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쓴 이유가 뭡니까.”
“북핵 문제가 지금처럼 흘러가서는 안 되겠기에….”
“책을 펴낸 뒤 일부 내용(2007년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표결 때 우리 정부의 ‘기권’ 결정과정에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의 역할)이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됐습니다.”
“그 얘기가 본질은 아니에요. 부분이 아니라 책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좀 봐줘요. 자세한 얘기는 좀 지나서 합시다. 지금은 (인터뷰가) 곤란합니다. 이해해주세요.”
(10월 18일 오후 ‘주간동아’와 통화 내용)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최근 펴낸 책 ‘빙하는 움직인다’(창비)가 정국을 들썩이고 있다. 책 내용 가운데 일부, 특히 더민주 문재인 전 대표가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표결 때 우리 정부가 기권으로 입장을 정하는 과정에서 어떤 구실을 했는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 새누리당 일각에서는 ‘북과 내통했다’ ‘북의 결재를 받았다’며 총공세를 펼치고 있다.
새누리당 측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송 전 장관은 “새누리당이 대북정책에서 뭘 잘했다고 과거를 뒤집는 데 초점을 맞추느냐”고 지적했다. 10월 18일 그가 총장으로 재직 중인 북한대학원대학교 출근길에서였다.
“새누리당에서는 이것을 무슨 과거를 캐는 폭로라고 하는데, 새누리당 스스로도 현재 정부가 하고 있는 정책이 정말 실행 가능성이 있는지, 앞으로 전망이 있는지, 지난 9년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했던 것을 지금이라도 한 번 뒤돌아보고 ‘앞으로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해야지), 그렇지 않고 과거 폭로 어쩌고 하는 것은 국가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송 전 장관은 ‘빙하는 움직인다’ 서문에서 책을 펴낸 이유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긴 여정을 거쳐 나는 한반도 문제 해결의 지렛대는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하나로 묶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시 도달했다. 우리는 아직 한 번도 이 지렛대를 사용하고자 제대로 도전해보지 않았다. 이 지렛대는 남북관계와 미·북관계의 정상화를 좌우할 한미동맹이 쥐고 있다. 70여 년에 걸쳐 성숙한 동맹이 이제 한반도 분단과 핵을 넘어 공동의 미래를 열도록 작동시켜야 한다. 그래야 한반도 문제 해결의 문을 열어줄 바람은 불어올 것이다.
‘한미동맹을 지렛대 삼아 미·북관계 정상화를 추구하자’는 그의 집필 의도와 달리 정치권, 특히 여권은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로 여겨지는 문 전 대표의 과거 행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0월 18일 ‘주간동아’와 통화 말미에 송 전 장관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봐달라”고 여러 번 당부했다. 마치 꼬리가 몸통을 흔들 듯, 전체 560쪽 분량의 책 가운데 ‘북한 인권, 흔들린 원칙’(446〜454쪽) 부분만 부각되는 상황이 못마땅한 듯했다.
“그 얘기만 하려고 책을 낸 게 아닌데….”
송 전 장관은 도대체 이 책에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책 제목은 왜 ‘빙하는 움직인다’로 정했을까. 그의 책을 일독했다. 정치권에서 논란이 크게 일면서 이 책은 출간 당일 주요 서점에서 모두 팔려나갔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2쇄가 시중에 유통됐다.
한반도는 70년 넘게 냉전체제 속에 갇혀 있다. 이 체제는 마치 거대한 빙하처럼 우리를 덮고 있다. 그 표면의 중심에는 북한 핵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모두가 체념상태에 빠졌고, 북한이 2016년 9월 5차 핵실험까지 감행하자 이제는 무한 군비경쟁을 불가피한 선택으로 간주하려 한다. 동북아 군비경쟁의 1차 피해자는 한반도였다. 우리는 이런 긴 역사의 교훈에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중략) 우리는 불가항력처럼 보이는 ‘분단과 핵’을 움직일 지렛대를 만들 수 있다. 북한이 줄기차게 원하고 중국도 일관되게 희망하는 북·미 수교와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이 바로 그 지렛대이다.
