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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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 하우스’에 조센 레이디가 살았다”

조선인 위안부 흔적 찾기, 태평양전쟁 격전지 사이판·팔라우를 가다

  •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입력2012-09-14 16: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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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워 하우스’에 조센 레이디가 살았다”

    김영길 사이판 가이드가 \'정신대 동굴\'이라 불리는 곳의 연원을 설명하고 있다.

    “파라오(팔라우)에 간 지 1년쯤 있다가 전쟁이 났다. 하루에 20, 30명이 보통이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줄을 길게 서서 군인이 옷 벗을 사이도 없이 벨트를 풀어 총대 옆에 놓고 당고바지 단추를 풀곤 했다. 질이 너무 부어서 들어가지 않으면 남근에 연고를 바른다. 그러면 미끄덩거려서 들어갔다. 들어오자마자 싸는 놈, 밖에서 싸는 놈, 커튼 열고 들어와 빨리 가라고 끄집어내는 놈도 있었다. 어떤 때는 총대로 얼굴을 때렸다. 군인을 받은 다음엔 정신이 없었다. 일어나려고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사타구니 양쪽이 툭 터져서 그냥 피고름이 나왔는데, 자궁 안에 생긴 고름이 썩은 후 부풀어 저절로 터진 것이었다. 다리도 부었다. 밑이 뒤집어져서 대소변도 못 봤다.”(강무자·가명)

    위안부 실태조사 미흡

    “‘샤워 하우스’에 조센 레이디가 살았다”

    사이판 노인정에서 만난 호세 아이토레서(왼쪽), 만요엘 알 메사 씨는 “조선인 위안부가 사이판에 살았다”고 증언했다.

    8월 27일 일본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일본이 일본군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한 증거가 없다”고 발언해 우리 국민을 자극했다. 이에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21년 동안 ‘수요집회’에 참석하며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나만큼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느냐”며 거세게 항의했다. 하지만 역사의 증인인 위안부 할머니는 그 수가 점점 줄고 있다. 강무자 할머니 또한 망인이 돼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들 증언집 2’(한울)를 통해 증언할 뿐이다.

    팔라우. 일본은 1914년 괌과 파푸아뉴기니 사이에 위치한 이곳을 점령한 뒤 남양군도(1914~45년 일본의 위임통치를 받은 적도 이북의 중부태평양 지역) 통치기구인 남양청을 설치해 남태평양 진출을 도모했다. 조선인 노무자 6000여 명을 비행장 등 군사시설 공사에 투입한 것도 그 때문이다(상자 기사 참고).

    하지만 이곳에서 벌어진 펠렐리우 전투, 앙가우르 전투, 미 해군 제58기동함대의 팔라우 공습 등으로 조선인을 포함한 일본군 4만여 명이 사망했다. 팔라우 인근의 사이판(현 미국령)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미군이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사이판을 점령하기 위한 작전에서 일본군 3만여 명과 미군 3000여 명이 전사했다. 사이판 인근 티니언 섬(현 미국령)은 원자폭탄을 실은 폭격기가 발진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태평양전쟁의 격전지였던 이곳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위안부는 몇 명이나 될까. 오랫동안 위안부 문제를 연구해온 정진성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본이 팔라우에 남양청을 두고, 남양군도에서 위안소 행정관리를 관장한 데다 일본군이 전선을 확대하면서 조선인 위안부를 대규모로 동원했을 것”이라고 진단하면서도 “그 규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현재까지 이 지역 위안부 실태 조사는 미흡한 상태. 2001년 발간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책임을 묻는다’(풀빛)에 조최혜란 한국정신대연구소 연구원이 현지 조사보고서를 내고, 해외희생동포추념사업회가 1995년 답사를 진행했을 뿐이다. 기자는 이런 이유로 9월 3~7일 사이판, 팔라우 지역에 머물며 위안부 흔적 찾기에 나섰다.

    9월 3일 사이판에 도착한 뒤 먼저 ‘수요집회’ 1000회 기념으로 사이판 현지에서 동시 집회를 진행한 김영길 씨를 만났다. 사실상 사이판의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자료는 전무한 상태라 교민들이 ‘정신대 동굴’이라고 부르는 곳부터 찾았다. 라오라오 베이로부터 150여m 떨어진 이 동굴은 깊이 10여m, 길이 30여m에 달했다. 들어가 보니 그 안에는 인위적으로 동굴을 판 흔적뿐 아니라 동굴 안에 방처럼 보이는 공간 서너 개가 있었다. 관광가이드들은 1990년대부터 정글투어 코스에 이곳을 넣어 “방처럼 보이는 공간에 위안부들이 들어가 일본군과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맺었다”고 설명해 왔다.

