에는 천막에서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인문학교에 가지 못하고 원치 않던 상업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만 열일곱 나이에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할머니와 어머니, 세 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소년가장이 된 것이다. 대학 진학은 생각도 못 했다. 모든 것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뤄지던 시절이었다.
나를 지탱하고 키운 것은 ‘꿈과 열정’
직장생활을 하면서 야간대학에 진학했다. 어느 날 쓰레기통에 버려진 책 한 권을 우연히 집어 든 것이 내 운명을 바꿨다. 고시 잡지였다. 고시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던 내게 반란을 사주(使嗾)한 책이다. 낮에는 직장, 밤에는 대학에 다녔고, 더 늦은 밤에는 고시공부를 했다. 그때 누군가 내게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면 속으로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이 세상 어느 누구를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데려다 놓아도 나보다 더 열심히 할 사람은 없다’고. 고시에 붙어 공무원 발령을 받은 날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냈다.
그 시절 나를 지탱한 힘은 ‘꿈과 열정’이었다. 늘 목이 탔다. 그래서 항상 꿈을 꿨다. 허황될 정도로 큰 꿈이었다. ‘눈먼 열정’도 있었다. 결과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없이, 얼마나 오랫동안 나 자신을 쏟아부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죽기 살기로 노력하는 열정이었다. 나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반란’이었고,‘남이 낸 문제’를 푸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반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반란’이었고, 남이 아닌 ‘나 자신이 낸 문제’를 푸는 것이었다.
공무원 생활을 하다 어렵게 미국 유학 기회를 잡았다.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도 좋았다. 그러던 셋째 학기 초, 내면 깊은 곳에서 지독한 회의가 찾아왔다. 회의의 정체를 아는 데 한참 걸렸다. 질문 2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왜 공부를 하는가?’ ‘무슨 공부를 하려 하는가?’ 성적은 답이 되지 못했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답이 필요했다.
이 질문들은 결국 내가 이제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했다. 그때 깨달았다. 이제까지 내가 한 일은 주위나 사회에서 원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일로 착각해서 한 것이라는 사실을.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진정 원하는 길은 무엇일까. 답을 찾기 어려웠다.
문제는 공부보다 더 근본적인 데 있었다. 나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그래서 힘이 좀 더 들더라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먼저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러다임의 변화였다. 나 자신을 뒤집어엎는 것이었다.
익숙한 것과 헤어지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해서였다. 고통스러웠지만 공부하는 태도, 방법, 나아가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와 인생관을 바꾸려 했다. 공부를 마치고 공직에 복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왜 공직을 하는가’에 대한 대답, 그리고 어느 자리에 있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시도를 계속했다.
이 시절 나를 지탱한 것은 ‘하고 싶은 일 하기’, 즉 ‘업그레이드한 꿈’과 ‘눈뜬 열정’이었다. 당시 꿈은 전에 가졌던 꿈과는 달랐다. 되고 싶은 ‘무엇’이라는 명사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싶다’는 동사였다. 남이 주거나 진열장에서 고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은 꿈이었다. 전과 같은 눈먼 열정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에 자신을 쏟는’ 눈뜬 열정이었다. 아, 그래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눈뜬 열정을 가지려면 캄캄한 터널 속에서 쏟는 눈먼 열정의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 후에는 사회에 대한 반란을 생각했다. 세상을 뒤집고 싶다는 투박한 생각이 더 세련되게 바뀌었다.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한 건전한 반란이었다. 남이 낸 문제, 내가 낸 문제를 넘어 사회가 낸 문제를 푸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암흑기, 탈출구가 보이지 않던 터널 속에서 힘이 된 원동력은 세 가지였다. 분수에 맞지 않던 큰 꿈, 죽어라 쏟아부었던 열정, 그리고 낙관적인 마음자세.
인내와 감사를 가르쳐준 환경
누구나 이력서에 쓰지 않은 인생이 있다. 학교나 경력 뒤에 숨은 좌절과 절망, 고통과 열등감 같은 것이다. 그런 상황을 극복하려고 얼마나 절실한 마음으로 살았는지, 어떤 열정을 갖고 어떻게 노력했는지 이력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력서에서 빠진 그런 내용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학력이나 경력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경험이나 지혜, 가치관이 그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성공하려면 꼭 겪어야 할 어려움과 실패가 그 뒤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력서에 나와 있지 않은, 다른 사람이 별로 물어보지 않는 내 지난날에 감사한다. 빛 속에 가려진 그림자 같은 과거에 깊이 감사한다. 어둠이 있어 빛이 있었다. 절망이 있었기에 희망이 있었다. 시련이 있었기에 단련이 있었다. 실패가 있었기에 성공이 있었다. 너무 어려워 나를 무너뜨리기도 했던 환경은 인내와 감사를 가르쳐준 스승이었다. 마음의 근력을 키워준 자양분이었고 ‘위장된 축복’이었다. 옴짝달싹할 틈도 없어 질식할 것 같던 인생에 ‘반란’의 꿈을 꿈틀거리게 하고 결국 봉기(蜂起)하게 만들었다.
그대 많이 힘든가. 남보다 출발이 늦었는가. 이력서나 스펙 때문에 속상한가. 게임의 룰이 불공정해서, 남보다 출발선이 뒤에 있어서 때로는 억울한가. 그래서 세상을 뒤집고 싶은가. 그렇다면 반란을 일으켜라. 먼저 그대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라.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라. 더 나아가 그대를 힘들게 했던 사회를 발전시키는 건전한 반란을 일으켜라. 억지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유쾌한’ 반란을 일으켜라. 세상이 유쾌해질 것이다. 세상이 또한 그대를 유쾌하게 할 것이다.
김동연 국무조정실장은 1957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났다. 덕수상고 3학년 때 한국신탁은행에 입사했고, 이후 회사에 다니며 국제대 야간부 법학과에 진학, 82년 입법고시(6회)와 행정고시(26회)에 합격했다. 1989~93년 미국 미시간대에서 정책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통령 경제금융비서관, 기획재정부 예산실장과 2차관 등을 거쳐 지난해 국무조정실장(장관급)에 임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