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스물일곱 살 김민기는 인천 부평시 한 공장에 위장취업했다. 서울대 재학시절 만든 노래 ‘아침이슬’을 비롯해 모든 노래가 금지곡 판정을 받아 강제 입대했다 제대한 직후 일이다. 그보다 한 살 어린 박근혜가 영애로 퍼스트레이디 노릇을 하던 때이기도 하다. 그와 함께 일하던 노동자는 모두 가난했다. 제대로 결혼식을 올릴 여유도 없었지만, 지금보다 어쨌든 혼인율이 높았을 때다. 어려운 처지의 동료들이 모여 합동결혼식을 올렸다. 김민기는 그들을 위해 노래 한 곡을 썼다. 제목은 ‘상록수’. 이 노래는 이듬해 그의 영원한 페르소나나 다름없는 양희은의 앨범에 실렸다. 제목은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으로 바뀌었다.
‘아침이슬’은 1970년대 한국 청년문화의 상징이 돼 암암리에 불리다, 87년 6월 항쟁의 광장에서 100만 목소리로 합창됐다. 그때 서울시청 근처에 있던 김민기는 그 거대한 합창을 듣고 ‘이 노래는 더는 내 노래가 아니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아침이슬’에 ‘상록수’가 더해진 건 우리가 외환위기로 신음하던 1998년이었을 것이다. 박찬호와 박세리가 우리의 등대 같던 그때 ‘상록수’는 공익광고 배경음악으로 쓰이면서 강산에의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과 함께 온 국민에게 힘을 주는 노래에 등극했다.
격려는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참신함이 됐다. 2002년 대통령선거(대선), 노무현 당시 대선후보의 ‘기타 치는 대통령’ 말이다. 그 참신함은 또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거대한 애도가 됐다. 2009년 5월, 노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광장에선 그때 그 광고가 다시 한 번 상영됐다. 눈물은 바다가 됐다. 그 자리에 양희은이 조용히 올랐다. 그는 ‘상록수’ 한 곡을 부르고 내려갔다. 나는 그때, 숨이 막혔다.
150만 명이 청와대를 둘러쌌던 11월 26일, 서울광장에서 광화문광장까지 걸어가는 길은 지난했다. 걷는다기보다 떠내려간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만큼 많은 사람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키가 작은 탓에 앞사람의 어깨와 머리가 시야를 전부 가렸다. 10초에 한 걸음을 걸었다. 서울광장에서 출발할 때는 안치환이 노래하고 있었다. ‘자유’로 시작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부른 그는 마지막에 ‘마른잎 다시 살아나’를 부르고 무대에서 내려갔다. 그의 공연이 끝나고 사회자 발언이 이어졌다. 나는 코리아나호텔 근처에 멈춰 서 있다시피 인파에 갇혀 있었다. 그때 노래가 흘렀다. ‘아침이슬’이었다. 그간 광장에서 들었던 누구의 어떤 노래보다도 정확했다. 광장 무대의 음향시설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다. 모니터 환경도 썩 훌륭하지 않다고 들었다. 그래도 모두가 열악함을 감수하고 무대에 오른다. 그런 열악함 속에서 나올 수 있는 노래가 아니었다. 당연히 주최 측에서 음원을 틀어놓은 줄 알았다. 150만 명이 따라 부르기에 이만큼 좋은 곡이 또 어디 있겠는가. 노래가 끝날 무렵에야 광화문사거리까지 왔다. 사통팔달 길목인지라 움직임에 여유가 있었다. 무대가 보였다. 누군가가 서 있었다. 화면을 보니 양희은이었다. ‘행복의 나라로’를 부르고 있었다. 세상에, 저 환경에서 저렇게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가 가능한가. 예고되지 않은 무대였다. 그렇기에 더욱 놀랐을 것이다. 음원이라 생각했는데 라이브였기에 더더욱 놀랐을 것이다.
양희은은 어떤 멘트도 하지 않고 그다음 곡을 불렀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로 시작하는 그 곡, ‘상록수’였다. 전인권도 부른 곡이다. 하지만 150만 명 인파와 함께 듣고 보는 ‘상록수’에 모골이 송연했다. 건국 이래 최대 인파가 따라 부르기에 더더욱 그랬다. 마지막 후렴구 직전 양희은은 가사가 아닌 한마디를 했다. “더 큰 목소리로!” 그리고 광장이 울렸다. ‘깨치고 나아가/끝내 이기리라.’ 나는 그때, 다시 한 번 숨이 막혔다. 호주머니와 신발 속에 넣어둔 핫팩보다 몸이 더 뜨거워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 광장에서 청와대를 향해 이 노래를 부르는 일이 더는 없기를. 1998년, 그리고 2002년의 ‘상록수’처럼 희망으로서 이 노래를 듣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