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라도 칼을 쥐면 휘두르고 싶어진다. 잘 다룰 줄 아는 사람에게 줘야 하는 이유다. 악의를 가진 사람도 피해야 한다. 흉기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친박(친박근혜)계는 어땠을까. 달려도 너무 달렸다. 불과 1년 전 그들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진박(진짜 친박근혜) 공천이 맹위를 떨쳤다. 그러고도 180석을 기대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과반 의석도 실패했다. 반성이 필요했지만 진심 어린 자성은 없었다. 총선 패배 뒤 친박 패권을 청산할 혁신위원회마저 설치하지 못했다. 친박계를 대리하는 관리형의 김희옥 혁신비상대책위원회 체제만 들어섰을 뿐이다.
2016년 8월 전당대회에서도 그들은 다시 친박 핵심인 이정현 대표 체제를 내세웠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이후에도 친박계는 여전했다. 당내 비주류가 탄핵소추안 찬성 표결에 동참할 조짐을 보일 때도 이정현 대표는 장담만 일삼았다. “그 사람들이 실천하면 뜨거운 장에다 손을 집어넣겠다.” 장을 지지겠다던 그는 탄핵소추안 가결 뒤에도 당의 공백을 최소화해야 한다며 한참을 버티다 그만뒀다. 이후 들어선 것이 인명진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체제다. 친박 좌장 서청원 의원의 친구라 우려가 없지 않았던 인선이다. 그래도 해낼 줄 알았는데, 핵심 친박 청산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요즘 인 비대위장은 오히려 친박계 회생에 더 적극적이다. 이정현 전 대표와 정갑윤 의원이 제출한 탈당계를 반려하려고 시도했다 곧바로 철회한 일이 대표적이다. 인명진 비대위도 결국 친박계 대리 체제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단결파 친박
권불십년이다. 박근혜 정권은 권불오년의 단명으로 끝났다. 잘했으면 10년은 가능했을 것이다. 차기 정부도 친박 정권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는 뜻이다. 자초한 위기이니 책임을 떠넘길 곳도 마땅치 않다. 급한 대로 당명도 바꿨다. 화장을 바꿨는데 보는 이들의 반응은 미온적이다. 알맹이가 안 바뀐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래도 살아야 하는데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암초를 향해가는 배, 자유한국당 선상에서는 두 가지 일이 진행 중이다. 구명정을 타고 탈출하거나 서로 키를 잡겠다고 다투는 일이다. 친박계가 해체파와 단결파로 나뉠 조짐이다. 아직은 단결파가 주류다. 상황 파악이 빠른 사람 가운데 일부는 벌써 구명정을 타고 바른정당으로 옮겨 갔다. 조만간 구명정에 오르는 이가 늘어날 것이다. 이 와중에 선상반란을 일으켜 선장이 되겠다고 꿈꾸는 이들도 있다. 암초를 피할 역량도 없는 이들이 나서면 암초에 도달하기도 전 급변침을 하다 침몰할 수 있다. 주인을 잃은 친박 콘크리트 지지층의 맹주가 되겠다며 도전을 시도하는 이가 여럿이다. 탄핵반대 집회에 앞다퉈 참여한 자유한국당 정치인들이다. 김진태 의원이 첫 주자다. 이후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뛰어들었고, 윤상현 의원과 조원진 의원도 가세했다. 급격한 변신으로 놀라움을 선사했던 김 전 지사는 3월 15일 돌연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어차피 자유한국당 푯말로는 이번 대선에서 승리하기 어렵다 판단하고 차라리 대표를 거쳐 차차기에 도전하기로 방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김진태 의원은 3월 14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출마를 포기하면서 그가 친박 콘크리트 지지층의 대표주자가 되리란 관측이 없지 않다.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일각에서는 그의 출마가 시대적 요청이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김 의원은 선거의 여왕으로 불린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체재 구실을 할 수 있을까. 체급이 그에 버금갈까. 확신이 들지 않는다.
해체파 친박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던 날 서울 삼성동 자택 앞에 나타난 친박계 의원은 소수다. 나머지 친박계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속내가 복잡할 것이다. 구명정을 타고 싶어도 단결파의 눈치가 보여 주저될 뿐이다. 무엇보다 갈 곳이 마땅치 않다. 창당을 할 주변머리는 없고, 받아줄 정당이 필요한데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이럴 땐 떼로 묻어가는 편이 제일 좋다. 따지고 보면 친박계 해체 선언은 진즉 했다.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적당한 때 명분을 찾아 혼자 또는 집단으로 탈당을 결행하면 그만인데, 집단을 만드는 일에 나서는 이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외부 견인이다. 외부에서 누군가 강하게 끌어당기면 마지못한 척 끌려올 것이란 이야기다.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 김무성 전 대표다. 바른정당내에서 그를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정치 9단 김무성이 선대위원장직에 오르면 먼저 자유한국당 비주류의 영입에 나설 공산이 크다. 해체파 친박은 그다음 영입 대상이다. 해체파 친박이 몇 명인지는 아직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됐으니 수가 늘어날 것은 분명하다. 이미 지상욱 의원이 탈당해 바른정당에 합류했다. 31명 이상 탈당해 바른정당에 입당하면 바른정당이 원내 2당이 된다. 바른정당 대선주자의 기호도 4번에서 2번으로 오른다.
