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센 히어로즈 투수 김세현(29)은 프로입단 10년 차인 2015년 9월 갑자기 시즌 아웃됐다. 복통 때문에 병원을 찾았는데, 정밀검사 결과 만성골수성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3개월간 치료받은 후 마운드 복귀에 성공했다. 추석 이전까지 구원 부문 리그 1위(9월 5일 기준 34세이브)로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최고 성적을 기록 중이다. 만성골수성백혈병을 진단받기 전보다 오히려 빼어난 성적을 내고 있어서일까. 일부 팬은 그가 완치된 것으로 오해하지만 그는 여전히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이며 치료를 진행 중이다. 그는 일부 언론과 인터뷰에서도 “수시로 병원을 방문하고 매일 오후 3~4시 치료제를 복용한다”고 밝힌 바 있다.
“정상인 가까운 수명 누릴 수도”
만성골수성백혈병은 혈액 세포의 과다 증식으로 백혈구와 혈소판 수가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이 만성적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혈액암이다. 9번 염색체와 22번 염색체의 일부 유전자가 자리바꿈을 하면서 필라델피아 염색체라는 특징적 유전자 이상 현상이 발생하는데, 만성골수성백혈병은 대부분 이런 이상 현상으로 암세포가 성장하면서 발병한다. 문제는 이러한 유전자 이상을 유발하는 원인에 대해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는 것. 고단위 방사선에 노출된 사람에게서 발생 빈도가 증가했다는 일부 사례만 알려져 있을 따름이다.만성골수성백혈병은 서서히 진행되며 진행 단계별로 만성기, 가속기, 급성기로 구분된다. 만성기에는 피로, 체중 감소, 식욕 부진, 복부 팽만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 가속기에는 필라델피아 염색체뿐 아니라 추가로 염색체의 특징적 유전자 이상 현상이 발생하거나 백혈병 세포가 골수 외 다른 조직기관에 침범할 수 있어 급성백혈병과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 급성기는 만성골수성백혈병이 급격히 진행되는 시기로 각종 감염증에 시달리고 출혈이 빈번하며 폐렴, 호흡 곤란, 어지러움 등과 함께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부위 림프샘이 비대해지는 증상이 발생할 수 있다.
만성골수성백혈병은 피로, 체중 감소 등 만성기에 나타나는 초기 증상이 뚜렷하지 않아 조기 진단이 어려운 질환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신체검사나 혈액검사 결과 우연히 발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만성골수성백혈병은 일부 환자만이 동종 조혈세포이식을 통해 치료가 가능했다. 이후 2001년 경구용 치료제인 티로신 키나제 억제제(Tyrosine Kinase Inhibitor·TKI 제제)가 도입되면서 치료 성과가 획기적으로 향상됐다. 또한 염색체 반응률, 유전자 반응률 등이 더 우수하고 부작용이 개선된 2세대 TKI 제제들이 개발됨에 따라 환자 특성에 따라 치료제를 선택할 수 있게 돼 생존율도 높아졌다.
국립암센터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의 5년 상대 생존율은 2008~2012년 기준 85.5%로 전체 골수성 혈액암 환자의 55.1%보다 높다. 특히 15~34세 젊은 환자는 5년 상대 생존율이 93.1%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철원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과거 만성골수성백혈병은 4~6년간 생존할 수 있는 이른바 불치병이었지만 표적항암제 등 치료기술이 발달해 이제는 치료제 복용만으로도 안정적인 관리가 가능한 질환이 됐다”며 “잘 치료되고 효과가 좋을 경우 수명 또한 정상에 가깝게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가 안정적으로 치료제를 복용하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 가운데 하나는 당뇨, 고혈압 같은 동반 질환이었다. 만성질환을 가진 환자는 TKI 제제를 먹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던 것. 2013년 미국혈액학회(American Society of Hematology·ASH)가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TKI 제제로 1차 치료를 시작한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는 평균 3.3개의 동반 질환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TKI 제제는 동반 질환에 따라 각기 다른 안전성 프로파일을 갖고 있는데, 현재는 고혈압과 당뇨가 있는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에게도 투여 가능한 2세대 TKI 제제를 도입한 상태. 따라서 이러한 환자도 전문의와 상담해 적합한 치료제를 처방받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동반 질환과 만성골수성백혈병을 함께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가능하다.
2세대 TKI 제제 도입으로 바뀐 풍경
정철원 교수는 “만성골수성백혈병은 현재 여러 치료제가 도입된 상태이며, 이 중 치료제에 대한 내성, 동반 질환 등 환자의 특성을 고려해 가장 적합한 약제를 처방한다”면서 “다만 처방받은 치료제는 지침에 따라 제때, 제대로 복용해야 하는 만큼 치료제 복용에 어려움을 겪는 환자는 치료제 변경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전문의에게 해당 내용을 반드시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만성골수성백혈병으로 진료받은 국내 환자 수는 2011년 기준 3400명으로, 연령별로는 △50대가 717명으로 가장 많고 △40대 671명 △60대 594명 △30대 469명 △70대 453명△20대 295명 △10대 이하 104명 △80대 이상 97명 순이었다. 진단 연령이 낮아지고 환자 생존율이 높아지면서 환자 수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2007년부터 2011년까지 4년 동안 중·장년층과 20대 환자 수가 급증했다. 환자 10명 중 4명 이상이 40, 50대였고 20대 환자도 60%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만성골수성백혈병을 장기간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젊은 환자가 늘어나면서 치료에서도 생존을 넘어 김세현 선수처럼 치료와 사회생활 등 일상생활을 안정적으로 병행할 수 있는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됐으며, 실제 그 중요성이 날로 강조되고 있다. 이런 고민을 날려버릴 수 있는 해결사가 바로 2세대 TKI 제제다. 이 약은 식사 여부와 관계없이 1일 1회 복용이 가능해 치료와 일상생활을 병행하는 데 대한 부담이 크게 줄었다.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가 건강한 사람과 다름없는 생활을 유지하고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정철원 교수는 “만성골수성백혈병이 치료제 복용을 통해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질환이 되면서 김세현 선수처럼 진단 전 생활로 성공적으로 복귀하고, 경제활동과 일상생활을 병행하는 환자가 늘고 있다”며 “이러한 사례가 많아질수록 만성골수성백혈병에 대한 환자와 일반인의 편견도 점차 줄어들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