    하지만 기자는 동굴 연원에 대한 간접 증언조차 확보할 수 없었다. 사이판 이민개척 세대에 속하는 임재열 사이판한인회 부회장은 “1980년대에 이민을 왔는데, 정신대 동굴 안에 야전침대가 있었고 동굴 밖에 철창이 있다는 증언만 들었을 뿐 정확한 건 모른다”고 말했다. 관광가이드 1세대들조차 “위안부가 등장하는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이곳에서 촬영한 뒤 관광 코스가 된 것 같다”(이는 사실과 다르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는 필리핀에서 촬영했다), “동굴을 탄약고로 썼다고 들었다”고만 답했다. 이 같은 전언만 난무해 위안부 존재에 의문을 갖자 김영길 씨는 “많은 군인이 있었던 곳에 위안부가 없었을 리 없다”면서 “흔적이 없다면 모두 몰살됐을 개연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뒤이어 조최혜란 연구자가 현지 조사한 카라베라 동굴로 향했다. 당시 사이판 교민인 임윤재 장로는 연구자에게 “이곳에 위안소가 있다는 말을 현지인에게 전해 들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차를 타고 ‘정신대 동굴’에서 홈이 깊게 파인 흙길을 40여 분 동안 달려 도착했지만 외진 곳이라 마을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기자가 한국에 머무는 임 장로에게 관련 내용을 묻자 그 이상은 모른다고 답했다).

    티니언시 고위 공직자 익명 요구

    “‘샤워 하우스’에 조센 레이디가 살았다”

    조선인 위안부가 성병 검사를 하러 방문한 팔라우 코롤병원 은 팔라우지역전문대학으로 변했다.

    9월 4일 5분여 동안 경비행기를 타고 사이판에서 5km 떨어진 티니언 섬에 도착해 증언자를 물색했다. 티니언 섬 교민인 신창수 씨 안내로 노인 서너 명의 집을 찾아갔지만 조선인 위안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후 티니언 섬에 대한 역사책을 쓴 돈 패럴(Don A. Farrell) 씨를 찾아가 위안부에 대해 묻자 “이 사안에 관심이 없어서 조사해보지 않았지만 티니언 섬에 조선인 위안부는 분명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때마침 패럴 씨를 찾아온 티니언시 고위 공직자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자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우리 아버지는 티니언 토박이인데 어린 내게 한국 위안부 여성이 많이 살았다고 알려줬다”고 말했다. 드디어 증언자를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지난주 업무상 일본을 다녀왔다는 그는 기어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이튿날 사이판 노인 70여 명이 낮에 찾아온다는 ‘마낭코’(Man’amko·노인정)로 향했다. 사이판 현지 원주민의 증언을 들으려고 앞으로 이 사안을 취재해보겠다는 ‘사이판타임스’(사이판 교민신문) 최민석 기자가 동행했고, 어렵지 않게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전쟁 전 한국 여성들이 비즈니스(노인은 성매매라고 표현하지 않고 에둘러 말했지만 비즈니스가 성매매를 뜻하는지 묻자 그렇다고 답했다)를 하려고 1000여 명이 왔다. 오키나와인, 일본인, 한국인 여성이었다. 가라판(사이판 중심가) 지역에 주로 살았다. 이들은 각각 다른 집에서 살았다.”(호세 아이토레서·89)

    “당시 나는 어려서 조선인 위안부를 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린 내게 조선인 위안부 여자들이 주변에 산다고 말했다.”(만요엘 알 메사·71)

    뒤이어 태평양전쟁박물관으로 향해 제2차 세계대전 멀티미디어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한 결과, 위안부와 관련된 자료로 ‘동굴 안에서 죽은 일본인 여자’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사진 속 주인공이 일본 여성일 수도 있지만 당시 조선인이 일본인에 포함됐던 만큼 조선인 위안부일 개연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9월 5일 오후 5시 사이판에서 출발해 괌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자 밤에 팔라우에 도착했다. 취재할 수 있는 기간은 다음 날 하루뿐이었지만 강무자, 이상옥, 강순애 씨의 증언이 있어 흔적 찾기는 비교적 수월할 듯했다.

