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동아DB]
9월14일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가 정부여당에서 추진하는 법안에 원칙적 찬성을 표명하자 재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튿날 전경련 부회장이 김 위원장을 찾아가 읍소를 했다고 한다. 당내에서도 반발의 목소리가 나왔다. 김병준 전 비대위원장은 “함부로 찬성하면 안 된다”고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대놓고 말은 못해도 이를 ‘당의 정체성’의 문제로 여겨 속으로 불만을 품은 의원들도 많을 게다. 진정한 저항의 지점은 여기에 있다.
태극기부대와 통합진보당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오른쪽)이 9월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동아DB]
진보진영도 과거에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진보에서 우파의 아스팔트 부대의 역할을 한 것이 이른바 ‘주사파’ 세력이다. 진보의 이 고질병을 치료해준 것은 새누리당이었다. 그들이 정당해산심판 청구로 통합진보당을 해체시켜 버렸다. 통합진보당과 선거연대를 해왔다고 비난받던 민주당은 이 반자유주의적 광풍에 저항하지 못하고 침묵으로 동조했고, 그 결과 진보진영은 주사파와 강제로 결별하게 된다. 이 사태의 역설은 통진당이 해산함으로써 보수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이념적 무기, 즉 ‘종북 좌파’라는 낙인이 결정적으로 힘을 잃게 됐다는 데에 있다.
방식은 달랐지만 진보에서나 보수진영에서나 극단적인 세력은 주변화한 셈이다. 문제는 보수정당을 지탱해온 또 다른 기둥인 재계의 경우 아스팔트 우파처럼 간단히 선을 그을 수 있는 세력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들은 막강한 재력을 갖고 있고, 광고로 언론에 영향을 행사하여 사실상 보수이념의 생산기지 역할을 해 왔다. 기존 보수의 두 이념 중에서 극우반공주의가 태극기 부대의 정서를 대변한다면, 자유지상주의는 재계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극우반공주의가 이미 힘을 잃은 상황에서 자유지상주의는 사실상 보수에게 남은 유일한 이념인 셈이다.
극우반공주의는 한갓 ‘허상’일 뿐이다. 현 정권의 주류인 586세대는 민족해방계열(NL)운동권 출신이라 하더라도 더 이상 종북 좌파가 아니다. 결국 태극기 부대는 아스팔트 위에서 주사파라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을 쫓고 있는 셈이다. 반면 자유지상주의는 허상이 아니다. 대기업 위주의 시장질서는 한국경제의 엄연한 ‘현실’이다. 게다가 극우반공주의는 한갓 ‘관념’에 불과하나 자유지상주의는 재계의 이해관계라는 물질적 요구의 표현이다. 전경련 부회장이 김종인 위원장을 찾아간 것은 학설에 이견을 제시하는 이론적 행위가 아니라, 재계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물질적 실천이다.
국가와 기업의 존재이유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이 9월21일 기자회견을 열어 이른바 ‘공정 3법’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대한상의]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문제를 올바로 처리하는 방식은 의외로 그동안 줄기차게 김종인 위원장을 비판해 왔던 장제원 의원이 제시했다.
“말로 이미지만 가지려 하는 것은 ‘허세’입니다. 실천을 통해 내용을 채워가야 ‘변화’입니다. 소위 공정경제 3법은 정강정책 개정과 함께 오히려 우리가 먼저 던졌어야 했던 법들입니다. 국민의 힘은 경제민주화를 당의 핵심가치로 내세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을 통해 ‘공정위 전속 고발제 폐지’, ‘다중대표소송 제도 단계적 시행’, ‘총수 일가 부당거래 규정 강화’ 등 선명한 ‘경제민주화’ 조치를 약속한 바 있습니다.”
그의 발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다음 대목이다.
“재계에서는 ‘자회사에 대한 경영간섭과 소송남발 등의 부작용을 낳을 것’이라 반발하고 있지만, 궁색한 기득권 지키기로 보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다중대표소송’을 제기하기 위한 요건이 까다롭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일본 등과 달리 ‘단독주주권’이 아닌 ‘소주주권’을 도입해 ‘다중대표소송’을 제기할 권한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재계를 향해 생각을 바꾸라고 설득하고 있다. 즉 재계의 나팔수 노릇에서 벗어나 경제와 정치, 혹은 재계와 정계 사이의 건강한 긴장관계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이다.
