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후반부터 대학가에 융합전공이 유행처럼 번지자 새로운 이름의 전공이 속속 등장했다. 연세대는 국제학, 일본어학, 중국어학 등 관련 학과를 합쳐 ‘아시아학부’를 만들었고, 중앙대는 컴퓨터프로그래밍과 미디어, 가상현실에 서비스 경영까지 폭넓게 아울러 ‘디지털이미징공학전공’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전공을 탄생시켰다. 세명대는 사회복지학, 건축공학, 생활체육학을 합친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 ‘고령친화융복합학전공’을 개설했다.
문제는 학문 간 융합교육으로 창의적 인재를 길러내겠다며 앞다퉈 개설한 융합전공과목이 관리 부족으로 졸업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각 대학이 관리의 어려움을 예견하면서도 너도나도 융합전공 정책을 도입한 이유는 2010년부터 시행된 교육부의 ‘학부교육 선도대학 육성사업’(ACE사업) 때문이다. ACE사업의 요건을 충족하려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융합전공과목을 개설할 수밖에 없었던 것.
이렇게 만들어진 각 대학의 융합전공과목들은 ACE사업 지원 대상 선정이 끝나는 순간 관심 밖이 돼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기 일쑤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애꿎은 피해를 입는 건 융합전공과목을 신청한 학생들이다. 심지어 수강 신청자가 없어 융합전공과목 자체가 폐강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6주 만에 뚝딱 신설, 수강생 없어 폐강
서울 한 사립대에 다니는 김모(23·여) 씨는 융합전공 3학점 때문에 예상치 못하게 추가 학기를 다녀야 하는 상황이다. 졸업 전 마지막 학기에 들어야 할 융합전공과목이 수강생이 모자라 모두 폐강됐기 때문이다. 이처럼 황당한 일이 생긴 이유는 학교의 관리 소홀 때문이다. 융합전공과목을 상시 관리하는 부서가 없어 학교가 각 학기에 융합전공과목 수강생 수를 제때 파악하지 못한 것. 김씨는 “이번 학기에 해당 융합전공과목을 신청한 학생이 10명도 안 됐는데, 다른 수업과 동일하게 최소 정원 10명을 적용하다 보니 융합전공 전 과목이 폐강됐다”며 “대체할 만한 수업을 찾아봤지만 이미 수강했거나 도저히 시간이 맞지 않는 과목이라 추가 학기를 피하기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이처럼 각 대학이 융합전공을 앞다퉈 만든 원인이 된 ACE사업은 ‘산업 수요에 맞는 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학부교육 선진 모델을 창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교육부의 대학구조개혁 사업이다. ACE사업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대학은 최장 4년간 매해 약 20억 원씩 지원금을 받는다. 교양기초교육을 강화한다는 취지로 시작된 사업이지만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융합교육과정 개발 여부가 ACE사업 지원 대상 선정 평가의 주가 되면서 각 대학은 너도나도 각종 융합전공과목을 개설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일부 대학이 ACE사업 지원 대상 선정이 끝나자마자 기껏 만들어놓은 융합전공과목을 방치하고 있다는 것. 익명을 요구한 지방 한 사립대 관계자는 “지원 대학 선정이 끝나면 홍보 부족 등을 이유로 융합전공과목을 수강 신청하는 학생이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일부 전공은 운영이 불가능할 정도로 수강생이 없어 일반 전공과목으로 대체하는 등 통폐합이 이뤄지는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2014년 이후 ACE사업 지원 대상 선정 평가에서 융합전공 비중이 많이 줄긴 했지만 각 대학의 융합전공과목 개설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이번엔 교육부의 ‘대학 인문역량 강화사업’(CORE사업)이 다시 한 번 융합전공과목 개설을 독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CORE사업은 기초학문인 인문학을 보호 및 육성하고 사회 수요에 맞는 융·복합 인재를 양성하도록 인문계열 학과와 교육과정을 개편하는 사업이다. 사업 규모는 총 600억 원으로, 3월 총 16개 대학이 선정됐다. 올해 처음 시행하는 CORE사업은 3년간 시범적으로 운영되며 학교당 최저 12억 원에서 최고 37억 원까지 지원된다.
문제는 지원금을 받을 16개 대학 가운데 서울대와 서강대, 충북대, 가톨릭관동대를 제외한 12개교가 인문 기반 융합전공 과정을 개설해 사업 지원 대상으로 선정됐다는 점. 게다가 이 사업은 각 대학이 교육과정을 준비할 기간도 턱없이 짧았다. CORE사업 공고가 나간 시점은 지난해 12월 24일이고 마감은 올해 2월 4일이었다. 사업 지원 대학들이 실질적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할 기간은 6주뿐이었다는 얘기다.
“개별 지원 아닌 총괄 지원해야”
각 대학이 융합전공과목을 급조하는 등 정부 지원사업에 목을 매는 이유는 대학 수입이 줄고 있기 때문이다. 학령인구 감소로 신입생이 줄어드는 데다, 2012년 이명박 정부의 ‘반값 등록금 정책’으로 등록금이 사실상 동결돼 대학의 전통적 수입원인 등록금 수익이 계속 감소하고 있다. 8월 9일 대학교육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전국 4년제 사립대의 등록금 수입은 2010년 10조2640억 원에서 2014년 10조3354억 원으로 0.7% 늘었다. 전체 수입에서 등록금이 차지하는 비율인 ‘등록금 의존율’은 2010년 62.6%에서 2014년 54.7%로 7.9%p 줄었다.대학의 부족한 재원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정부보조금이다. 같은 조사에서 사립대 전체 수입 중 국고보조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2010년 13%에서 2014년 19.7%로 6.7%p 늘었다. 국가장학금 예산을 빼고 사립대가 국고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교육부의 대학재정지원사업뿐이므로 대학은 사활을 걸고 교육부의 지원사업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매해 교육부는 새로운 지원사업으로 각 대학을 보조하고 있다. 새로운 지원사업이 과거 지원사업의 취약점을 보완한 내용이라면 융합전공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지만, 시민단체 조사 결과 각 지원사업은 이름만 다를 뿐 세부 내용은 대동소이한 것으로 밝혀졌다.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6월 14일 발표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교육부의 CORE사업과 ACE사업의 평가지표가 교육부의 대학구조개혁 평가지표와 각각 56%, 83% 동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무분별하게 늘어난 융합전공의 폐해 등 최근 대학 교육 문제의 배후에는 교육부의 획일적인 지원정책이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육현장에서도 교육부의 대학재정지원사업과 관련해 원성이 높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6월 21일 전국 대학교수 15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0.4%(107명)가 ‘교육부의 대학재정지원사업이 대학의 교육과 연구 환경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각 대학은 교육부의 대학재정지원사업이 가진 문제점을 보강하려면 제도 수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전국 대학 총장들은 6월 하계 세미나에서 “사업에 선정된 대학에 개별 재정지원을 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본 요건을 갖춘 대학에 일정 수준으로 지원하는 총괄 재정지원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는 내용의 대정부 건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에 교육부 관계자는 “일반 지원사업에 대해 대학들의 요구가 있는 것으로 안다. 지원 예산 사용과 관련해 대학의 자율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대학재정지원사업을 개편하고자 의견을 수렴 중”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