    다음 날 아침 하순섭 해외희생동포 추념사업회 팔라우 지부장의 안내로 코롤 시내 위안소 터부터 찾았다. 이곳이 바로 강무자 할머니가 “군인들이 데리고 간 집은 코롤 병원 뒤에 있는 위안소였다. 간판이 한자로 쓰여 뭐라고 돼 있는지 몰랐다. 집은 사각형인데 방은 30개가 넘었다. 그들은 방 서너 개를 터서 하나로 만들더니 우리에게 들어가라고 했다”고 말한 그 장소일 듯했다.

    한국 여성 카후에라고 불러

    “‘샤워 하우스’에 조센 레이디가 살았다”

    “팔라우 코롤 시내에 조선인 마사지 레이디가 있었다”고 증언한 토마스 오바 씨.

    때마침 주변을 걸어가던 토마스 오바(73) 씨에게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 묻자 그는 “이곳 마사지 업소에 조센 마사지 레이디가 살았다”면서 인근 찻집에 있는 80대 친구를 소개했다. 이 노인은 익명으로 인터뷰하면 내용을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주민들은 익명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팔라우가 작아서 이름이 나오면 누군지 금방 알아 손해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우리는 그곳을 ‘샤워 하우스’라고 불렀다. 거긴 오직 일본군인만 들어갈 수 있었다. 팔라우 원주민은 갈 수 없었다. 그들은 이걸 (자신의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아 치면서) 하려고 갔다. 여자들은 일본 정부가 데려왔다. 안에서 샤워하게 시켰다. 그런 여자들은 지금은 팔라우지역전문대학(Palau Community College)의 전신인 코롤 병원에도 있었다.”

    그가 지목한 팔라우지역전문대학을 찾아가 확인하자 그곳은 현재 대학 건물의 핵심 본부로 사용 중이었다. 투티 칠튼 학사처장을 만나 위안부에 대해 묻자 그 내용은 처음 듣는다고 했다. 결국 고인이 된 이상옥 할머니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들 증언집1’(한울)에 남긴 “육군 졸병이 가슴, 팔, 발을 칼로 찔러 병원에 입원한 뒤 일본인 군의관의 도움으로 간호조무사 구실을 했다”는 말을 떠올리며 그 실태를 짐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100명이 넘는 여자가 검사를 받으러 왔다. 조선 여자가 50명 정도 됐다. 병원에 있으면서 팔라우에는 일본 유곽과 조선 유곽이 각기 하나씩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병이 있는 여자들은 나팔관에 고름이 생겨서 잘 빠지지 않았다. 10명 이상이 늘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증세가 덜한 여자는 2, 3일 만에 나가고 심한 여자들은 한 달 정도 있었다. 검사하면서 보니 애기를 낳은 경험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이상옥)

    “‘샤워 하우스’에 조센 레이디가 살았다”

    팔라우 국기와 함께 일본 국기가 그려진 팔라우 노인정 버스.

    막연한 기대를 안고 팔라우 지역문화사회국(Ministry of Community&Cultural Affairs)을 찾았다. 원주민 역사를 기록한다는 한 조사원은 “일본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이름이 노출되는 걸 원치 않는다”면서 “느가드마우(Ngarmau)에 사는 83세 팔라우 여성이 성을 파는 조선인 여성들이 살았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기자의 요청에 그는 그 여성과 통화 후 “당시 팔라우 원주민은 일본 여성을 난카이로, 한국 여성을 카후에라고 불렀다”는 증언을 더해줬다. 앞으로 이 내용을 지속적으로 찾아보겠다는 그를 뒤로하고 코롤 시내에서 이를 기억할 만한 노인을 만나기 위해 노인정을 찾아갔지만 증언은 들을 수 없었다. 다만 팔라우 노인정 봉고차에 그려진 일본 국기가 보였다.

    나흘간의 짧은 취재 일정에서 잃어버린 역사 흔적을 찾았음에도 한국으로 돌아오는 마음은 편치 않았다. 어느 누구도 제대로 정리하지 않아 버려진 남태평양 조선인 위안부들의 흔적을 살펴보니 “기억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명언이 귓전에 맴돌았다.