국가와 기업은 운영의 원리가 다르다. 기업과 정부는 그 목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즉 기업의 목적은 ‘사익’을, 국가의 목적은 ‘공익’을 추구하는 데에 있다. 재계의 특수이익이 늘 국민 전체의 보편이익과 합치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이 매사를 ‘이윤’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정부는 시야를 넓혀 시장 전체, 국가 전체의 공공선을 시야에서 놓쳐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기업들이 요구한다고 환경규제를 없애서는 안 된다. 경제생태계도 마찬가지다. 대기업들의 특수이익이 공정한 시장 질서를 해친다면, 국가에서 나서서 적절히 한계조건을 설정해 줘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산다.
케인즈 하이예크 슘페터
극우반공주의는 중도층이 보수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민주당은 ‘빨갱이’로 몰아붙이고,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은 ‘용공’으로 낙인찍어 적대시해 왔으니, 대중으로부터 고립되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경제의 영역에서 극우반공주의의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자유지상주의’의 관념이다. 시장에 한계조건을 설정하려는 국가의 시도, 사회의 양극화를 해소하려는 국가의 노력을 모두 ‘좌파정책’으로 몰아붙이다 보니, 정권을 잡아도 딱히 할 일이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지 못하고 재벌의 나팔수 노릇이나 하다가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어 버린 것이다.민주당의 경제철학이 시장의 실패를 국가의 개입으로 수정하겠다는 ‘케인즈주의’에 가깝다면, 보수정당의 그것은 모든 것을 시장의 자율적 조정에 맡기라는 ‘하이예크주의’에 가깝다. 보수정당의 브랜드인 줄·푸·세 공약(세금과 정부 규모를 ‘줄’이고, 불필요한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자)은 바탕에 이 자유지상주의 관념을 깔고 있다. 그런데 현재 국민의힘에서 새로 내세운 경제철학은 ‘슘페터주의’에 가깝다. 상법과 공정거래법으로 국가가 나서서 경제의 대기업 집중을 막고 중소기업들이 혁신을 계속하는 데에 필요한 환경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국민의힘 내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보수당의 전통적 관념이 이 변화에 반발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자유지상주의 관념이 거의 보수의 ‘종교’가 되다시피 했다는 데에 있다. 보수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스탠스를 취해 왔다. 즉 시대의 요구에 따라 케인즈주의, 슘페터주의, 하이예크주의 정책을 고루 채택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를 특정 경제철학, 즉 자유지상주의와 동일시한 결과 보수가 정책적 상상력과 유연성을 잃고 스스로 고립되어 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무상급식투표’. 시대정신을 읽지 못한 그는 결국 시장직을 내놔야 했다. 그가 반대했던 무상급식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어도 그의 말처럼 나라 망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최근 그가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다. 상법과 공정거래법의 개정은 “기술적 규제의 찬반의 문제라기보다 기업과 시장을 바라보는 철학의 문제”라는 것이다. 여전히 사안을 선택 가능한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타협 불가능한 ‘이념’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이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의 입장은 아직은 단호해 보인다. “상법·공정거래법은 개정돼야 한다. 다만 그 내용이 어떻게 되느냐는 심의하는 과정에서 찬성할 부분과 반대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상대의 주장 중 합리적 핵심은 취하되, 과도한 부분은 견제하겠다는 입장이다. 이것이 사태의 올바른 대처방식이다.
핵심은 재계의 움직임이다. 전경련에 이어 대한상의와 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도 곧 김종인 위원장을 만날 예정이라고 한다. 실은 여기가 주전장(主戰場)이다. 여기서 밀리면 그동안 국민의힘이 추진해온 개혁은 사실상 의미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아무리 반대를 한들 어차피 민주당에서 단독으로 처리하려 하면 막을 길은 없다. 따라서 상법과 공정거래법의 개정에는 원칙적으로 찬성하되, 개별적인 조항에 대해서는 재계의 우려를 반영하는 식으로 합리적 대응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보수정당이 과연 과거와 달라졌다는 믿음을 국민들에게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