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는 일찍 멸망해 자체 역사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와 중국 역사서(‘남제서·南齊書’ ‘양직공도·梁職貢圖’) 등에 단편적으로만 언급되고 있다. 이 정도 기록만으로 가야사를 복원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더욱이 가야 관계 기사를 가장 많이 남긴 ‘일본서기’는 비판 없이 잘못 인용할 경우 일본의 한국고대사 왜곡인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증명하는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에 1970년 초까지 가야사 연구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다 천관우(千寬宇) 선생이 ‘일본서기’의 가야(임나) 관계 기사는 주어를 ‘왜’가 아니라 ‘백제’(때로는 신라)로 바꿔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했고, 이후 국내 연구자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 가야사 연구에서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
한편 역사기록이 없거나 부족한 시기의 역사를 찾는 또 하나의 학문이 고고학이다. 가야 고고학은 일찍이 일제강점기에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는 물적 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고분 조사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조사 목적이 가야사 복원 또는 가야 문화 확인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결과를 초래했다.
1970년 이후 가야고분 조사가 이뤄지고 대학에 관련 연구자들이 증가하면서 가야사 복원에 큰 기여를 하게 됐다. 이처럼 가야사 연구는 문헌사와 고고학 양 측면에서 진행됐으며, 많은 성과를 거둠과 동시에 많은 과제도 남겨놓고 있다.
고고학으로 밝힌 7가지 사실
역사연구에서 거둔 성과로 가장 먼저 거론할 수 있는 것은 가야는 ‘6가야’가 아니라 20여 개의 크고 작은 나라로 이뤄졌으며, 하나의 단일연맹체를 형성한 것이 아니라 몇 개의 지역연맹체로 존재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존속했던 가야는 전 · 후기로 나뉘고 전기에는 김해 가락국(駕洛國), 후기에는 고령 가라국(加羅國), 함안 안라국(安羅國) , 경남 서남부지역의 소가야(포상팔국연맹체 · 浦上八國聯盟體)가 가야의 대표세력이었으며, 이들 소국은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서진해오는 신라에게 각개격파돼 562년을 전후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가야 소국들이 도달한 사회는 ‘복합군장사회(複合君長社會)’ 또는 ‘초기국가(初期國家)’ 단계였다는 것 등이다.고고학에서는 영남 각지의 수많은 고분을 발굴조사하고, 출토된 유물을 분석해 가야사 복원의 실마리가 되는 사실들을 밝혀냈다. 밝혀진 사실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무덤 형태가 목곽묘 → 석곽묘 → 석실묘 순으로 바뀌었으며, 석곽묘가 (반)지상화되면서 거대한 봉토를 가진 고총고분(古塚古墳)이 만들어졌다.
둘째, 가야의 전신인 변한소국을 밝히기 위한 고고자료는 와질토기(瓦質土器) 문화 단계의 유구와 유물이다.
셋째, 4세기 말까지 김해 · 부산을 제외한 가야 전 지역에서 형태가 비슷한 토기, 이른바 ‘고식도질토기(古式陶質土器)’가 만들어졌다.
넷째, 5세기 중엽 무렵의 고령식, 함안식이라 부르는 토기가 특정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며, 이는 그 지역에 존재했던 가야소국의 실체를 알려준다.
다섯째, 갑옷과 투구, 마구는 가야 지배층의 전유물이며 이러한 유물들은 고구려, 나아가 중국 동북지역의 연(燕)나라에 그 원류가 있다.
여섯째, 금, 은, 금동제의 귀고리, 관모(冠帽), 장식대도(裝飾大刀), 장식마구 등은 고도의 기술과 화려함을 자랑하는 유물이며 당시 신라나 백제 유물에 견줘도 뒤떨어지지 않는 뛰어난 제품이다.
일곱째, 김해지역에 있던 가락국의 문물(토기, 갑주·甲胄, 마구)은 일본에 전해져 일본 고대사회 발전에 굉장히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일곱째, 김해 · 고성 · 의령 · 산청 등지에서 확인되는 신라계, 영산강계, 왜계의 유구와 유물은 가야인이 남해안을 이용해 활발한 대외활동을 했음을 알려준다. 특히 김해 가락국은 일찍부터 강대한 해상왕국으로서 동아시아 고대사회에 자리매김했다.
가야사 연구에서 무엇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문헌사학자와 고고학자가 허심탄회하게 의견 교환을 나누면서 공동연구
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만 내세울 뿐 상대방의 주장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결과는 가야사를 기형적으로 만들 뿐이다.
유물과 유적 보호 및 조사, 분석 절실
역사 복원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작업은 신뢰할 수 있는 연대론의 확립이다. 이와 관련해 고고학계에서는 같은 유구나 유물을 두고 짧게는 50년, 길게는 100년의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역사학계는 특정 사건, 이를테면 ‘삼국사기’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14년조(209년)에 언급된 ‘포상팔국전쟁(浦上八國戰爭)’의 경우 이것이 일어난 연대를 3세기 전반대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3세기 후반, 3세기 말 · 4세기 초, 4세기 전반, 4세기 중 · 후반, 6세기 중엽으로 보기도 하는 등 최대 300년 차이가 나고 있다. 이러한 연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올바른 가야사 복원은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가야 전신(前身)인 변한소국의 실체를 밝히려면 와질토기문화 단계의 유적과 유물을 발굴하고, 이러한 자료를 문헌사학자와 함께 검토해 소국들의 위치 등 여러 가지 사실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6가야가 아니라 20여 개 소국이 있었다면 이 나라들이 서부경남의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재했으며, 이것을 밝히는 데 필요한 고고자료는 무엇인지를 논의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변한에서 가야로 바뀌었다’ ‘6가야가 가야의 전부가 아니라 훨씬 많았다’는 주장만 되풀이할 뿐 이것을 실증적으로 밝히려는 노력은 부족하다. 그 결과 중고교 고대 역사지도에 변한이나 가야소국을 서부경남 곳곳에 도식적으로 배치해 근거 없는 역사적 사실을 국민에게 주입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아울러 가야인이 가졌던 수준 높은 기술을 알려면 유물의 자연과학적 분석이 필수인데, 이러한 분석에 드는 비용이 너무 많아 대다수 발굴 담당자가 이 일을 포기했다. 그 결과 산지추정(産地推定)이라든지 유물에 투영된 가야인의 기술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중심고분군뿐 아니라, 일반인의 집단무덤인 소형유구로 이뤄진 유적과 당시 가야인의 생활모습을 밝히기 위한 생활유적 등을 체계적으로 조사할 필요가 있는데 아직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끝으로 무엇보다 유적과 유물은 한번 없어지면 영원히 복원할 수 없고, 그 결과 역사를 되찾을 수 없다는 엄중함을 깊이 인식하고 가야시대의 유적이 이런저런 이유로 파괴되지 않도록 관심을 가지고 지켜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