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觀

처절함의 끝에서 만나는 삶의 재건축

장마르크 발레 감독의 ‘데몰리션’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noxkang@daum.net

    입력2016-07-25 16:4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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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사람들이 참 잘 운다. 가족이 죽는 것 같은 극단적 불행이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오열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이 곁에 나쁜 사람도 많고 좋은 사람도 많다. 그런데 실제 그런 일이 우리 삶에서 일어나면 어떨까. 대단한 불행이나 행운을 맞이했을 때 사람들은 ‘극적’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어쩐지 그런 일은 일상이 아니라 허구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 이 표현 안에 담겨 있다. 한 남자가 ‘극적인 불행’을 겪는다. 그것을 일상 언어로 재해석한 작품이 바로 ‘데몰리션’이다.

    ‘데몰리션’을 연출한 장마르크 발레는 매슈 매코너헤이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감독이다. 전작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무너진 삶이 어떤 방식으로 재건축되는지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통해 방탕한 중독자가 어떻게 혁명가로 바뀌는지 보여준 그는 ‘데몰리션’에서는 애도와 도덕의 관계를 재조명한다. 슬퍼하는 행위에도 도덕과 관습, 그리고 윤리와 진짜가 있다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세상을 떠난다. 남편 데이비스(제이크 질런홀 분)는 아내가 운전하는 차에 함께 타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트럭이 덮쳤고 아내는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그는 살아남았다. 의 아버지, 데이비스의 주변 사람들 모두 엄청난 슬픔에 잠겼고, 그를 보면 누구나 다 위로의 말을 건넨다. “힘내” “뭐라 위로할 말이 없어” “너무 슬프지” 등의 말과 함께 세상에 없는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 데이비스는 슬프지가 않다. 다른 사람들처럼 막 눈물이 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절망의 언어가 쏟아지는 것도 아니다. 일상을 똑같이 살려고 하니 도리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한다. 말쑥하게 차려입고 출근하니 ‘큰 충격 탓에 이상 증상이 생겼나 보다’고 여기며 사람들이 슬슬 피한다. 급기야 “나는 하나도 슬프지 않다”고 말하니 장인이 이성을 잃을 만큼 화를 낸다. 하긴 딸을 잃었는데 사위란 사람이 하나도 슬프지 않다고 하니, 이해할 수 있는 일인가.

    하지만 생각해보면 고통이 단수이듯, 슬픔 역시 단수다. 우리는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을 사회적으로 학습한다. 아프리카 한 전통 부족은 자기 몸이 다칠 만큼 뒹굴고 오열한다. 한편 서구 문명권 사람은 대부분 울음을 삼키며 가는 이를 축복하려 한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사람이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 이처럼 몇 개로 수렴되고 요약될 수 있을까. 아픔이 다 다르다면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도 다 다르며, 슬픔을 느끼고 표현하고 극복하는 방식 역시 모두 다 다르지 않을까.



    영화 ‘데몰리션’의 데이비스는 여느 영화 주인공과 달리,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몹시 슬프며 세상을 먼저 떠난 아내를 자신이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사랑했음을 깨닫는다. 아내의 죽음과 동시에 슬픔에 빠진 뒤 차츰 그것을 극복하는 게 아니라, 슬픔에 빠지기까지 지난한 혼란과 방황의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우리도 진짜 슬플 땐 오히려 그 사실을 부정하려 하거나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취급하지 않나. 사고로 죽은 아내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 동전을 넣었는데도 초콜릿을 떨어뜨리지 않는 자동판매기 때문에 화가 난 것처럼 굴지 않나.

    삶을 재건축하려면 파괴가 먼저다. 슬픔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려면 한 번쯤 철저히 망가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망가짐과 복구에 대한 사려 깊은 이야기, ‘데몰리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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