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5일 강원 양구군 푸른솔농원에서 농장주와 서울에서 온 근로자가 함께 사과나무 적과 작업을 하고 있다. [조영철 기자]
서울 강서구에서 괌·사이판 전문여행사를 운영하던 오모(60) 씨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기승을 부리던 2월 말부터 완전히 수입이 끊겼다. 30년 넘게 여행사를 운영해온 그는 “1997년 외환위기도, 2008년 금융위기도 겪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석 달간 사실상 휴업 상태가 지속되자, 지난달 말 오씨는 강원 양구군의 한 사과농장으로 내려왔다. 그가 농장에서 맡은 일은 사과나무 가지에 달린 잔 열매를 잘라내는 적과 작업과 잡초 제거. 하루 8시간 일해 8만 원을 받는다. 숙소와 점심식사는 농장에서 제공한다. 오씨는 “농장 사장이 내게 ‘머리도, 얼굴도 허연데 일할 수 있겠냐’고 했다. 예순 살 되도록 농사일은 해본 적 없지만 깡으로 버텼다. 지금은 사장이 ‘올가을 사과 수확 때까지 있으면 안 되겠냐’고 한다”며 멋쩍게 웃었다.
뜨거운 비닐하우스에서 ‘구슬땀’
코로나19로 일자리를 잃은 도시 사람들이 농촌을 찾고 있다. 휴가가 아니라 단기 구직을 위해서다. 서울시와 경남도 등 지방자치단체(지자체)는 휴업·휴직 중인 도시 근로자와 일손이 부족한 농가를 연결하는 사업에 나섰고, 경북도는 대학생에게 농촌 아르바이트를 소개해주고 있다. 서울시로부터 이 사업을 위탁받은 농업 관련 스타트업 ‘푸마시’는 5월 28일 오씨를 포함해 ‘서울 사람’ 22명을 양구군 농가에 파견했다.6월 15일 오후 3시께 찾은 양구군 사명산 중턱의 푸른솔농원에서는 서울에서 온 신모(58) 씨와 김모(58) 씨가 한창 사과 적과 작업을 하고 있었다. 30도 가까운 낮 기온과 뜨거운 햇살에 피부가 금세 달아올랐다. 신씨는 “사과 열매가 햇빛을 잘 받도록 위로 향한 큰 열매만 남기고 나머지 잔 열매는 다 잘라내야 한다”며 “가지에 난 싹까지 깨끗이 잘라야 쓸데없는 곳으로 영양분이 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신씨는 서울 강서구 한 개척교회의 목사. “코로나19로 신도들의 수입이 감소한 데다, 비대면 예배까지 하게 되면서 헌금이 줄어들었다”는 그는 “용돈이라도 벌자는 생각해 농촌으로 오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 토박이인 김씨는 “처음 하는 농사일이라 낯설었지만, 2주가량 지나니 익숙해졌다”면서 “여기서 배운 기술을 나중에 귀농하면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
6월 15일 강원 양구군 오이농장 비닐하우스에서 서울에서 온 근로자들이 한창 오이를 수확하고 있다. [조영철 기자]
일자리난(亂)을 겪는 청년도 양구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양구군청이 숙소로 제공한 마을회관에서 서울 광진구에 사는 백모(25) 씨를 만났다. 그는 일하던 고깃집이 폐업해 지난해 9월 이후 실업급여로 생활하다 올해 다시 구직에 나섰다. 아르바이트를 포함해 백씨가 취업 지원을 한 곳은 모두 10개. 두 곳으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았다. 하지만 한 곳은 출근 날짜를 무기한 연기했고, 다른 한 곳은 “격일로 일해달라”고 했다. 백씨는 “취업할 데가 마땅치 않아 당장 생활비를 벌 생각으로 이곳에 왔다”며 “농사일 경험은 없지만 젊으니까 ‘한번 해보자’ 싶었다”고 말했다. 매일 새벽 6시부터 정오, 그리고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파프리카 수확 작업을 하는 그는 “20일간 일하는 조건으로 내려왔는데, 더 오래 일하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농번기에도 외국인 근로자 ‘0명’
농촌도 도시 사람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코로나19 사태로 일손이 부족해 몇몇 농가는 올해 일부 농사를 포기하거나 웃돈을 주고 옆 마을에서 일손을 빌려오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4월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709개 전국 농가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60%가 전년 동월에 비해 ‘인력 구하기가 힘들 것으로 예상한다’고 응답했다.외국인 노동력 감소가 가장 큰 원인이다. 2015년 법무부는 특수한 계절에 수요가 집중되는 농어촌 인력난을 해결하고자 3개월짜리 ‘외국인 계절 근로자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각 지자체가 필요한 수의 외국인 인력을 법무부에 신청하면 그만큼의 인력이 입국해 각 농촌으로 파견된다. 올해는 4500여 명의 외국인 근로자 입국이 예정됐지만, 코로나19 사태로 단 1명도 입국하지 못했다.
