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 체험과 입체 사운드의 몰입형 극장 통해 실감나는 시간여행
너도 나도 황금을 찾아 광산으로 향하던 식민지 조선시대 재구성
AI 구보씨와 나누는 기묘한 대화
11월 19일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서 만난 미디어아티스트 권하윤의 설치작품 ‘구보, 경성 방랑’ 얘기다. 약 15분 동안 VR로 구현되는 경성을 체험한 관람객들은 큰 만족감을 드러냈다. 30대 회사원이라는 한 관람객은 “일제강점기 경성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영화 ‘암살’ 속으로 걸어 들어간 느낌이었다. 흑색과 백색으로 구현된 100년 전 경성을 유람하다 말미에 손기정 선수를 마주했을 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고 말했다.
일민미술관은 10월 8일부터 100년 전 경성의 흔적을 되살린 전시 ‘1920 기억극장 ‘황금광시대’’(이하 ‘황금광시대’)를 선보이고 있다. 권하윤뿐 아니라 미디어아티스트 그룹 뮌(MIOON), 안무가 이양희, 소설가 조선희 등 다양한 분야의 동시대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황금광시대’는 1920~1930년대 발행된 신문과 잡지의 기록을 통해 100년의 시공간을 이동하며 산책자의 시선으로 잊히거나 삭제된 당대 사건들을 재구성했다. 전시명은 1934년 잡지 ‘삼천리’에 실린 목병정의 글 ‘삭주 금광 채광관’에서 따왔다. 목병정은 당대 조선을 ‘황금광시대’로 정의하며 ‘망치를 든 탐광꾼들이 없는 곳이 없고 양복쟁이, 상투쟁이, 어른, 어린애 할 것 없이 눈코 박힌 사람이 두셋만 모여 앉은 자리에서 금광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곳이 없으리만치 금광열이 뻗치었다’고 표현했다. 1929년 세계 대공황과 더불어 한반도에 전례가 없는 금광 열풍이 불었던 탓이다. 코로나19 사태로 경제가 큰 타격을 받은 상황에서도 주식투자 붐이 일고 있는 현 모습과 얼핏 닮았다.
황금광 시대였던 1926년 광화문 네거리에 지어진 후 증축을 거친 일민미술관은 그동안 일반 관람객에게 공개하지 않았던 공간을 이번에 전시장으로 활용해 한 세기 전 경성의 흔적을 다양한 예술적 형식으로 보여준다. 반짝이는 귀금속이 진열된 경성의 백화점과 신여성 피아니스트 윤성덕이 거주하던 문화주택, 자유로운 몸짓과 대화가 오가는 밤의 카페, 사회주의 여성들이 모여 글을 쓰던 잡지사와 정간, 폐간을 오가던 신문사, 신문물에 맛들인 청춘 남녀가 즐겨 찾던 종로거리, 조선 민중의 공예품과 서화 작품들이 보관된 진열실까지 경성의 풍경과 삶을 품은 기억극장을 따라 10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VR와 AI 문학봇, 입체 사운드로 체험하는 경성
뮌의 설치작품 ‘픽션 픽션 논픽션’. [일민미술관 제공]
‘클럽 그로칼랭’ 전시 공간. [지호영 기자]
잡지 ‘신여성’의 1920년대 편집실을 재현한 ‘세여자방’. [지호영 기자]
일민 김상만 선생의 집무실을 보존한 일민기념실. [지호영 기자]
‘구보, 경성 방랑’ 전시 공간. [지호영 기자]
수장고에서 나온 일민 컬렉션
일민미술관 수장고에서 나온 일민 선생의 컬렉션. [지호영 기자]
회전목마, 회전그네,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고미술품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과거 조선의 장인과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민중의 체취를 먼 옛날의 것이 아닌, 지금 우리의 삶과 연결된 것으로 더욱 가까이 느끼게 한다. 도자, 서화, 목공예 등 일민컬렉션의 토대를 이루는 고(古)미술품들은 일민 선생이 6·25 전쟁 이후 40여 년간 장구한 시간을 두고 한 점, 한 점 정성껏 사 모은 초기 소장품들이다.
이번 전시는 조선의 이름 없는 장인들이나 이들의 솜씨를 즐기던 옛 선비와 규방 여인들의 애착이 담긴 소박하고 대중적인 작품들도 선보인다. ‘클럽 그로칼랭’에 전시된 김환기, 박수근, 천경자의 회화 작품을 포함해 100여 점의 일민컬렉션이 공개되는 것이다. 조주현 일민미술관 학예실장은 “옛 공예품의 표면에 남겨진 민중의 흔적을 통해 관람객들은 100년의 시공간을 횡단하며 역사 이면에 자리한,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12월 27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