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꼭 실화라야 감동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 ‘히말라야’가 실화임을 표방한 것은 산악인 엄홍길의 이름의 힘을 빌려 좀 더 많은 관객을 모으고자 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내용 가운데 실제와 사뭇 다른 것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어 칸첸중가 산 등반 장면 중 급경사 빙벽 구간 같은 것이 한 예다. 영화의 긴장도를 높이기 위한 그 정도 과장이야 십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만했으면 싶었던 ‘세계적 위업 16좌 완등’ 타령이 반복되는 바람에 속이 거북해졌다. 영화 관객이 벌써 600만 명을 넘었다니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16좌 완등의 대업’을 그대로 믿을 판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왜곡이다.
지구상에 8000m가 넘는 봉우리는 14개도, 16개도 아닌 20여 개쯤 있다. 다만 위성봉, 그러니까 핵심 봉우리 주변의 위성 같은 봉까지 합쳐서 20여 개다. 설악산 대청봉 옆 중청봉, 지리산 천왕봉 옆 중봉 같은 봉우리까지 포함해 8000m가 넘는 것을 모두 헤아려보면 그렇다. 이 20여 개 봉우리 가운데 맹주 격으로 솟은 봉, 그러니까 대청봉, 천왕봉 같은 핵심 봉 14개를 산악인들은 8000m 14좌라 불러왔다.
틀린 말도 아니지만 사실도 아닌
한동안 이 ‘8000m 14좌 완등’은 내로라하는 산악인이 앞다퉈 이뤄내고자 한 지상 명제이자 꿈이었다. 1986년 라인홀드 메스너가 인류 최초로 완등한 이후 무산소 완등, 최단기간 완등 등 마라톤에서처럼 8000m 14좌를 둘러싼 여러 기록이 쏟아졌다. 한국 산악인 엄홍길은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8000m 14좌 완등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위성봉 중에도 독립성이 좀 강한 편인 얄룽캉(2004)에 이어 로체샤르(2007)를 오르고 나서 ‘세계 최초 16좌 완등’을 선언했다.8000m 14좌 완등을 마라톤에 비유한다면 엄홍길의 16좌 등정은 수많은 선수가 경쟁하며 달렸던 42.195km에서 몇km 더, 이를테면 50km 정도까지 혼자 더 달린 것과 비슷하다. 그만큼 더 힘들었을 것이고 ‘최초’라는 수식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16좌 완등을 향해 전 세계 산악인이 경쟁한 결과 엄홍길이 1등을 했다’고 하는 순간 그것은 거짓말이 된다. 애초 어느 누구도 그런 경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8000m 14좌 완등 레이스에서 기록을 다퉜던 다른 산악인들이 2007년 당시 ‘엄홍길 세계 최초 16좌 완등’ 소식을 전해 들었다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어리둥절해했을 것이다. 메스너부터 예지 쿠쿠치카, 에르하르트 로레탄까지 14좌를 완등한 산악인 그 누구도 얄룽캉과 로체샤르까지 마저 등정해 16좌 완등을 이루려고 시도한 적이 없다. 그 대신 이들은 14좌 완등 이후 다른 의미 있는 등반 대상지나 새로운 등반 형태를 찾아 나섰다.
그러므로 외국에선 산악 전문매체건 아니건 16좌 완등을 언급한 곳이 없다. 오로지 한국 언론만 ‘세계 최초’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당시 또 다른 한국인 14좌 완등자였던 박영석, 한왕용은 “뒤통수를 맞았다”며 섭섭해했다. 너도나도 경쟁하는 가운데 엄홍길이 최초로 16좌 완등을 한 것처럼 왜곡한 순간 박영석이나 한왕용은 16좌를 완등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영화 ‘히말라야’가 관객몰이를 할수록 이러한 왜곡이 한국인 뇌리에 사실로 굳어버릴 공산이 커졌다.
박영석, 한왕용, 김재수, 김창호
엄홍길 외 한국인으로 14좌 완등을 해낸 산악인은 박영석, 한왕용, 김재수, 김창호까지 4명이나 더 있다. 이들이 14좌 완등으로 그친 것이 16좌에 오르지 못해서가 아님은 산악인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기자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16좌 도전은 언제 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곤혹스럽고, 설명하자니 구차스럽다며 씁쓸하게 웃곤 한다.한국 산악인이 세계 산악계에서 인정받는 등반을 성취해내려면 진작 14좌 레이스에서 벗어나 좀 더 가파른 벽을 바라봐야 했다. 하지만 ‘세계 최초 16좌 완등’에 휘둘리다 보니 14좌 완등자들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며 등반 후원을 받기가 어려워졌다. 이 대목에서 왜 산악등반의 금메달격인 황금피켈상을 받은 한국 산악인이 아직까지 한 명도 없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한국 산악계는 16좌의 백일몽에서 벗어나야 한다.
2007년 엄홍길이 로체샤르를 올랐을 때 도올 김용옥은 ‘인간으로서 어느 누구도 16좌의 전설을 달성치 못했다’며 자못 흥분한 어조의 칼럼을 썼다. MBC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 엄홍길이 등장했을 때 ‘세계 산악계 공인 최초’라는 자막을 띄웠다. 이것은 제작진의 무지일까, 아니면 의도된 조작일까.
이래저래 ‘세계적 위업 16좌 완등’은 알피니즘의 본산인 유럽이나 미주대륙에서는 자랑이 아니라 망신에 가까워진다. 영화 ‘히말라야’가 여러 나라에 수출된다고 하니 더욱 이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 엄홍길은 강연에서 ‘14좌 플러스 2좌’라 말했다. 하지만 이후로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말이 사라졌다. 엄홍길 대장이란 호칭을 사람들은 대장(大將), 곧 한 무리의 우두머리란 의미로 이해하지만 실은 등반대(登攀隊)를 이끈 인솔자라는 뜻의 대장(隊長)에 불과하다. 후배들에게 떳떳한 대장(大將)이 되려면 스스로 사실 왜곡부터 바로잡아주길 바란다. 영화 ‘히말라야’가 실화라고 강조하지만 않았어도 편안히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덩달아 눈물을 좀 흘렸을 터인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