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통령선거(대선)의 가늠자는 전통적으로 ‘지역’이나 ‘이념’ 혹은 ‘인물’이었다. 유권자의 나이나 세대가 결정적 변수가 된 선거는 박근혜와 문재인이 맞붙었던 2012년 18대 대선이 처음이었다. 당시 40대 이하 젊은 층에서는 문 후보가, 50대 이상 장년층에서는 박 후보가 상대를 압도하며 뚜렷한 세대 대결 구도를 만들었다. 당시 방송에 출연했던 한 70대 유권자는 “자녀들에게 뭔가 (존재감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말로 기호 1번 선택 이유를 공개적으로 밝혔을 정도다.
치열한 접전 끝에 당시 박 후보는 20, 30대 미래세대에서 30%의 저조한 지지율을 보였지만, 1970년대 황금기를 경험한 실버세대의 열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당선했다. 이른바 대한민국 ‘제1차 세대 전쟁’의 승자는 산업화 세대였다.
당초 올 연말로 예정됐던 차기 대선은 4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역 구도가 약해지면서 세대 간 대결로 예상됐다. 2000년대 접어들어 뚜렷한 정치적 대립각을 세운 ‘정보화 세대’와 ‘산업화 세대’의 두 번째 격돌이 정국의 주된 흐름이었다.
하지만 예상에 없던 ‘최순실 게이트’로 이번 대선은 ‘촛불집회와 탄핵정국’ 속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갔다. 자연스레 세대 이슈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모양새다. 이른바 ‘정권교체 프레임’의 급부상이다.
대다수 정치여론조사 관계자는 하나같이 “정권교체 압력이 워낙 거센 탓에 이번 벚꽃대선은 ‘세대’를 포함한 다른 이슈가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다”고 단언해왔다. 실제 제1 야당 지지율이 과반(50%)에 근접하고 주요 야권후보의 액면 지지율을 더하면 70%에 이를 정도로 보수여당의 존재감이 사라진 상황. 20대든 50대 이상이든 ‘정권교체’와 ‘적폐청산’을 위한 최선의 후보를 고른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그 결과 ‘세대 간 대결보다 연대와 화해’가 이번 대선의 화두가 될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민주당내 경선이 사실상 결승”
그런데 2월 중순, 탄핵 일정이 점차 구체화되면서 견고해 보이던 야권의 단일대오가 흔들리는 모양새가 역력하다. 후보 선호도에서도 세대별 분화가 뚜렷해지면서 4년 전 대선과 또 다른 세대 대결의 양상이 엿보인다. 그 중심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획기적 발전을 이룬 1987년 민주화항쟁 세대, 즉 50대가 된 386세대가 자리한다. 이에 도전하는 세력은 이들의 동생 격인 30, 40대, 즉 497(40대-90년대 학번-70년대 출생)세대다. 선배와 후배 간 뚜렷한 정치관 차이가 나타난 셈이다.역대 최고 지지율을 기록 중인 원내 제1당 더불어민주당(민주당)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집권 가능성이 점차 현실화하면서 ‘친노(친노무현)’진영의 양대 축인 안희정 충남도지사와 문재인 전 대표가 정면충돌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당 안팎의 뜨거운 관심을 반영해 완전국민경선으로 치르는 이번 민주당 후보 경선은 선거인단 100만 명 이상을 기대할 정도로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다(2월 23일 현재 신청자는 약 80만 명).
안 지사의 지지율은 뚜렷하게 상승하고 있다. 올해 초만 해도 5% 안팎의 지지율로 전체 5위권에 머물던 그는 2월 말 주요 여론조사 전문기관의 조사(다자) 결과에서 16~21%로 껑충 뛰어오르며 1위 문재인(33~38%)에 이어 2위 자리를 굳힌 상황(이하 여론조사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인터넷 홈페이지(www.nesdc.go.kr) 참조). 나아가 표의 확장성은 오히려 문 전 대표보다 높다는 평까지 나왔다. 2월 19일 발표된 국민일보-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조사에서 안 지사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될 경우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와 보수 측 인물이 참여하는 3자 대결에서 50% 넘는 지지율로 1위를 하리라는 결과가 나온 것. 문 전 대표는 이제까지 3자 대결에서 한 번도 절반을 넘어본 적이 없기에 여의도 정가가 받은 충격은 크다는 후문이다.
급기야 2월 21일 발표된 머니투데이-조원씨앤아이 조사에서는 “결선투표가 ‘문 vs 안’이라면 누구에게 투표하겠나”라는 질문에 안 지사는 45.0%, 문 전 대표는 42.8%를 기록해 처음으로 순위가 뒤바뀌기도 했다. 이번 경선은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2차 결선투표로 이어진다. 문재인 비토세력이 연대할 가능성이 높아 사실상 오차범위 승부까지 예상되는 대목이다. 일각에서 ‘보수세력의 역선택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 폄하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안 지사의 상승세가 당 안팎에서 ‘돌풍’ 수준을 넘어섰다는 사실은 입증된 셈이다.