“누구도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1975년 외교부에 들어가 33년간 국가안보와 통일외교 업무를 담당해온 송 전 장관은 한반도 분단과 북핵 해결을 위해 ‘북·미수교와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동북아 국제정치에서 부조리의 현장은 한반도다. 분단의 근원적 책임이 있는 나라나 분단을 실행한 나라들 모두가 공개적으로는 한반도 통일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 아닌 누구도 문을 열어줄 수 없다. 한국이 핵을 넘어 통일로 가는 문을 열 지렛대를 받치고, 주변국들이 힘을 보태게 해야 한다. 2년마다 선거를 통해 정책을 조정하는 미국과 보조를 맞추면서, 한반도는 결코 다른 나라의 영향권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중국을 설득하고, 세상에 무슨 일이 있어도 정권을 유지하겠다는 북한을 품어야 그 문이 열릴 것이다. 그리고 우리 내부의 집단적 지혜와 한계를 정하지 않는 인내가 받쳐주어야 한다.
그는 책에서 대북정책과 관련해 지금까지 나온 방안 가운데 가장 유용한 협상의 틀은 6자회담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송 전 장관은 1999년 제네바 4자 평화회담 대표로 참가한 것을 비롯해, 2005년에는 베이징 6자회담의 한국 측 수석대표로 9·19 공동성명을 도출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이명박 정부 이후 지난 8년간 6자회담은 무용론이 대두될 만큼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그는 ‘누구도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며 여전히 6자회담의 효용성을 강조하고 있다.
2016년 초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로켓 시험 발사 후 채택된 유엔안보리 결의 2270호도 대북 제재와 병행하여 6자회담 재개와 9·19 공동성명의 이행을 강조하고 있다. 누구보다 북한의 명줄을 쥐고 있는 중국이 원하는 것이다. 이 성명은 현재의 악화된 상황까지 포함하여 다룰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송 전 장관은 북한과 대화채널을 모두 막아놓은 채 제재만 해서는 결코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특히 국내에서 크게 논란이 되고 있는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문제에 대해서도 신중한 접근을 주문했다.
2016년 들어 우리는 북한 핵 문제 해결의 길이 벽에 부딪혔다고 판단하여 핵을 운반하는 도구인 미사일의 방어수단, 즉 사드 배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북한 핵의 위협을 느끼는 한국으로서는 여러 방편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지만, 사드를 실제 배치하기 전에 북핵 문제에 대한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협상의 문을 먼저 열어야 한다. 북핵 문제 해결 노력이 진전되면 사드 배치의 필요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특히 송 전 장관은 사드 배치가 오히려 중국을 개입하게 해 북핵 협상을 어렵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사드를 실제 배치하면 중국을 개입시켜 북한 핵을 협상으로 해결할 여지는 더욱 좁아지고 반대로 북한의 행동반경은 커질 것이다. 중국이 한국에 배치된 사드를 철수시키기 위해서도 북한의 핵 개발을 억제할 것이라는 기대는 현실성이 약하다. 사드 배치를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위협 하에 움직이려는 것은 굴복이 되기 때문이다. 사드의 배치 가능성을 남겨두는 것과 실제 현장에 배치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한국 외교의 핵심은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퇴로가 없는 선택을 강요받지 않도록 한반도 정세를 관리하는 데 있다. 쉽지만 돌아오지 못하는 위험한 다리부터 건너는 것은 한국이 택할 길이 아니다.
북핵 위기가 현실 문제로 다가온 지금 시점에 그럼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송 전 장관은 ‘그래도 협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 한반도는 냉전의 바닥에 다가가고 있다. 힘의 균형에 의해 간신히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소극적 평화가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고 협력을 통해 함께 잘살 수 있는 적극적인 평화로 전환시켜야 한다. 적대적 상태에서도 서로에 이익이 되면 협상을 개시해야 한다. 협상은 작은 성공에서 시작해서 큰 성공으로 이어가는 것이다. 그 과정을 시작해야 한다.
