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얘기부터 해보자. 막걸리를 손수 빚자면 쌀과 누룩이 필요하다. 누룩을 디디자면 밀농사를 지어야 한다. 우리나라 밀은 늦가을에 씨를 뿌리면 겨울을 나고 이듬해 하지 무렵 거두게 된다. 이 밀을 거칠게 빻아 누룩을 디딘다. 이 누룩이 제구실을 하자면 누룩곰팡이가 달라붙게 여러 날 발효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앞뒤가 이러니 손수 농사지어 술을 빚는 데까지만 해도 꼬박 2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하다. 물론 지에밥과 누룩, 그리고 물이 만나 발효가 일어나고, 그 술이 익어 마시기까지는 또 다른 기다림이 필요하다.
돈 주고 사서 마시면 간단하다. 이 모든 걸 한순간에 해치울 수 있다. 이런 세상인데, 왜 슬로푸드를 만드나. 나는 그냥 ‘팔자’라 여긴다. 웬 팔자? 느리고 돈 안 되는 시골살이를 선택한다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 이 팔자는 그냥 팔자가 아니라 나 스스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 나름대로 괜찮은 팔자가 아닐까 싶다.
먹는 게 몸이자 정신
사실 우리 사회에서 슬로푸드를 예찬하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내가 시골로 내려온 1996년만 해도 그런 단어는 알려지지조차 않았다. 근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우리 식구가 바로 슬로푸드를 먹고 있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우리네 삶이 많이도 달라졌다. 도시에서 살 때는 ‘음식을 먹는다’보다 ‘끼니를 때운다’는 생각이 강했다. 바쁘고 팍팍하게 돌아가는 세태에서 음식을 천천히 준비하고 또 음미하면서 먹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지금은 먹을거리를 마련하고, 갈무리하며, 먹고 치우는 데 많은 시간을 쓴다. 농사란 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니, 사람이 종종거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무리하게 욕심내 ‘더 빨리, 더 많이, 더 싸게’ 생산하려고 하다 보면 작물은 약해지고 병해충도 부른다.
슬로푸드는 무엇보다 식재료 자체가 신선하고 좋아야 한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로 범벅하거나 비닐집에서 불을 때 가며 기른 게 아니라, 제철에 자연스럽게 자란 재료여야 한다. 이런 식재료는 딱히 복잡하게 지지고 볶고 할 필요가 없다. 간단하게 차려낸 소박한 음식이지만 그 맛은 깊고, 영양은 풍부하다. 한여름 텃밭에서 자란 풋고추를 따서 쌈장에 찍어 먹으면 그것보다 더 맛난 ‘요리’가 어디 있으랴.
음식과 삶은 결코 뗄 수 없는 관계다. 슬로푸드는 곧 슬로라이프다. 더 나아가 먹을거리는 건강, 교육, 문화, 예술과도 서로 맞물린다. 나는 도시에서 살 때 늘 골골했다. 감기에 자주 걸렸고 아픈 곳이 많았다. 그런데 시골살이를 하면서 달라졌다. 최근 10년 넘게 감기에 걸렸던 기억이 아득하다. 아마도 적당히 몸을 움직이고, 제철음식을 먹어서가 아닐까 싶다.
농사란 좀 다르게 표현하자면, 생명을 가꾸고 돌보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 자신의 생명을 가꾸고 돌보는 일도 소중히 여기게 됐다. 농사꾼이 건강해야 농산물도 건강하고, 건강한 농산물이 다시 그 농사꾼과 가족, 나아가 이 농산물을 함께 먹는 사람의 건강에도 보탬이 되리라는 믿음이 자연스레 생겨났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거듭나면서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게 됐다. 글쓰기나 사진 찍기도 생명을 돌보고 가꾸는 일의 연장이다. 억지로 쓰는 글이 아니라, 안에서 뭔가가 차올라 토하듯이 글을 쓸 때는 글쓰기가 먹을거리만큼 소중한 생명이 된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순간이 영원’이라는 말이 있듯이 영양가 높은 사진은 눈길이 오래 머물고, 잘 잊히지 않는다.