이재명 성남시장을 포함한 3자 대결 혹은 ‘문 vs 안’의 양자대결 분위기가 감지되자 당내 비주류인 ‘비문(비문재인)’진영은 활기를 띠며 안희정 캠프 참여를 서두르는 모양새다. 특히 반문(반문재인)진영의 핵심으로 꼽히는 김종인과 박영선 의원, 당내 핵심 요직을 차지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 출신의 이인영 의원 등 386의원까지 복잡한 눈치. 정치 경험이 부족한 젊은 실무자 위주로 짜인 안희정 캠프의 운영이 미숙하다는 지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실정을 ‘지도자의 선의(善意)’로 표현하는 등 정무감각 부실이 도마에 오른 탓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1987년을 거리에서 뜨겁게 보낸 386세대일수록,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안 지사에 대한 호감이 더 높다는 것이다.
민주당 외곽 조직에 속한 40대 후반의 사업가 A씨는 일찌감치 안 지사로 마음이 기운 상황. 문 전 대표의 친화력이나 개혁성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A씨는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장을 했으면 친노 비서관들이 그의 성품을 잘 알 텐데, 캠프로 달려간 비서관 수가 그리 많지 않다”면서 “당내 경선이라면 당연히 자기 색깔과 가까운 사람을 찍는 게 순리”라고 답했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하며 두 인물을 두루 접했던 50대 초반 B교수의 선택 역시 안 지사였다. 그는 “민주진영의 대통령은 늘 시대적 가치를 리드하는 지도자가 차지했다”면서 “문재인 캠프의 인적 구성이 올드 패러다임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명망가 중심으로 대규모 캠프를 꾸렸지만 뚜렷한 비전은 찾기 어렵다는 지적이었다. 열린우리당 시절 공천심사위원을 했던 50대 C교수도 안 지사를 지지하는 이유에 대해 “우리 (386)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며 “중도적 관점에서 통합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경륜과 혁신 의지까지 갖췄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50대 된 386세대 “시대정신은 安에”
안 지사의 뚜렷한 상승세는 50세 이상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율로 확인된다. 어느새 50대에 접어든 386세대는 “문 전 대표를 싫어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안 지사에게 더 끌린다”는 설명이다. 표의 확장성 면이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문 전 대표보다 ‘어른스럽게’ 접근하는 데 대한 호감도 높다. 재벌개혁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논란에서 중도통합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것도 사회 지도층에 있는 386세대에게 호소력이 있다는 평가다. 실제 충남도지사직을 맡아 폭넓은 행정 경험을 쌓은 점을 높게 평가하는 이도 많았다.
여론조사 결과도 이들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다. 2월 22일자 조원씨앤아이 조사 결과 안 지사는 50대에서 23.3% 지지율을 얻으며 문 전 대표(23.6%)와 사실상 호각세를 이뤘다. 30, 40대에서 비교적 큰 차이(20% 이상)를 보이는 것과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22일자 알앤서치 조사에서도 50대와 60대에서 지지율 26% 남짓을 기록하는 등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인 젊은 진보층보다 중도·보수층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
반대로 문 전 대표의 가장 열성적인 지지자는 90년대 학번. 즉 30대 중반부터 40대 중반에 이르는 1970년대 출생자들이다. 대다수 여론조사에서 꾸준히 45% 이상 지지율이 나오는 것은 물론, 일부 조사에서는 60%에 육박할 정도다.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문 전 대표의 핵심 지지세력은 사회의 허리인 30, 40대. 사실상 ‘촛불 세력’의 중심에는 40대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마디로 제2차 세대 전쟁 양상은 80년대 학번과 90년대 학번 간 대결 구도로 짜였다는 얘기다.
40대 초반의 1인 출판사 사장 D씨는 문 전 대표를 지지하는 이유에 대해 “신뢰와 정의, 그리고 안정감까지 두루 갖춘 후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30대 후반의 음악인 E씨 역시 “청렴하고 선량한 표정의 문 전 대표가 좋다”고 밝혔다. 15년 차 방송사 PD인 F씨는 “박근혜와 가장 반대되는 삶을 산 인물로 그를 꼽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선배 세대와 달리 497세대는 한결같이 ‘적폐를 청산하기에는 문 전 대표가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선택 이유로 꼽는다. 그의 이력이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현안들을 풀기에 더 적합하다는 주장이다. 특히 문 전 대표의 정치구호인 ‘사람이 먼저다’ ‘공정한 사회’ 등이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정치·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
흥미로운 점은 지난 1년간 문 전 대표의 옹립을 주도한 세력 역시 3040세대였다는 것이다. 지난여름까지 지지율 1위 자리를 다투던 박원순 서울시장을 포기하게 한 것도, 지난해 12월 지지율이 치솟던 이재명 성남시장이 ‘친문패권’을 주장하며 화살을 당내로 겨냥하자 이를 견제한 것도 이들 세대였다. 이 시장에 대한 견제는 빠르고 강력했는데, 한국갤럽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2주 차 이 시장에 대한 40대 지지율은 23%에 달했지만 다른 세대보다 더 빨리 추락을 시작해 2주 만인 올해 1월 초에는 10%로 하락하게 된다. 이 같은 추세는 순식간에 다른 세대로까지 확산돼 이 시장 지지율 추락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오늘의유머, 클리앙, 엠엘비파크 등 497세대가 자주 찾는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문재인 지지’에 대한 경향성을 좀 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유독 문 전 대표와 관련한 미담이 사진과 글로 자주 만들어져 유포되곤 한다.
