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TV홈쇼핑의 ‘갑질’에 드디어 칼을 빼들었지만 업계 반응은 미적지근하다. 정부는 9월 8일 황교안 국무총리 주재로 국가정책조정회의를 열어 TV홈쇼핑의 불공정거래 행위를 근절하는 내용의 ‘TV홈쇼핑 불합리한 관행 개선방안’을 확정했다. 홈쇼핑업체의 재승인 심사 시스템을 개편하고, TV홈쇼핑에 대한 과징금을 대폭 상향 조정하기로 한 것.
확정된 개선방안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5년마다 이뤄지는 TV홈쇼핑 재승인 시 불공정거래 행위에 대한 심사를 강화한다. 그동안 분산돼 있던 불공정거래 행위 및 납품업체 지원 관련 재승인 심사 항목을 하나로 통합해 재승인 심사 시 ‘과락제’를 적용한다는 방침이다. 기존에는 임의로 커트라인을 결정해 1000점 만점에 650점을 넘으면 문제 삼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심사 전 커트라인을 정해야 한다. 따라서 내년 3월 재승인 심사를 받는 CJ오쇼핑과 GS홈쇼핑은 법 개정이 필요한 개선방안 외 일부 바뀐 기준 점수와 항목 등을 적용받는다.
정부는 그동안 ‘솜방망이’ 처벌이라 비난받아온 과징금 제도에도 손을 댔다. 기존에는 방송법상 업무정지에 갈음해 부과하는 과징금이 1억 원 이내였지만 앞으로는 매출액의 일정 비율을 과징금으로 물게 했다. 또한 불공정거래 시 과거에는 공정거래법에 따라 납품 금액의 2%까지만 과징금으로 징수했지만, 앞으로는 ‘대규모 유통업에서의 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을 적용해 납품 금액의 100%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다. 또한 TV홈쇼핑사의 판매수수료를 매년 공정거래위원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개해 ARS(자동응답시스템) 할인비, 무이자할부비, 사은품, 경품 등 납품업체가 추가로 부담하는 비용이 TV홈쇼핑사별로 얼마인지 비교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방침이다. 또한 정부는 TV홈쇼핑사의 중소기업 제품 편성 비율과 정률수수료 조건의 방송 비율 등을 공개해 납품업체 보호에 힘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퇴출될 수 있다” vs “예상하던 수준”
이날 정부는 “불공정거래 행위를 일삼는 TV홈쇼핑은 퇴출까지 가능하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정작 홈쇼핑업계는 미리 예상했다는 듯 재승인 심사 강화와 관련해 크게 동요하지 않는 모습이다. 정부의 인허가 산업인 만큼 이번 조치를 당연한 처사로 받아들이며 오히려 몸을 사리는 모습이다. TV홈쇼핑 한 관계자는 “그동안 업계 전반에 좋지 않은 관행이 있었다면 이번 기회에 고치는 게 맞다. 정부의 인허가 산업으로서 국민에게 끼치는 영향이 큰 만큼 정해진 법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또 다른 TV홈쇼핑 관계자는 “재승인 심사가 까다로워질 것이란 얘기는 지난해부터 나왔다. 재승인 절차가 바뀌면 바뀐 대로 따라가면 되지 않겠나. 퇴출이란 말은 앞으로 정부가 단속을 강화하겠다는 의지 정도로 판단한다. 재승인을 해주지 않으면 사업 자체를 접어야 하는데, 그럼 납품업체를 비롯해 중소 협력사로까지 피해가 확산되는 만큼 정부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최근 업계 전반으로 번지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영업 환경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한 업계 관계자는 “홈쇼핑업계 전반에 ‘갑을관계’가 심하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홈쇼핑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도 부정적으로 바뀌지 않을지 우려된다. 잘못을 저지른 한 업체 때문에 잘하는 업체까지 한꺼번에 매도되는 건 좀 억울하다”고 말했다.
이는 현재 법적 분쟁 중인 롯데홈쇼핑을 겨냥한 말로, 이번 재승인 심사 강화 개선방안 또한 롯데홈쇼핑의 부도덕한 영업 행태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롯데홈쇼핑은 지난해 재승인 심사 때 허위서류를 제출한 사실이 올해 2월 감사원 감사에서 적발돼 9월 28일부터 하루 6시간(오전 8~11시, 오후 8~11시)씩 6개월간 영업정지를 당했다.
