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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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테크기업 5개가 디지털 경제판 뒤집는다

그랩·고젝·SEA·라인·VNG… ‘아세안 슈퍼앱 전쟁’ 쓴 고영경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21-11-1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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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국제공항에 도착해 바로 ‘그랩카’를 예약한다. 픽업 장소는 6번 게이트. 미리 등록해둔 주소를 클릭해 목적지로 설정하고, ‘그랩리워드’를 사용해 요금 20링깃(약 5690원)을 절약한다. 공항에서 기다리다 그랩카가 곧 도착한다는 알림이 울리면 공항 문을 나선다. 그러지 않으면 후텁지근한 날씨에 금세 땀범벅이 될 것이다. 그랩카 기사는 친절하게 차에 짐을 싣고 에어컨 온도가 괜찮은지 묻는다. 요금은 이미 ‘그랩페이’로 결제했기에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짐만 챙겨 내린다. 그랩 애플리케이션(앱)을 확인해보니 그랩리워드 포인트가 좀 더 쌓여 있다. 피곤하고 귀찮을 때는 배달음식이 제격이다. 그랩 앱을 열어 ‘그랩푸드’로 음식을 주문한다.

    고영경 말레이시아 선웨이대 경영대학 겸임교수가 슈퍼앱 ‘고젝’ 화면을 열어 보이고 있다. [조영철 기자]

    고영경 말레이시아 선웨이대 경영대학 겸임교수가 슈퍼앱 ‘고젝’ 화면을 열어 보이고 있다. [조영철 기자]

    ‘동남아 우버’에서 ‘아세안 만능 플랫폼’으로

    지난 9년간 말레이시아에 거주한 고영경 박사(50·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 및 말레이시아 선웨이대 경영대학 겸임교수)는 ‘아세안의 만능 플랫폼’ 그랩을 한 번 경험한 이상 그랩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베트남 호찌민으로 출장 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랩 앱을 열어 약속 장소로 데려다줄 차를 호출한다. 메시지가 전부 영어로 번역되기 때문에 베트남어를 몰라도 문제없다. 업무를 마치고 다시 공항으로 이동할 때 역시 그랩 앱을 이용한다. 고 박사가 말레이시아 한 대학에 조교수로 부임한 2012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모바일 퍼스트’ 세상이 동남아 전역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2012년 말레이시아에서 택시앱 형태로 출발한 그랩(본사를 싱가포르로 이전)은 2018년 동남아 최초 데카콘(기업가치 100억 달러 이상인 벤처기업)이 됐다. 2021년 6월 기준 동남아 8개국 400개 이상 도시에서 사용하는 앱이 됐고, 누적 다운로드 수 2억 건 이상, 초당 100건 이상 온디맨드(On-Demand) 서비스를 처리하는 그랩의 기업가치는 약 400억 달러(약 47조 원)에 이르며, 연말 미국 나스닥 상장을 앞두고 있다. 그랩은 ‘라이드헤일링’(호출형 승차 공유) 서비스로 시작해 ‘동남아 우버’로 불렸지만 지금은 음식 배달, 장보기, 결제, 송금, 보험, 퀵서비스, 호텔 예약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여러 기능을 한꺼번에 제공하며 우버를 훌쩍 넘어섰다.

    이처럼 아이디 1개로 아침에 일어나 잠들 때까지 늘 이용할 수밖에 없는 ‘머스트 해브 앱(Must Have App)을 ‘슈퍼앱’이라고 한다.



    그랩 결제 모습(왼쪽). 고젝 홈페이지. [GettyImages,고젝 홈페이지 캡쳐]

    그랩 결제 모습(왼쪽). 고젝 홈페이지. [GettyImages,고젝 홈페이지 캡쳐]

    동남아에서는 그랩 말고도 여러 슈퍼앱이 쑥쑥 자라고 있다. 2010년 인도네시아에서 오토바이 택시 ‘오젝’으로 출발한 ‘고젝’은 2021년 e커머스 유니콘 토코피디아와 합병으로 ‘고투그룹’이 되면서 기업가치가 180억 달러(약 21조 원)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SEA’는 2000년 싱가포르에서 온라인 게임 포털 가레나로 시작해 2015년 출시한 ‘쇼피’를 동남아 최고 e커머스 플랫폼으로 키우고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시장에도 진출했다. 또한 디지털 뱅킹을 통해 금융 부문을 강화하고 푸드 딜리버리 사업에도 진출하면서 그랩과 고투그룹이라는 절대 강자가 존재하는 전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2021년 8월 기준 SEA 시가총액은 1663억 달러(약 196조 원)에 이른다.

