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국민들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사진과 중국산 제품들을 불태우고 있다. [PTI]
인도 공과대학 카라그푸르(Kharagpur) 캠퍼스에 입학한 피차이는 컴퓨터와 무관한 야금공학을 공부했지만, 컴퓨터를 처음 접하고 독학으로 체스 프로그램을 만들 만큼 컴퓨터공학에 푹 빠졌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미국 스탠퍼드대 장학생으로 선발돼 유학길에 올랐다. 스탠퍼드대에서 재료공학 석사 과정을 이수한 그는 반도체 제작 장비를 만드는 회사에 엔지니어로 취직했다.
이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경영학 석사를 마치고 맥킨지 컨설팅그룹에서 반도체 관련 컨설팅을 진행하다 2004년 구글에 합류했다. 그는 인터넷 브라우즈 크롬과 모바일 운영체제(OS)인 안드로이드, 구글 드라이브, 구글 맵 개발을 주도하는 등 고속승진을 거듭한 끝에 2015년 구글 CEO가 됐다. 지난해 12월부터 구글 모기업 알파벳의 CEO도 겸하고 있는 그는 그동안 자신의 모국인 인도에 남다른 애정을 보여왔다. 특히 그는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생각해 인도의 디지털 인프라 개선에 관심을 가졌다.
인도 디지털시장에 뛰어든 구글
코로나19 사태로 각국에서 비대면 경제가 활성화되고 있는 가운데 피차이가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는 등 인도 디지털시장에 뛰어들었다. 피차이의 계획은 모국 발전과 구글의 신시장 개척을 노리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포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7월 13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가진 화상회담에서 “구글 모기업 알파벳이 앞으로 5~7년간 100억 달러(약 12조 원)를 인도에 투입하겠다”면서 “구글의 강점인 인공지능(AI)을 의료와 교육, 농업에 활용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인도의 디지털화를 실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투자는 인도 디지털 경제의 미래에 대한 구글의 신뢰가 반영된 것”이라며 “인도가 다음 혁신의 물결을 이끌 수 있도록 확실히 하는 게 우리의 목표”라고 강조했다. 구글은 앞으로 ‘인도 디지털화 펀드’를 조성해 인터넷 사용 장벽을 낮추고 맞춤형 IT 제품 및 서비스 개발, 중소상인의 디지털 전환, AI 관련 분야 등에 투자할 방침이다.구글이 인도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인구가 13억8000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시장일 뿐 아니라 성장 잠재력이 크고 IT 인력도 많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인터넷 보급률은 85%가량인 반면, 인도는 34%에 불과하다. 중국(65%)과 비교해도 상당히 낮다. 그만큼 큰 기회가 있는 시장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중국 정부가 외국 기업들을 심하게 규제하면서 자국 산업 보호를 우선시하는 반면, 인도 정부는 규제가 거의 없을뿐더러 외국 기업들의 투자에 상당한 혜택까지 제공하는 것도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미국 기업들이 자국과 패권 다툼을 벌이는 중국에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 기업들이 중국에서 사업하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인도 정부가 최근 국경지대인 라다크 지역에서 벌어진 자국군과 중국군과의 유혈 분쟁을 계기로 반중(反中)노선을 분명히 추진하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인도 정부 “중국산 장비 사용 마라”
무케시 암바니 인도 릴라이언스 그룹 회장이 미국 구글의 지오 플랫폼 투자 계획을 밝히고 있다. [JIO]
인도 정부는 6월 29일 틱톡, 위챗 등 59개 중국산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 사용 금지 조치를 내린 데 이어 7월 28일 47개를 추가 금지했다. 또 5G(5세대) 네트워크 구축 사업에서 중국 통신장비 기업 화웨이와 ZTE를 배제할 방침이다. 인도 정부는 국영 통신사 BSNL과 MTNL에 중국산 장비를 사용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특히 인도 국민의 반중 정서가 고조되고 있다. 전인도무역협회(CAIT) 등 민간단체들이 주도하는 중국산 제품 불매운동이 크게 확산하고 있다. 인도 민간단체들은 중국산 제품 중 인도산으로 대체 가능한 제품 3000여 개를 제시하고 2021년까지 중국산 제품 수입 규모에서 130억 달러(약 15조5600억 원)를 줄이는 게 목표라고 밝히기도 했다. 인도의 2018∼2019 회계연도 대중(對中) 무역적자 규모는 536억 달러(약 64조1600억 원)에 달한다.