또한 이번 사태는 2014년 검찰 수사로 드러난 롯데홈쇼핑 임직원들의 비리와 연관돼 있다. 당시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직원 10명은 방송 출연과 프라임 시간대 배정 등을 대가로 납품업체로부터 거액의 돈과 고가의 그림, 승용차 등을 챙겼고, 심지어 이혼한 아내의 생활비와 아버지의 도박빚까지 납품업체에게 떠넘겼다. 그럼에도 롯데홈쇼핑은 지난해 4월 유효기간을 2년 단축하는 조건으로 재승인 심사를 통과했는데, 이 과정에서 롯데홈쇼핑은 비리 임원 10명 가운데 대표이사 등 2명을 제출 서류에서 뺐고, 심사 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미래부)가 이를 묵인했다는 사실이 감사원의 미래부 감사에서 드러났다. 2명의 범죄 사실까지 심사에 반영됐다면 재승인받기 어려웠으리라는 게 감사원 측 판단이다. 이 감사를 바탕으로 롯데홈쇼핑은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고, 미래부 직원들에 대한 징계 절차도 진행 중이다.
재승인 심사 개선안은 ‘눈 가리고 아웅’
물론 홈쇼핑업체의 갑질 행태는 비단 롯데홈쇼핑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니다.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A홈쇼핑사는 방송 이후 정산 과정에서 당초 체결한 방송조건 합의서에 기재된 판매 수수료율보다 높은 수수료율로 임의 변경해 39개 납품업체로부터 16억 원 상당의 부당 이익을 취했다. 또 B홈쇼핑사는 146개 납품업체에게 총 판매촉진비용(사은품, 무이자할부 수수료, 모델 출연료 등)의 99.8%(법정 상한선은 50%)에 해당하는 57억 원을 부당 전가했고, C홈쇼핑사는 방송 계약서를 교부하지 않은 채 상품을 제조하거나 수입하게 해 납품업체가 재고 부담을 모두 떠안아야 했다.
현재 업계 관계자들의 시선은 내년에 재승인 심사를 앞둔 GS홈쇼핑과 CJ오쇼핑에 쏠려 있다. 현재 두 업체 모두 미래부에 1차 재승인 관련 서류를 제출한 상태로, 이번 ‘TV홈쇼핑 불합리한 관행 개선방안’ 확정에 따라 서류 내용을 다소 수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GS홈쇼핑 관계자는 “제출 자료나 준비사항과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향후 사업 운영 계획의 경우 정부가 제시하는 기준에 맞추고자 당연히 수정이 있었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CJ오쇼핑 관계자도 “지난 5년간 해온 사업을 정리하는 내용은 달라질 게 없지만,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해당 부서에서 분명 논의가 있었을 것이다. 중소기업 제품 편성 비율 등 정부가 제시한 기준에 맞춰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가 발표한 정보 공개 확대 개선안 중 ‘납품업체 보호지원과 관련된 중요 항목을 공개하겠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홈쇼핑사업은 회사별 설립 목적을 감안할 때 중소기업 편성 비율이 다를 수밖에 없어 동일한 잣대로 판단하는 건 불합리하다는 주장이다. 현재 홈쇼핑 5개사의 중소기업 제품 편성 비율은 GS홈쇼핑과 CJ오쇼핑이 50%대, 롯데홈쇼핑이 65%, 홈앤쇼핑이 80%, 공영홈쇼핑이 100%를 유지하고 있다. 롯데홈쇼핑은 중소기업 육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우리홈쇼핑을 그대로 승계하는 조건으로 인수했고 홈앤쇼핑, 공영홈쇼핑은 당초 설립 목적이 중소기업 육성이었기에 중소기업 제품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업계 한 관계자는 “각 업체의 태생적 한계와 사업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정부가 충분히 고려했으면 한다. 갑질 행태 개선을 중소기업 제품 판매 확대와 동일시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홈쇼핑 납품업체들 또한 정부의 개선방안에 마냥 기대감을 내비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서정민 한국홈쇼핑상품공급자협회 상임부회장은 “과락제를 도입해도 홈쇼핑사는 점수만 맞추면 되기 때문에 그걸 조정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을 제대로 지원하려면 프라임 시간대에 방송을 배정해야 하는데, 개선방안에도 이에 대한 강제성이 전혀 없다는 지적이다. 서 상임부회장은 “중소기업 제품의 방송 비중이 늘어나긴 했어도 홈쇼핑사는 인기 없는 시간대에 몇 번 더 방송하면 그만이다. 따라서 중소기업 제품의 방송 비중을 확대하기보다 프라임 시간대 대기업 제품의 방송 횟수를 제한하는 게 더욱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중소기업 제품의 판로 확대 방안을 적극적으로 마련하겠다고 하지만 개선방안에 실질적인 방법은 한 줄도 언급돼 있지 않다”고 꼬집었다. 납품업체의 재고 부담 완화를 위해 추가 방송을 편성토록 하는 방안 역시 정확한 기준이 적시돼 있지 않아 유명무실해질 공산이 크다는 주장이다.
