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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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술은 ‘기록의 술’

[명욱의 술기로운 한국사] 150여 개 조선 문헌 통해 제조법 전해져

  • 명욱 주류문화칼럼니스트

    입력2025-08-2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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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로 쓰인 최초 종합 조리서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글로 쓰인 최초 종합 조리서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 술의 가장 큰 특징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기록의 술’이라는 점이다. 한국 술은 수많은 고문헌에 등장하며, 단지 언급되는 것을 넘어 구체적인 제조법까지 전해진다. 특히 조선시대부터는 조리서, 가사서, 농업서, 의서 등 다양한 분야의 기록물에서 술 빚는 법을 확인할 수 있다.

    ‘산가요록’ 등 곳곳에 전통주 흔적

    한국술 고문헌 DB에 따르면 현재까지 150여 개 조선 문헌 기록에서 전통주 제조법이 발견됐다. 고려 문헌 일부에도 술 관련 내용이 등장하지만 세부 제조법까지 포함돼 있지는 않다.

    조선 전기 어의 전순의가 1459년 무렵 집필한 ‘산가요록(山家要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리서다. ‘산가에 필요한 기록’이라는 뜻의 이 책은 농가 생활 전반을 다룬 지침서로 송이김치, 생강김치 등 다양한 김치 제조법을 비롯한 229가지 음식 조리법이 실려 있다. 특히 술을 의약과 식치(食治) 범주에서 기록한 점은 당시 술이 의학적 치료 방법의 일부였음을 보여준다.

    조선 중기 유학자 김유는 전통주 제조법을 ‘수운잡방(需雲雜方)’이라는 기록물로 남겼다. ‘풍류를 아는 사람에게 걸맞은 요리를 만드는 방법’이라는 의미인 이 문헌은 가문과 후손을 위해 음식·술 제조법, 저장법, 약재 활용법 등을 정리해놓았다. 전체 121가지 조리법 가운데 술 제조법이 59가지에 달하며, 상류층 청주부터 민간 탁주까지 폭넓은 주류 문화를 다루고 있다.

    경북 안동장씨 부인이 1670년 무렵에 쓴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음식의 참맛을 아는 방법)은 한글로 쓰인 최초 종합 조리서다. 여기에도 술 관련 내용이 나온다. 146가지 조리법 중 51가지가 술 만드는 방법으로, 재료 배합 및 절기별 제조 방식이 구체적으로 언급돼 있다. 특히 ‘포도주’ 항목이 눈에 띄는데, 서양식 와인이 아니라 쌀과 포도를 반반씩 섞어 만든 한국식 곡주다. 포도 특유의 풍미를 살리면서도 쌀의 단맛을 조화시켜 조선의 개방성과 실험정신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례다.



    음식디미방에 앞서 여성으로 추정되는 신원 미상의 작가가 쓴 ‘주방문(酒方文)’도 대표적인 한글 조리서다. 음식 제조법이 더 많음에도 주방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술이 가장 만들기 어려운 음식이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술은 발효와 숙성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만큼 기술과 경험이 결합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 실학, 과학 분야 지식인도 술에 관한 문헌을 남겼다. 조선 후기 실학자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閨閤叢書)’는 여성의 가사·생활 지식을 집대성한 생활 백과다. 절기 음식과 저장 식품은 물론, 계절과 밀접한 전통주 제조법이 상세히 수록돼 있다. 또 다른 실학자 서유구가 쓴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는 농업·가사·음식 전반을 다룬 대백과사전이며 그중 ‘정조지(鼎俎志)’ 편에 다양한 전통주 제조법과 저장 기술이 정리돼 있다. 동시대 실학자 중 한 명인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청명한 계절인 초봄에 마시는 청명주와 소주의 증류 원리를 빗물 생성 원리에 비유한 기록이 있다. 과학적 비유로 술 빚기를 설명한 보기 드문 사례다.

    여성이 쓴 한글 조리서 큰 역할

    근대 들어서는 1924년 이용기가 펴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이 등장한다. ‘조선에 둘도 없는 새로운 요리 제조법’이라는 뜻의 이 책은 일제강점기에 변화한 식문화를 반영해 전통주 제조법과 일본 청주, 양식 과실주, 개량 소주법을 함께 수록했다. 근대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일본·서양의 주류 문화가 한 권에 공존하는, 시대상을 담은 자료다.

    한국 술 역사가 담긴 조선~근대 기록물 가운데 무엇보다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건 음식디미방과 주방문 같은 한글 문헌이다. 한문에 익숙하지 않던 여성들이 한글로 당시 음식과 술 문화를 기록해놓아 오늘날까지 전통 술 제조법이 잘 전해질 수 있었다. 기록 덕분에 한국 술의 원형이 사라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이 기록들은 새로운 술에 영감이 될 것이라고 본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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