예를 들어 운동권 출신으로 특전사에 다녀온 과정, 구치소 수감 중 사법고시에 합격한 일화, 대법원 재판까지 가게 된 ‘양산집 처마게이트’, 대통령비서실장 시절 과로로 이가 다 빠진 에피소드 등이 대표적으로 회자되는 미담이다. 자연스레 497세대의 지원을 받은 문 전 대표는 ‘원칙을 지키는 청렴하고 능력 있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된 것이다. 심지어 온라인에서 그의 별명도 일본 만화 ‘원피스’의 멋진 캐릭터인 ‘명왕’ 혹은 ‘금괴왕’이다. 40대 키덜트 세대가 부여한 최고의 찬사인 셈이다.
‘1970년대 초·중반 태어난 40대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진보적인 세대….’(통계청 ‘2016년 사회동향보고서’)
10여 명의 대선후보군 가운데 3040세대가 문 전 대표에게 50% 가까운 ‘몰표 지지율’을 보이는 것은 우리나라 선거 역사상 전례 없는 특이한 현상이다. 촛불집회와 탄핵이라는 역사적인 이벤트의 효과라는 점을 감안해도 마찬가지다.
497세대가 사실상 ‘文 옹립’ 중심
476세대가 진보적이라는 얘기는 각종 통계자료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응답하라 1994’ 세대(1969~74년생)는 한 해 100만 명을 넘나들 정도로 출생자가 많았던 ‘2차 베이비붐 세대’다. 문화적 혜택은 충분히 누렸지만 어릴 적부터 치열한 경쟁에 노출된 세대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사회에 진출해서는 386선배에게 승진 기회가 막히고, 부동산가격 급등으로 자산 형성에도 성공하지 못한 일종의 낀 세대가 돼버렸다. 결과적으로 빠른 성공을 기반으로 서둘러 보수화된 선배들과 정치관 측면에서 큰 간극이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497세대’의 정치 의식은 문 전 대표의 ‘공정한 사회’에 가깝다는 얘기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1970년대 출생자는 20대 시절 외환위기, 30대에 글로벌 금융위기(2008)를 겪으며 신자유주의적인 사회 변화에 비판의식이 강해진 세대”라고 분석했다. 이번 대선에서 강도 높은 재벌개혁을 요구하거나 남북교류의 빠른 재개에 찬성 의견이 많은 세대도 바로 497세대다. 이번 정국의 키워드인 ‘특검 수사기간 연장’에 대한 의견만 살펴봐도 50대는 60% 찬성에 그쳤지만, 40대는 73.2%(2월 16일 리얼미터 조사)였다. 따라서 497세대는 안 지사의 ‘선의’ 발언을 ‘촛불에 대한 배신’ ‘일종의 변절’로 규정하고 맹렬하게 공격한 중심 세력이기도 하다.
정치·경제적 해석 외에도 정보화 시대의 첫 세대로서 탈권위주의 문화를 수용한 점도 386세대와는 큰 차이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40대를 ‘키디(Kiddie)’ 혹은 ‘키덜트(Kidult)’라는 신조어로 해석한다. 아이(Kid)이자 동시에 아버지(Daddy)와 비슷한 감수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꼰대 문화’를 벗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추구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꾸준히 진보적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세대 전쟁처럼 보일 정도로 친노 내부의 갈등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실제 정책적으로는 큰 차별화를 이루기 어려울 것이란 비관론도 있다. 공희준 문화평론가는 “3040세대는 상대적으로 참여정부의 기억이 희미한, 정확히는 참여정부의 정책 실패를 생활인으로서 경험하지 못한 세대”라면서 “만약 친노진영이 차기 정권을 잡은 뒤 또다시 실패한다면 497세대도 386세대처럼 보수화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양 세력의 타협은 의외로 쉬울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정권교체’의 열망이 워낙 거세기 때문. 그러나 497세대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될수록 다른 세대와의 거대한 정치적 간극은 차기 정부에서 갈등의 불씨가 될 것이란 전망도 흘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