규제보다 중요한 중소기업 판로 확대 지원
“재고 처리를 위해 방송을 추가로 편성할 경우 판매 가격은 떨어지고 홈쇼핑사에 내는 수수료는 올라갑니다. 납품업체로선 물건을 창고에 쌓아두느니 비싼 수수료를 내고서라도 팔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홈쇼핑사는 어떤 손해도 보지 않아요. 제대로 된 개선방안이라면 이런 세부 내용과 관련해 정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재고 처리 방송 시 수수료를 몇% 이상 올리지 못한다’ 등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명시했어야 한다는 거죠. 그렇지 않고서는 갑을관계 청산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또한 불공정거래 행위를 규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TV홈쇼핑 납품업체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현실적인 지원이 절실하다. 대표적으로 해외 교민을 위한 홈쇼핑 채널 마련을 건의하는 이가 많다. 화장품 납품업체 한 관계자는 “국내 TV홈쇼핑에서 방송된 중소기업 제품을 사고 싶어 하는 해외 교민이 많지만 현지 TV홈쇼핑을 통해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최근 들어 홈쇼핑업체가 앞다퉈 해외 진출에 나서고 있지만 해외 네트워크를 통해 판매되는 국내 중소기업 제품은 매우 적다. 현지에서 생산하는 물건을 주로 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각 홈쇼핑사 MD(merchandiser)들이 해외에서 잘 팔릴 물건이 무엇인지 연구해 중소기업 납품업체에게 판로의 기회를 열어준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히트 상품’ 제조는 홈쇼핑업체 스스로 지금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TV홈쇼핑은 한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리며 승승장구했지만 최근 몇 년 새 급속도로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내수경기 침체로 소비자의 지갑을 열기가 힘들어졌을 뿐 아니라, 모바일 쇼핑 등 유통채널의 거침없는 공세에도 맥을 못 추는 모양새다. 홈쇼핑업체 간 경쟁도 날로 뜨거워지고 있다. TV홈쇼핑 채널 7개에 T-커머스(TV 시청 중 전화 대신 전용 리모컨을 사용해 상품 정보를 확인한 뒤 구매까지 한 번에 마치는 양방향 서비스) 채널 10개까지 합하면 IPTV를 시청하는 가정은 한자리에서 리모컨을 돌려가며 볼 수 있는 홈쇼핑 채널 수가 17개에 달한다. 결국 어려운 환경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려면 홈쇼핑업체 스스로 중소기업 상생 활동에 앞장서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이준기 미래에셋대우 애널리스트는 “홈쇼핑업체들이 모바일 채널 신설, T-커머스 진출 등 다양한 방법으로 경쟁력을 키우려 하지만, 수익 면에서는 TV홈쇼핑의 비중이 크고 트렌드를 선도한다는 측면에서 여전히 TV홈쇼핑만의 강점이 있다”며 “정부의 이번 개선방안 발표를 발판 삼아 도덕성 회복은 물론, 중소기업과 상생에 이바지하고 히트 상품 발굴에 더욱 힘쓴다면 기업의 경쟁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