요즘 나는 틈틈이 농작물 꽃을 즐겨보고 사진으로 찍곤 한다. 시장에 나오는 개량 오이는 수꽃이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암꽃만 마디마디에 촘촘히 핀다. 하나라도 더 달리고 더 빨리 자라라고 개량한 것이다. 그런데 토종 오이는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이 녀석은 처음 한동안은 수꽃만 핀다. 수꽃들로 웬만큼 자리가 잡혔다 싶을 때 암꽃이 하나 둘 고개를 내민다. 이 암꽃을 수정시키려는 수꽃의 노력이 눈물겹다. 수꽃 하나가 핀 마디에서 다시 여러 개 수꽃이 시간 차이를 두고 피어나는 것이다. 어떤 암꽃이든 씨앗을 품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한다. 농작물 처지에서 꽃을 피운다는 건 대단한 생명활동이다.
이 토종 오이는 생긴 건 ‘짜리몽땅’하다. 한 뼘 정도 자라면 통통하게 옆으로 퍼지듯이 큰다. 그 속에 이듬해 자랄 씨앗을 차곡차곡 품고 있고, 그 씨앗은 부모 세대가 해온 것처럼 생명활동을 마음껏 펼친다. 여름 제철에 햇빛을 충분히 받고, 비바람을 온전히 맞으며 천천히 자란 오이라면 뚝 따서 그냥 먹어도 맛나다. 아마도 햇빛, 땅, 바람 맛을 찬찬히, 충분히 맛봤기에 그 맛을 낼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 돈벌이로만 보자면 이렇게 많이 피는 수꽃들은 그냥 에너지 낭비일 뿐이다. 마치 대규모 양계장에서는 수탉이 쓸모없듯이 말이다. 암탉이 수탉과 교미해서 낳은, 병아리가 될 수 있는 달걀을 유정란(有精卵)이라고 따로 구분하듯이 앞으로는 오이나 고추 같은 작물도 구분이 필요하리라. 유정 오이, 유정 고추…. 자신의 생명을 대물림해줄 수 있는 식재료이니 그 생명력 역시 남다르지 않겠나.
로컬푸드가 슬로푸드
슬로푸드와 패스트푸드의 경계는 뭘까. 무 자르듯 단칼에 자를 수는 없다. 시간은 공간과 맞물려 있어 슬로푸드는 로컬푸드와 떼어놓을 수 없다. 배나 비행기로 수만km를 옮겨왔다면 슬로푸드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깊이 들어가다 보면 사실 끝도 없으리라. 다만 모두가 조금이라도 그 경계를 자각하고, 할 수만 있다면 그 경계를 허물면서 삶 속으로 자연스레 녹아들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10년, 아니 100년조차도 자연의 흐름으로 보자면 그야말로 순간이다. 자라고 또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할 때는 제철음식으로 잘 먹다가, 늙어가면서는 먹는 걸 줄이고, 그러다 어느 순간 먹는 걸 멈춘 뒤 죽음을 춤추듯이 맞이할 수 있는 삶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죽는 순간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 또 다른 생명으로 거듭날 테니까. 슬로 슬로 퀵퀵.
돈 주고 사서 마시면 간단하다. 이 모든 걸 한순간에 해치울 수 있다. 이런 세상인데, 왜 슬로푸드를 만드나. 나는 그냥 ‘팔자’라 여긴다. 웬 팔자? 느리고 돈 안 되는 시골살이를 선택한다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 이 팔자는 그냥 팔자가 아니라 나 스스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 나름대로 괜찮은 팔자가 아닐까 싶다.
먹는 게 몸이자 정신
사실 우리 사회에서 슬로푸드를 예찬하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내가 시골로 내려온 1996년만 해도 그런 단어는 알려지지조차 않았다. 근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우리 식구가 바로 슬로푸드를 먹고 있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우리네 삶이 많이도 달라졌다. 도시에서 살 때는 ‘음식을 먹는다’보다 ‘끼니를 때운다’는 생각이 강했다. 바쁘고 팍팍하게 돌아가는 세태에서 음식을 천천히 준비하고 또 음미하면서 먹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지금은 먹을거리를 마련하고, 갈무리하며, 먹고 치우는 데 많은 시간을 쓴다. 농사란 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니, 사람이 종종거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무리하게 욕심내 ‘더 빨리, 더 많이, 더 싸게’ 생산하려고 하다 보면 작물은 약해지고 병해충도 부른다.
슬로푸드는 무엇보다 식재료 자체가 신선하고 좋아야 한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로 범벅하거나 비닐집에서 불을 때 가며 기른 게 아니라, 제철에 자연스럽게 자란 재료여야 한다. 이런 식재료는 딱히 복잡하게 지지고 볶고 할 필요가 없다. 간단하게 차려낸 소박한 음식이지만 그 맛은 깊고, 영양은 풍부하다. 한여름 텃밭에서 자란 풋고추를 따서 쌈장에 찍어 먹으면 그것보다 더 맛난 ‘요리’가 어디 있으랴.