    일제강제동원희생자 유족 사이판·팔라우 추도순례

    난생처음 “아버지!” 외치고 말을 못 이어…


    “아버지… 일흔 해 전 시골집에서 옹알이하던 소리가 이젠 깨진 대 퉁소에서 나는 쉰 소리가 돼 처음 아버지라 불러봅니다. 매번 불러봤지만 그 소리는 메아리조차 삼켜버리고 하늘 저편으로 빗겨나고 말았습니다. 그 오장에 맺힌 절규가 하늘을 깨우치고 땅을 명동시켜 오늘 우리가 추도 순례를 오게 돼 울부짖습니다.”

    9월 6일 팔라우 한국인 위령탑 앞에서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강제동원위원회)의 진행으로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을 기리는 추도제가 열렸다.

    김국환(72) 씨는 9월 4일 사이판에 도착한 유족들이 한국인평화추념탑에서 추도제를 지내며 아버지를 부르고 오열할 때도 꿋꿋했다. 경북 대구에서 개인택시를 운전한다는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편지를 드리게 됐다면 설렌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인 고(故) 김위석(1897년생) 씨는 오남매 중 막내인 김국환 씨가 돌 무렵인 1941년 일제에 강제 동원돼 팔라우에 있던 난요 알루미늄광업(주) 팔라우광업소 광구에서 노무자로 일하다 사망해 그의 목소리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팔라우를 두 차례 찾아와 아버지의 흔적을 되짚었던 그는 추도제가 시작되자 단상에 올라 “아버지!” 단 한마디만 외치곤 말을 잇지 못했다. 난생처음 아버지를 부르는 탓에 눈물이 앞을 가렸던 것이다. 결국 진행 요원이 대신 편지를 읽었고, 이런 김씨를 보면서 사이판, 팔라우 등 남양군도 지역에서 부모나 형제를 잃어 추도순례에 동참한 유족 18명은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쳤다.

    김씨처럼 일제강점기에 부모, 형제가 남양군도에 강제 동원돼 강제동원위원회에 피해 신고를 접수한 사람은 1만6000여 명. 강제동원위원회는 2006년부터 매년 1~2회씩 추도순례 신청자 가운데 지역별 추첨을 통해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 해외 추도순례’를 진행하는데, 사이판과 팔라우 지역은 2006년에 방문한 데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강제동원위원회가 이 지역에 방점을 둔 것은 피해 규모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2007년과 2008년 두 차례에 걸쳐 남양군도 현지 조사를 통해 작성한 ‘남양군도 지역 한인 노무자 강제동원 실태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남양군도 한인 거주자는 1941년 당시 6000명에 육박했다. 남양군도 조사 책임자인 김명환 강제동원위원회 조사관은 “남양군도를 관할한 남양청(팔라우 소재)에 의해 한인 노무자 공급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며 “남양청과 각 회사에서 동원한 노무자 수와 한인 증가 수가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일본은 조선인을 남양군도에서 항구, 도로공사 같은 토목공사와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로 대거 동원했다.

    하지만 유족들에게 약식으로나마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해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추도제는 더는 진행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강제동원위원회 임기가 올해 말로 종료되기 때문이다. 추도순례에 동참한 박인환 강제동원위원회 위원장은 “위원회 역량이 부족해 죄송하다”면서 “강제 동원 사망자들의 유해를 수습하지 못한다 해도 충남 천안에 있는 ‘망향의 동산’에 나라를 위해 희생된 강제 동원자의 위패를 모시는 일까지는 마치고 싶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박동현(71) 씨는 “우리 정부가 일제강점기에 강제 징용된 사람들의 눈물 값으로 한일협정을 맺어 일본 정부로부터 유상, 무상 원조를 받았는데도 피해자 유족들을 헌신짝 취급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강제 동원 피해자 지원금으로 1인당 2000만여 원을 지급했지만 그것만으로 아픔을 치료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아버지가 1941년 남양군도 지역에서 사망하자 어머니가 재혼하는 바람에 나는 아홉 살 때부터 떠돌았다. 다행히 군에 자원입대해 3남 1녀를 키웠지만 돌이켜보면 부모가 없어서 힘들었던 순간이 많았다. 아버지 한 사람이 없어서 가족 모두가 받는 고통은 당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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