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희 이화여대 총장이 최순실 딸 정유라의 입학 및 학사 특혜 혐의로 불명예 퇴진하자 이화여대가 재발을 막기 위한 카드로 총장 직선제를 들고 나왔다. 계속 간선제로 총장을 선출하면 이사회의 입김으로 제2의 최경희 총장이 나올 수 있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또 총장 선출 문제로 정부와 갈등을 빚던 일부 국립대도 현행 간선제 대신 직선제를 채택하겠다고 나섰다. 학생들은 총장 직선제의 경우 학생의견 반영비율이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직선제를 채택하면 대학이 과도하게 정치화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1996년 이후 이화여대는 줄곧 간선제로 총장을 선출해왔다. 총장후보추천위원회가 선출한 후보 가운데 한 명을 이사회(국립대는 교육부)가 최종 임명한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21일 이사회가 최경희 총장의 사표를 수리한 뒤 총장 직선제 논의가 시작됐다. 교수, 교직원, 학생 등 대학 구성원이 직접선거를 통해 총장을 선출하자는 것이다. 그 전날인 20일 이화여대 교수비상대책위원회는 개교 이래 첫 총장 해임요구 집회 현장에서 “작금의 사태가 발생한 근본적 원인은 사실상 재단이 지명하는 인물이 총장으로 선출되는 의사결정 구조 때문”이라며 학내 구성원의 의사를 충실히 반영하는 총장선출제도 마련을 이사회 측에 요구했다.
총장 직선제, 만능열쇠 될 수 있나
1987년 대학민주화 열풍을 타고 들불처럼 번졌던 대학총장 직선제는 2011년부터 모습을 감췄다. 교육과학기술부(현 교육부)가 이를 없애려 했기 때문. 교육과학기술부는 총장 직선제 때문에 학내 선거운동이 과열돼 대학이 정치화된다는 이유로 국립대에 간선제로 총장을 선출할 것을 권고했다. 게다가 정부는 간선제를 채택한 국립대를 ‘구조개혁 중점 국립대학’, 즉 부실 국립대 지정에서 제외하는 유인책을 펴기도 했다. 결국 부산대를 제외한 모든 국립대가 총장 직선제를 폐지했다.하지만 총장 간선제에도 문제는 있었다. 정부가 필요 이상으로 총장 선임에 개입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실제로 교육부는 간선제 투표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입맛대로 총장을 임명하려고 했다. 2014년 6월 경북대는 투표를 통해 1순위 후보로 선출된 김사열 교수를 교육부 장관에게 추천했다. 그러나 교육부는 7월 후보 재추천 요청 공문을 보냈다. 이에 경북대는 10월 재투표를 거쳐 김사열 교수를 다시 추천했지만 교육부는 2년간 총장 임명을 미뤄오다 2016년 12월 김사열 교수 대신 2순위 후보였던 김상동 교수를 임명 제청했다.
사립대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2014년 12월 대한불교조계종 종립대학인 동국대에서는 3명의 총장 후보 가운데 2명이 사퇴해 종단 측 인사인 보광스님이 총장으로 선출됐다. 학내 선거에서는 김희옥 전 총장이 가장 많은 표를 받았으나 종단에서 총장 연임에 불편한 기색을 보인 것. 이에 김 전 총장은 “종단 내외의 뜻을 받아들이겠다”며 사퇴했다. 뒤이어 3위 후보였던 조의연 교수도 종단의 선거 개입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후보 사퇴를 선언했다.
간선제의 문제점이 계속 지적되자 각 국립대 내부에선 이화여대를 따라 총장 직선제를 도입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1월 17일 고성보 제주대 교수회장은 교수회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간선제인 총장 선출방식의 개편을 위해 제주대 로스쿨에 용역을 의뢰했다”고 밝혔다. 고 교수회장은 “현재의 총장 간선제는 교육부가 막대한 재정 지원 권한으로 대학을 통제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주장했다. 김상동 경북대 총장도 2월 2일 기자간담회에서 “대학이 발전하려면 자율성이 중요하다. 현재 교수회에서 대학 자율성 확보를 위한 특별위원회(특위)를 구성해 총장 선임 과정을 검증하고 있는데 특위에서 총장 직선제를 채택한다면 수용할 의사도 있다”고 밝혔다.
제도보다 중요한 것은 학내 의견 반영
그러나 총장 직선제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사립대 교수는 “일본을 제외한 대다수 국가에서도 연구기관인 대학이 정치화되는 것을 우려해 간선제로 총장을 선출한다. 현 간선제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직선제 도입이 해결책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은 주립대와 사립대 대부분이 간선제로 총장을 선출한다. 독일이나 프랑스 등 유럽권에서도 직선제보다는 학내 단체 대표자만 모여 총장 선거를 치르는 간선제가 주류다.
다만, 해외 각국의 총장 간선제는 한국과는 다르다. 한국의 간선제는 일부 교수와 이사회 구성원이 모여 선출한다. 하지만 미국, 독일, 프랑스의 총장 간선제는 선거를 실시하는 대표자가 학내 구성원의 의견을 고르게 반영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미국 사립대는 교수, 학생, 교직원, 학부모, 동문회로 이뤄진 ‘총장선출초빙위원회’에서 공개적으로 총장 후보를 모집하는 방식이다. 이들을 대상으로 총장선출초빙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총장을 선출한다.
독일은 학생 대표, 교수, 전문 연구원, 외부 인사로 구성된 ‘총장선출준비위원회’가 1차 후보를 고른다. 그 후보들을 대상으로 대학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대학평의회에서 총장을 선출한다. 대학평의회는 교수, 학생, 교직원 등 다양한 학내 구성원의 대표자로 구성돼 있다. 프랑스도 대학생활평의회를 통해 총장을 선출한다. 이때 학내 구성원의 의견 반영비율은 교수 40~45%, 교직원 10~15%, 학생 대표 20~30%, 외부 전문가 20~30% 등으로 의견을 고르게 반영하고자 노력한다.
이화여대 이사회는 1월 16일 총장 직선제 내용을 담은 ‘총장 후보 추천에 관한 규정’ 제정을 승인했다. 이 규정에 따라 직선제 방식으로 총장을 선출하면 교수와 교직원, 학생, 동문의 투표 반영비율은 100대 12 대 6 대 3이 된다. 이에 학생들은 교수와 교직원, 학생들의 의견 반영비율이 같아야 한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이화여대의 학생단체 연합체 ‘이화여대 중앙운영위원회’는 2월 8일 본관 앞에서 ‘학생의견 반영된 민주적 총장 선출을 위한 이화인 집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우지수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은 “그동안 총장 직선제를 실시한 학교에서 문제됐던 교수 간 파벌 싸움 및 정치화 현상은 교수들의 투표 반영비율을 낮추면 해결될 문제다. (이화여대) 이사회와 교수들은 학생을 단순히 교육의 객체가 아니라 학내 구성원 중 하나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성국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학생이 학교의 주인’이라는 학생들의 생각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총장 선출에서 학생이 교수와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어렵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과 학문 연구를 동시에 하는 만큼 교수가 학생에 비해 학교에서 담당하는 구실이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