사저정치는 없다
박 전 대통령이 삼성동 사저로 돌아가던 날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친박계를 중심으로 ‘삼성동팀’이 만들어질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총괄팀 서청원, 최경환 의원과 정무팀 윤상현, 조원진, 이우현 의원, 법무팀 김진태 의원, 수행팀 박대출 의원, 언론팀 민경욱 의원이라는 명단까지 돌았다. 이들 8인으로 친박 임시정부를 꾸려 박 전 대통령이 ‘사저정치’에 나서리란 보도도 줄을 이었다. 거의 모든 전직 대통령이 사저정치를 꿈꿨다. 하지만 성공한 사례가 없다. 불법으로 처벌받은 전직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다. 하물며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탄핵된 전직 대통령의 사저정치를 국민이 용납할 리 없다.이런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이들 친박 8인은 곧바로 부인하고 나섰다. 단언컨대, 사저정치는 없다! 친박계도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자각증세가 올 것이다. 역사는 친박계를 손에 쥔 권력도 간수하지 못한 정치집단으로 기록할 것이다. 형사처벌 결정 이후에도 정치적 재기를 시도하지 말라는 뜻이다. 박 전 대통령과 친박계는 이미 충분히 대한민국 정치를 후퇴시켰다.
박근혜의 탈당
지금 이 국면에서 박 전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자유한국당을 탈당하는 것이다. 탄핵됐으니 출당 조치를 하더라도 증거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인명진 비대위원장은 윤리위원회를 열어 출당 논의를 따로 하진 않겠다고 한다. 특별당원인 박 전 대통령의 당내 위상이 이 정도다. 자유한국당의 주인은 박 전 대통령이라고 다시 천명한 셈이다. 단결파 친박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력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박 전 대통령이 탈당하지 않는 한 자유한국당은 여전히 친박당이다. 일부 해체파 친박이 탈당해 살림살이가 줄어들어 제2의 친박연대 규모가 되더라도 그냥 갈 태세다. 이렇게 버티면 2020년 총선 때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다. 그동안 이들의 행보로 볼 때 오히려 그 방향이 더 자연스럽기조차 하다.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탄핵에 책임을 느낀다면 자유한국당은 대선후보도 내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 정당보다 대선후보가 넘쳐난다. 당연히 지지율이 낮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자유한국당 밖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과 황교안 권한대행이 보수세력으로부터 지지를 받은 이유이기도 했다. 이제 그들도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 정도면 포기할 법한데 끝까지 밀고 나갈 모양이다. 경선을 강행할 움직임이다. 지분을 최대한 확보해야 그나마 살 길이 열린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기대와 달리 2020년 총선에서 친박당으로 살아나기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친박계 유력 대선주자가 없는 점을 고려할 때 향후 홍준표 경남도지사와 공조도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황 권한대행이 출마를 포기해 홍 지사가 가장 큰 반사이익을 볼 것이다. 단결파 친박에게 홍 지사는 계륵 같은 존재다. 버리기 아깝다. 반면 가까이 하기에도 부담이다. 공조와 포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결국 홍 지사의 지지율 상승 여부에 달렸다. 상승세를 이어간다면 전략적 공조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경우 서청원 의원이 막후교섭에 나설 공산이 크다. 당내 기반이 취약한 홍 지사로서도 나쁠 것이 없다. ‘양박’이라며 친박을 양아치에 비유했지만, 친박 핵심 일부가 탈당하거나 확실하게 2선으로 물러서는 선에서 타협할 여지가 있다.
이미 멀어진 친박, ‘멀박’ 중심의 바른정당이 있다. 이들의 최대 애로는 이미지 세탁이다. 박 전 대통령과의 공동책임론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데 여의치 않은 것이다. 결국 진정성으로 증명하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자유한국당 비주류는 물론, 해체파 친박까지 영입해야 지지기반을 확충할 수 있다는 현실도 외면하기 어렵다. 해체파 친박까지 합류하면 바른정당은 보수세력 재편의 중심에 선다. 결국 바른정당 지도부의 정치력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