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인 5월 초 경기 안산 유세에서 “시흥, 의왕, 군포 등 경기 남부지역에 ‘4차 산업혁명 선도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4월 중순 대전을 찾아가서는 “대전을 4차 산업혁명 특별시로 만들겠다”고 했다. ‘스마트 융복합 첨단과학산업단지’의 대전 건설도 약속했다.
4차 산업혁명은 지난 대선에서 큰 화제를 모은 의제 가운데 하나다. 노동, 교육, 과학기술 등 여러 분야 공약이 이 키워드와 맞물렸다. 4차 산업혁명 관련 사회간접자본(SOC)을 유치하는 지방자치단체(지자체)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파급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예산 폭탄’도 점쳐졌다. 경기연구원이 최근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경기 시흥에 ‘4차 산업혁명과 미래산업 성장동력을 지원할 신성장 창의연구단지’를 조성하는 데 필요한 사업비는 4조6000억 원에 이른다.
대전시는 ‘스마트 융복합 첨단과학산업단지’ 조성에 2조 원이 든다고 추산했다. 그러나 한 해 예산이 400조 원대인 우리나라 현실에서, 두 지자체에 성격이 비슷한 산업단지 2개를 이만 한 규모로 건설하는 게 필요할지 의문이 든다. 정치 공약의 실현 가능성을 검증하고 이행 여부를 감시하는 시민단체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의 이광재 사무총장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나”라며 “어느 한쪽, 또는 두 쪽 다 실현 가능성이 낮은 약속이라고 봐야 한다”고 평했다.
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공약에 비해 재원 마련 대책이 부실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더불어민주당(민주당)이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문 대통령이 발표 공약 190개를 다 이행하려면 5년간 178조 원이 더 필요했다. 민주당은 세출 구조조정과 투자우선순위 재조정, SOC 지출 감축 등을 통해 이를 충당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이때 추산된 178조 원에 지역공약 관련 예산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책임한 약속, 공공연한 위반
민주당이 19대 대선을 앞두고 발간한 정책공약집 ‘나라를 나라답게’에는 문 대통령이 전국 각지를 돌며 약속한 지역 맞춤형 공약이 들어 있지 않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선거공약서에는 △경기 4차 산업혁명 선도 클러스터 조성 △대전 스마트 융복합 첨단과학산업단지 조성 등의 공약이 담겨 있지만, 예산 계획은 빠졌다. 문 대통령이 ‘공약 가계부’를 작성할 때 이들 약속까지 비용으로 계산했다면 ‘재원 마련 방법에 현실성이 없다’는 비판은 더 커졌을 개연성이 높다.‘주간동아’는 해당 공약의 실현 가능성을 점검하고자 각 지자체 산하 연구소 등이 그동안 진행해온 사업타당성 조사 관련 보고서를 검토했다. 해당 기관들이 문 대통령의 지역공약 사업 예산을 얼마로 계산했는지 확인한 결과 △강원 ‘제천~삼척 ITX 철도 노선 건설’ 3조2339억 원 △대전 ‘대전권 연계 외곽순환도로 교통망 구축’ 1조1197억 원 △충남 ‘중부권 동서횡단 철도 건설’ 8조5000억 원 △대구 ‘대구~광주 동서내륙철도 건설’ 4조8987억 원 △부산 ‘동남권 관문공항 건설’ 8조9009억 원 △경남 ‘경남 남해안 동북아 해양관광 중심지 육성’ 1조8449억 원 △전남 ‘첨단과학기술 융복합 미래형 농수산업생산기지 조성’ 2조2670억 원 △전북 ‘스마트 농생명 밸리 육성’ 1조420억 원 등 전국 각지에 수조 원대 비용의 ‘지역공약 사업’이 즐비했다.
문 대통령이 해당 사업비 전액 지원을 약속한 건 아니다. 사업 규모 역시 지자체의 기대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규모가 큰 사업이 지역공약이라는 이유로 공약집에조차 실리지 않은 채 ‘약속’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광현 대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이번 대선에서는 전국 17개 지자체가 지역민원을 담은 공약 요구사항을 먼저 만들어 유력 대선주자들에게 제시했다. 조기 대선으로 공약을 촘촘히 마련하기 어려웠던 후보들이 이를 참고해 지역공약을 만든 것으로 안다. 이러다 보니 국토 균형발전 차원에서 과연 이 사업이 적절한가 싶은 것까지 공약에 포함된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지역공약도 논의해야
전북의 경우 올해를 ‘전북 몫 찾기’ 원년으로 선언하고, 도지사가 나서 ‘8대 핵심 분야 45개 과제’의 공약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는 후문이다. 한 정치권 인사는 이에 대해 “지방자치제가 정착되면서 지자체장은 대선 공약에 해당 지역 민원을 최대한 많이 넣으려고 노력한다. 대선후보 처지에서도 지역공약의 경우 지자체와 중앙정부 사이에 예산 분담 비율이 확정돼 있지 않고 타당성 조사 결과 등에 따라 사업 불가 결정이 날 수도 있기 때문에 일단 약속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지역공약은 다른 분야에 비해 현실성 검토가 소홀한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공약 파기도 좀 더 빈번히 일어난다. 박근혜 정부는 대선 과정에서 167개 지역공약 사업을 발표했지만 임기 중 완료된 사업은 32건에 그쳤다. 이 통계도 정부가 발표한 것으로 실제 이행률은 더 낮다는 보고도 있다. 박근혜 정부는 신규 사업 상당수를 예산 등을 이유로 2018년 이후로 미뤄 빈축을 사기도 했다. 이 지역공약 사업은 고스란히 새 정부의 부담으로 남았다.
정치권이 충분한 검토 없이 발표한 지역 공약이 사회 갈등의 원인이 된 경우도 있다. MB(이명박) 정부의 이른바 ‘동남권 신공항’ 건설 공약이 대표적 사례다. 당시 정부는 사업타당성 조사를 거쳐 출범 이듬해인 2009년 신공항 건설 지역을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으로 양분돼 치열한 다툼을 벌이자 네 차례 발표를 연기하며 갈등을 키웠다. 결국 2011년 ‘계획 백지화’를 발표할 때는 대통령이 대국민사과까지 해야 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없이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현재 70일 예정의 ‘국정기획자문위원회’를 운영하며 공약사항을 국정과제로 다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기간 지역공약도 함께 논의 테이블에 올려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광재 사무총장은 “지역공약의 사업비는 중앙공약과 맞먹는 수준인데 이를 ‘지역민 선물보따리’ ‘득표 수단’ 정도로 취급하는 건 큰 문제”라며 “이제라도 대통령의 지역공약을 꺼내놓고 공론의 장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