이번 불매운동 여파로 중국 IT 기업들과 스마트폰 제조업체들이 상당히 고전하고 있다. 시장조사 전문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인도 스마트폰시장에서 샤오미가 30%로 1위였고 비보(17%), 삼성전자(16%), 리얼미(14%), 오포(12%) 순이었지만, 2분기에는 샤오미가 29%로 1위를 가까스로 유지했고 삼성전자가 26%로 2위를 차지했다. LG전자도 상위 5위에 들지는 못했으나 지난 두 달간 스마트폰 판매량이 이전과 비교해 10배나 증가했다.
미국 IT 기업들은 이런 반중 정서를 틈타 인도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다. 구글은 인도 최대 부자 무케시 암바니 릴라이언스 그룹의 디지털 플랫폼 사업 부문인 지오 플랫폼(Jio Platforms)에 40억 달러(약 4조8000억 원)를 투자해 지분 6%를 확보했다. 페이스북, 퀄컴, 인텔도 지오 플랫폼에 650억 달러(약 78조 원)를 투자해 지분 25.2%를 매입했다. 지오 플랫폼은 인도 최대 통신사 릴라이언스 지오와 온라인 유통 서비스 업체 지오 마트 등의 모회사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화웨이와 거래 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릴라이언스 지오를 ‘청정한 통신사(clean Telco)’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마이크로소프트는 릴라이언스 지오와 손잡고 클라우드 플랫폼 애저를 인도시장에 선보였으며, 아마존도 10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애플, 생산기지 脫중국 모색
특히 애플의 최대 위탁생산업체인 대만 폭스콘은 인도 남부에 있는 아이폰 공장의 확장에 10억 달러를 투입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폭스콘이 인도에서 생산하는 아이폰은 400억 달러(약 47조8760억 원) 규모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폭스콘의 중국 전체 생산 규모의 20%에 해당한다. 폭스콘 측은 “인도 생산시설 확장은 생산기지의 탈(脫)중국을 모색하던 애플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고 밝혔다.미국 IT 기업들의 이 같은 대규모 투자는 인도 정부가 모든 중국 투자자에 대해 정부 승인을 받게 하는 등 외국인 직접투자(FDI) 규정을 변경한 이후에 나온 것이다. 중국 IT 기업들이 지난 5년간 인도 IT 분야에 40억 달러를 투자하면서 시장 공략에 나섰지만 국경지역 유혈 충돌, 코로나19 사태 등에 따른 반중 정서로 입지가 크게 좁아지고 있다. 미국 IT 기업들은 그 틈을 메우고 있는 셈이다. 화웨이의 경우 올해 인도시장 내 매출 목표치를 50% 하향 조정하고 현지 직원 60~70%를 감원하기로 했다.
그런가 하면 세계 3대 사모펀드인 미국 칼라일과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 등도 인도시장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칼라일은 최근 인도 억만장자 아자이 피라말의 제약사업 지분 20%를 4억9000만 달러(약 5862억8500만 원)에 인수했으며, 바르티 에어텔의 데이터센터 사업에 2억3500만 달러(약 2812억2450만 원)를 투자했다. KKR도 지오 플랫폼에 15억 달러를 투자했다. 그레고리 지룩 칼라일 아시아 공동대표는 “앞으로 인도의 미디어와 디지털 분야에 추가 투자할 계획”이라며 “다른 사모펀드 운용사들도 중국의 홍콩 국가보안법에 따라 홍콩을 떠나 인도에 대한 투자를 크게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인도 정부는 미국 IT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를 적극 환영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실업자만 1억2000만 명으로 실업률이 27%에 달하는 등 경제악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인도 정부로선 미국 IT 기업들의 진출이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인도와 미국의 관계도 강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 IT 기업의 ‘인도 러시’는 본격화하는 미·중의 패권 다툼으로 앞으로 더욱 크게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인도가 미국 IT 기업들의 새로운 ‘엘도라도(El Dorado)’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