    모바일 리프프로깅과 슈퍼앱의 탄생

    동남아의 자이언트 테크기업이 된 그랩, 고투그룹, SEA를 추격하고 있는 것이 태국 ‘라인’과 베트남 최초 유니콘 기업 ‘VNG’다. 라인은 한국 네이버가 일본에 론칭한 앱이지만 현재 태국 시장점유율 90%인 국민 메신저로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모바일 게임과 TV, 라인페이, 웹툰, 라인맨(배달 서비스) 등 ‘일상 속 플랫폼’으로 안착했다. VNG는 2004년 비나게임이라는 게임 퍼플리싱업체로 시작해 2012년 모바일 메신저 잘로를 내놓으며 급성장했고, 2018년 유저 1억 명을 거느린 베트남 1등 앱이 됐다. 이처럼 라인과 VNG는 압도적인 메신저 이용자 수를 기반으로 신규 서비스를 추가하며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다. 아직 동남아 8개국을 커버하는 그랩이나 6개국을 커버하는 SEA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두 기업의 비즈니스 포트폴리오와 성장 전략으로 볼 때 ‘아세안 슈퍼앱 5’에 넣어도 손색없다는 게 고 박사의 설명이다.

    아세안 슈퍼앱 5의 공통점은 디지털 세상이 한 발 늦게 찾아온 동남아에서 모바일 리프프로깅(leapfrogging: 개구리 점프)이라는 변화 물결을 타고 현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다. 이들은 해당 지역 사람들의 페인 포인트(pain point)를 찾아내 해결하고, 현지화된 디지털 솔루션을 통해 편리한 고객 경험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성공을 거뒀다. SEA는 게임과 e커머스, 라인은 메신저와 콘텐츠, VNG는 메신저와 게임, 그랩은 딜리버리와 모빌리티, 고투그룹은 인도네시아 핀테크(금융+기술)와 e커머스 모빌리티 부문에서 각각 우위를 점하고 있다.

    라인 메신저(왼쪽). SEA 홈페이지. [라인 홈페이지, SEA 홈페이지 캡처]

    라인 메신저(왼쪽). SEA 홈페이지. [라인 홈페이지, SEA 홈페이지 캡처]

    하지만 각 기업이 지속적으로 신규 서비스를 추가하면서 슈퍼앱 간 경쟁도 피할 수 없게 됐다. 고젝은 라이드헤일링 부문에서 그랩과 치열하게 경쟁 중이고, 토코피디아는 e커머스 부문에서 SEA 쇼피와 대결하고 있다. 또 팬데믹 기간 폭발적으로 성장한 푸드 딜리버리와 디지털 결제는 어느 쪽도 놓칠 수 없는 비즈니스다.

    고 박사는 라이드헤일링은 모빌리티로, e커머스는 물류로, 메신저는 콘텐츠 플랫폼으로 이어지면서 개별 서비스의 시장점유율 경쟁이 여러 섹터에 걸쳐 전선이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세안 슈퍼앱 5가 각각 핵심 서비스로 시장을 선점해간 것이 1차 대전이라면, 금융 부문에서 대결이 2차 대전에 해당한다. 슈퍼앱들은 모바일 지갑, 선불충전금, 결제 서비스로 고객들을 묶어두고 은행보다 편리한 시스템과 접근성을 구축하면서 디지털 금융에 진출했으며, 이제는 금융 전담 자회사를 만들어 투자를 유치하면서 아예 금융기업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다음 전장은 어디가 될까.

    한국과 아세안 자본시장, 대기업과 스타트업을 연구하며 지난 9년간 현지에서 동남아의 대표적 슈퍼앱 기업들의 탄생 및 성장 과정을 지켜본 고영경 박사가 이러한 전망을 분석해 최근 ‘아세안 슈퍼앱 전쟁’을 출간했다.

    하나의 서비스를 하나의 플랫폼에

    플랫폼과 슈퍼앱의 차이는 무엇인가.

    “슈퍼앱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하나의 플랫폼’에서 운영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아이디 1개로 로그인해 채팅하고 게임하고, 페이(pay)를 충전해 쇼핑하고 송금하고 음식 주문하고 택시를 부르는 등 다양한 서비스를 동시에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인 누구나 사용하는 카카오와 네이버는 슈퍼앱인가. 메신저인 카카오톡을 기반으로 카카오택시, 카카오페이, 카카오뱅크, 카카오게임이 있지만 별도 앱을 설치하고 구동해야 사용할 수 있다. 검색 포털로 출발한 네이버는 네이버페이와 네이버쇼핑으로 확장하긴 했어도 이 역시 별개 서비스로 운영되고 있다. 점차 각 서비스와 기능을 카카오, 네이버 플랫폼 안에 연결시키는 슈퍼앱 전략으로 선회하기는 했으나, 처음부터 슈퍼앱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아세안 슈퍼앱 5와 차이가 있다.”