음식과 삶은 결코 뗄 수 없는 관계다. 슬로푸드는 곧 슬로라이프다. 더 나아가 먹을거리는 건강, 교육, 문화, 예술과도 서로 맞물린다. 나는 도시에서 살 때 늘 골골했다. 감기에 자주 걸렸고 아픈 곳이 많았다. 그런데 시골살이를 하면서 달라졌다. 최근 10년 넘게 감기에 걸렸던 기억이 아득하다. 아마도 적당히 몸을 움직이고, 제철음식을 먹어서가 아닐까 싶다.
농사란 좀 다르게 표현하자면, 생명을 가꾸고 돌보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 자신의 생명을 가꾸고 돌보는 일도 소중히 여기게 됐다. 농사꾼이 건강해야 농산물도 건강하고, 건강한 농산물이 다시 그 농사꾼과 가족, 나아가 이 농산물을 함께 먹는 사람의 건강에도 보탬이 되리라는 믿음이 자연스레 생겨났다.
1 필자가 만든 된장주먹밥. 소박한 음식도 기본 양념만 충실 하면 맛도 깊고 영양도 풍부하다. 2 필자가 키우는 닭과 병아리. 3 필자의 집 처마에 매단 매주.
요즘 나는 틈틈이 농작물 꽃을 즐겨보고 사진으로 찍곤 한다. 시장에 나오는 개량 오이는 수꽃이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암꽃만 마디마디에 촘촘히 핀다. 하나라도 더 달리고 더 빨리 자라라고 개량한 것이다. 그런데 토종 오이는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이 녀석은 처음 한동안은 수꽃만 핀다. 수꽃들로 웬만큼 자리가 잡혔다 싶을 때 암꽃이 하나 둘 고개를 내민다. 이 암꽃을 수정시키려는 수꽃의 노력이 눈물겹다. 수꽃 하나가 핀 마디에서 다시 여러 개 수꽃이 시간 차이를 두고 피어나는 것이다. 어떤 암꽃이든 씨앗을 품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한다. 농작물 처지에서 꽃을 피운다는 건 대단한 생명활동이다.
이 토종 오이는 생긴 건 ‘짜리몽땅’하다. 한 뼘 정도 자라면 통통하게 옆으로 퍼지듯이 큰다. 그 속에 이듬해 자랄 씨앗을 차곡차곡 품고 있고, 그 씨앗은 부모 세대가 해온 것처럼 생명활동을 마음껏 펼친다. 여름 제철에 햇빛을 충분히 받고, 비바람을 온전히 맞으며 천천히 자란 오이라면 뚝 따서 그냥 먹어도 맛나다. 아마도 햇빛, 땅, 바람 맛을 찬찬히, 충분히 맛봤기에 그 맛을 낼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 돈벌이로만 보자면 이렇게 많이 피는 수꽃들은 그냥 에너지 낭비일 뿐이다. 마치 대규모 양계장에서는 수탉이 쓸모없듯이 말이다. 암탉이 수탉과 교미해서 낳은, 병아리가 될 수 있는 달걀을 유정란(有精卵)이라고 따로 구분하듯이 앞으로는 오이나 고추 같은 작물도 구분이 필요하리라. 유정 오이, 유정 고추…. 자신의 생명을 대물림해줄 수 있는 식재료이니 그 생명력 역시 남다르지 않겠나.
로컬푸드가 슬로푸드
슬로푸드와 패스트푸드의 경계는 뭘까. 무 자르듯 단칼에 자를 수는 없다. 시간은 공간과 맞물려 있어 슬로푸드는 로컬푸드와 떼어놓을 수 없다. 배나 비행기로 수만km를 옮겨왔다면 슬로푸드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깊이 들어가다 보면 사실 끝도 없으리라. 다만 모두가 조금이라도 그 경계를 자각하고, 할 수만 있다면 그 경계를 허물면서 삶 속으로 자연스레 녹아들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10년, 아니 100년조차도 자연의 흐름으로 보자면 그야말로 순간이다. 자라고 또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할 때는 제철음식으로 잘 먹다가, 늙어가면서는 먹는 걸 줄이고, 그러다 어느 순간 먹는 걸 멈춘 뒤 죽음을 춤추듯이 맞이할 수 있는 삶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죽는 순간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 또 다른 생명으로 거듭날 테니까. 슬로 슬로 퀵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