5, 6월 농번기를 맞은 농가에는 비상이 걸렸다. 일례로 외국인 근로자 70명을 요청한 경북 봉화군은 수박 순지르기(수박의 곁순을 잘라내는 작업)를 할 일손이 부족해 쩔쩔매고 있다. 6월 말까지 수박 순지르기를 해주지 않으면 수박 크기와 당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송대호 봉화마을영농 총무는 “외국인 근로자가 1명도 오지 않아 지난해 대비 인력이 30% 감소했다”며 “주말에 서울 등 외지에 사는 가족을 내려오게 하거나, 인근 인삼공장 근로자를 교통비 줘가며 불러온다. 일당이 8만 원에서 10만 원으로 올랐다”고 전했다.
양구군도 올해 600여 명의 외국인 근로자를 신청했지만 단 1명도 지원받지 못했다. 그나마 서울에서 온 사람을 배정받은 농가는 한시름 놓는 분위기. 10년 전 고향 양구군으로 귀촌해 오이농장을 운영하는 윤모(53) 씨는 매년 여름 필리핀인을 고용해왔다. 윤씨는 “올해는 일손이 없어 약 1만3223㎡(4000평) 중 6611㎡(2000평)를 혼자 수확하고 나머지는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2명이 내려와 나머지 오이밭도 수확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에어컨 바람 쐬던 이들인데…’
6월 15일 양구군농업기술센터에서 농장주와 서울에서 온 근로자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조영철 기자]
“주말농장 경험이 있고, 미용실도 오래 운영해 손도 빠릅니다.” 20대 아들과 함께 온 정모(57·여) 씨가 인사를 건넸지만 수박농장주는 못미덥다는 눈치다. “수박 순지르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그래도 열심히 해보세요.”
도농(都農) 간 인력 중개가 항상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먼저 ‘서울 사람은 농사일을 못한다’는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이의덕 푸른솔농원 대표는 “회사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일하던 사람이 농사일을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한 건 사실”이라고 했다. 실제 고된 밭일을 이겨내지 못해 계약 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 떠난 이들도 있다.
이런 일을 사전에 막고자 푸마시는 사전에 서울 근교 농가에서 현장테스트를 한다. 평가 항목은 업무 태도, 작업 능숙도, 뒷정리 등등. 5월 21일부터 닷새간 실시한 현장테스트에서 지원자 150명 가운데 합격자는 41명에 그쳤다. 김용현 푸마시 대표는 “현재 양구군 농장에서 일하는 서울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농장주가 처음에는 ‘곧 제풀에 쓰러지겠지’라는 눈초리를 보내다 사흘간 지켜본 뒤에는 ‘일 잘한다’ 하고, 점심 반찬도 달라진다고 하더라. 귀농에 도움 되는 조언도 해준다”며 “지난달 1차 접수 때 11곳이던 인력 중개 신청 농가가 이달 2차 접수 때는 17곳으로 늘었다”고 전했다. 오이농장을 운영하는 윤씨도 “더운 나라에서 온 외국인 근로자도 50도 넘는 비닐하우스 일은 힘들어한다. 서울에서 온 일꾼들이 그들보다 더 열심히 해줘 감사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