    FAANG(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구글) 같은 글로벌 플랫폼들이 슈퍼앱으로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뭔가.

    “다른 분야로 진출하려 해도 이미 그 시장에 강력한 플레이어들이 있어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이다. 넷플릭스의 전 세계 가입자가 2억 명이 넘지만 넷플릭스가 없다고 불편해서 못 살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동남아 그랩이나 중국 알리페이가 하루라도 작동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어렵다. 이것이 슈퍼앱이다.”

    로컬라이제이션을 넘어 컬처럴라이제이션으로

    아세안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동남아는 지리적 개념이고 아세안은 동남아지역 10개국(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베트남, 태국, 브루나이,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으로 이뤄진 연합체다. 2015년 12월 아세안경제공동체가 출범하면서 유럽연합(EU)과 같은 경제블록이 탄생했다. 6억7000만 인구를 가진 단일시장이 탄생한 것이다. 더욱이 아세안의 중위연령은 28.9세로 40세를 넘은 한국, 일본, 중국, 유럽에 비해 훨씬 젊다. 엄청난 인구수, 낮은 금융 서비스 이용률, 높은 모바일 인터넷 이용률이라는 아세안의 특징을 바탕으로 대도시의 교통체증, 불충분한 대중교통, 높은 은행 문턱, 귀찮은 문자메시지 입력, 온라인 쇼핑 결제 및 배송 문제 등을 해결할 모바일 기반의 솔루션을 제공하는 스타트업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동남아 소비자들에게 원하는 것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방식을 제공하고, 플랫폼 레버리지를 극대화하며, 국경을 넘어 아세안 시장에 진출함으로써 성공을 거뒀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여전히 동남아 하면 우리보다 조금 못살고 여행하기 좋은 곳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 시각으로 동남아를 바라보니 기회가 보이지 않는다. 이 시장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지, 동남아 디지털기업들이 ‘게임체인저’로서 어떻게 파괴적인 혁신을 일상생활에 가져왔는지, 또 이것이 한국 기업과 투자자들에게 어떤 기회가 되는지 알리고 싶었다.”

    라인이 태국에서 성공한 요인으로 현지화(localization)를 넘어선 문화화(culturalization)를 꼽았다.

    “피상적으로 현지 언어를 이해하고 그들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들 삶에 완전히 스며들어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기준에 맞추고, 현지 인력들이 낸 아이디어를 상품과 서비스에 적극 반영하면서 사실상 현지 기업이 되는 것이 ‘문화화’다. 라인 스티커는 태국인 특유의 제스처와 정서를 담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라인은 온라인에 크리에이터스 마켓을 열어 개인이 만든 스티커를 판매하고 수익의 50%를 가져가게 했는데, 10만 명 넘는 사람이 스티커 마켓에 참여했다. 일부는 대박이 나 방콕에 집을 샀다는 성공신화를 쓰기도 했다. 이처럼 문화화 전략으로 파고든 결과 라인은 외국 기업이 아닌, 태국의 국민 플랫폼이 됐다. 로컬 추적자인 그랩이 우버라는 글로벌 선두주자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현지화 전략 덕분이다. 우버는 사전에 신용카드를 등록해 결제하는 시스템을 고집했는데, 동남아 국가에는 신용카드가 없는 사람이 많아 현금 결제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반면 그랩은 현금이든, 카드든 이용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결제할 수 있게 했고 메시지 및 현지어 번역 서비스, 이동 경로 트래킹, 전화 상담, 운전자 직접 대면 등록 등 이용자 요구를 반영한 서비스들을 도입했다.”

    아세안에 진출하려는 한국 기업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은?

    “너무 베트남에만 꽂히지 마라. 한국에 돌아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먼저 어느 나라로 가야 합니까’인데, 대부분 베트남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진출하려는 나라와 한국을 비교하지 말고, 아세안에서 그 나라가 가진 상대적 지위를 먼저 고려해 그 나라에 필요한 서비스와 상품이 무엇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지 말고 적어도 5년 정도는 바라보고 진출 계획을 짤 것을 권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거의 2년간 해외 출장을 다니지 못한 탓에 한국이 아세안의 변화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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