2013년 12월 박근혜 정부 초기 송 전 장관은 ‘신동아’와 인터뷰에서 “우리는 ‘큰 장사’를 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강조한 바 있다.
“남북관계를 풀어나갈 때는 반드시 주변 4강(强)과의 함수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우리가 남북관계를 주도하면 4강에 대한 우리의 목소리가 커진다. 반대로 남북관계가 막히면 우리 입지가 위축된다.”
10월 한반도는 북핵 위기로 차가운 기운이 감돌고 있다. 이대로 한반도는 빙하기로 접어들 것인가. 송 전 장관은 책에서 ‘교류’와 ‘접촉’을 통해 한반도에 해빙무드를 조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지난 반세기에 걸쳐 한반도 문제에 대해 많은 남북합의와 국제적 합의가 있었다. 그때마다 한반도를 덮고 있는 빙하가 녹아서 분단된 민족의 메마른 토양을 적셔줄 것 같았다. 그런데 빙하는 녹을 듯하다 다시 얼어붙기를 반복해왔다. 거대한 변화의 조류에 둘러싸인 북한이 폐쇄된 독재국가로 먼 미래까지 존속할 수는 없다. 교류와 접촉으로 표면을 녹게 하고 제도적 평화장치를 수립하여 바닥도 함께 미끄러지게 할 때 한반도의 빙하는 움직일 것이다.
문재인 때려 반기문 띄우나? “오해십니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책 가운데 일부 내용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를 공격하는 소재로 사용되자, 일부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송 전 장관이 내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유력 경쟁자인 문 전 대표를 깎아내리려고 책을 냈다”는 얘기가 돌았다. 이 같은 시각에 대해 송 전 장관은 “허허”라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면서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얘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송 전 장관과 반기문 총장은 외교부 선후배일 뿐 아니라, 외교통상부 장관을 앞뒤로 맡은 인연이 있다. 송 전 장관의 전임 외교통상부 장관이 반기문 총장이다. 30년 이상을 한국 외교 일선에서 호흡을 맞춰온 반 총장에 대해 송 전 장관은 책에서 후하게 평가했다. 책 말미에 그는 ‘어떤 난관도 깊은 물처럼 헤쳐나가는 지혜를 보여준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라고 썼다. 이 대목만 떼놓고 보면 송 전 장관이 반 총장 띄우기에 나섰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 맥락을 함께 고려해 읽어보면 ‘반기문 띄우기’란 해석은 설득력을 잃는다.
이 작업(책을 쓰는 일)을 하면서 분단관리와 통일외교에 대해 내 나름의 의식을 갖게 해주고, 또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여러 선배들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많은 가르침을 주신 분들이 있다. 이미 책에서 거명한 분들을 포함해서, 공직자로서 사고와 행동의 표본을 보여준 이상옥 외교부 장관, 전략적 사고로 세계의 창을 통해 우리 문제를 보게 한 고 김경원 대사, 어떤 난관도 깊은 물처럼 헤쳐나가는 지혜를 보여준 반기문 외교부 장관 같은 분들이다.
외교부 선배들을 나열한 이후 송 전 장관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특별히 감사의 뜻을 표했다.
얼굴을 마주한 지 얼마 되지 않고부터 신뢰하면서 일을 맡겨준 고 노무현 대통령을 그 누구보다도 많이 생각했다. 같이 회고해볼 시간을 가질 수 없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만약 이 대목만 부각한다면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 ‘빙하는 움직인다’는 직업외교관으로 평생을 살아온 송 전 장관이 자신의 경험담을 역사적 교훈으로 남기고자 집필했다는 의도가 책 곳곳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뿐 아니라 현 대북정책, 특히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대목도 여럿 나온다. 그럼에도 대통령선거를 1년 2개월 앞두고 출간됐다는 시점의 미묘함 때문에 저자의 출간 의도와 달리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있는 측면이 강하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여러 정치적 질문에 일일이 답하는 대신 “책을 읽어보세요. 책에 있는 그대로입니다”라고 에둘러 답하는 이유가 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