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 밖의 과학

알파고는 지난 대국을 복기하지 않는다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을 두려워하기엔 아직 이르다

  • 과학 커뮤니케이터 궤도 nasabolt@gmail.com

    입력2019-11-15 14: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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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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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3월 알파고와 대국을 마친 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아버지’ 데미스 허사비스(왼쪽). 이세돌 9단과 알파고 대국 장면. [신화 = 뉴시스, 사진 제공 · 구글]

    2016년 3월 알파고와 대국을 마친 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아버지’ 데미스 허사비스(왼쪽). 이세돌 9단과 알파고 대국 장면. [신화 = 뉴시스, 사진 제공 · 구글]

    인공지능(AI)이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식상한 시대다. 상용화된 AI가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우리는 고민 없이 이것저것 사용해보고 있다. 영화 ‘터미네이터’ 속 AI 스카이넷은 6번째 시리즈가 개봉하기까지 35년 내내 주인공을 집요하게 추격하고 있지만, 우리 집 AI 스피커는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원하는 음악을 틀어주지 않는다.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3년 전 프로기사 이세돌 9단이 구글 알파고에게 연달아 3연패를 했을 때까지만 해도 곧 AI가 인류를 지배하게 될 거라는 공포심이 넘쳐났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노예가 되지 않았고, 그럴듯하게 우리를 흉내 내는 AI만 종종 만날 뿐이다. 아쉬운 건지, 안심되는 건지 불분명하지만 지금 AI가 어디로 가고 있으며, 현재 어디쯤 와 있는지 궁금하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있다면 아마 ‘알파고의 아버지’ 데미스 허사비스일 것이다.

    창의성은 과연 어디서 오는가

    월드와이드웹(www) 창시자 팀 버너스 리가 지구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고 평했던 허사비스. 영국 컴퓨터공학자인 그는 4세부터 체스를 시작했고, 13세에 이미 체스 챔피언이 됐다. 체스뿐 아니라 보드게임, 카드게임에 모두 천부적인 소질을 보인 천재소년은 본인이 가장 좋아하던 컴퓨터게임 개발에 도전해보기로 한다. 

    물론 평범한 게임은 아니었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AI를 대상으로 한 게임이었다. 16세에 이미 AI를 활용한 시뮬레이션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고, 17세에는 이용자가 AI로 이뤄진 관람객을 상대로 놀이공원을 운영해 수익을 내는 게임 제작에 참여했다. 이후 그가 제작에 참여한 ‘블랙 앤드 화이트’와 ‘리퍼블릭’ 같은 게임 역시 어떻게든 AI를 게임에서 구현해내는 게 목적이었다. 비록 가상공간이지만 AI 캐릭터는 흡사 사람처럼 생각하고 생동감 있게 움직였다. 그러다 그에게 의문이 생겼다. AI와 인간지능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으로 자리를 옮긴 허사비스는 본격적으로 인간 뇌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거의 인간처럼 사고하는 듯 보이는 AI조차 결국 개발자가 만들어놓은 범위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완전히 새로운 발상을 떠올리는 창의 행위야말로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위대함이 아닐까. 그리고 2007년 그는 6쪽짜리 짧은 논문을 발표한다. 



    결론이 놀라웠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는 새로운 경험이나 상황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상상력 혹은 창의성은 기존에 없던 생각이나 개념을 찾아내는 과정으로, 인간 고유의 능력이라고 늘 여겨졌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인간 뇌 어딘가에 이것만 관장하는 영역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그 영역은 단순히 기억을 저장하는 곳과 동일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새로운 것 역시 저장된 기억들로부터 나온 기존의 것일 뿐이었다. 이 논문은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의 세계 10대 과학 성과로 선정됐다.

    가속화되는 AI의 진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컴퓨터역사박물관에 소장된 IBM의 컴퓨터 딥 블루(왼쪽). 미국 TV 퀴즈쇼 ‘제퍼디!’에서 IBM의 컴퓨터 왓슨과 퀴즈대결을 펼친 이 퀴즈쇼 최다 연승자 켄 제닝스. [위키피디아, gettyimages]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컴퓨터역사박물관에 소장된 IBM의 컴퓨터 딥 블루(왼쪽). 미국 TV 퀴즈쇼 ‘제퍼디!’에서 IBM의 컴퓨터 왓슨과 퀴즈대결을 펼친 이 퀴즈쇼 최다 연승자 켄 제닝스. [위키피디아, gettyimages]

    1997년 IBM의 딥 블루(Deep Blue)라는 컴퓨터는 체스에서 최초로 인간을 이겼다. 체스는 말을 옮길 때마다 수많은 경우의 수가 존재하는 게임으로, 딥 블루는 인간이 미리 만들어놓은 복잡한 계산을 통해 다음 수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 우리가 말하는 AI와는 수준이 다른, 그저 고성능 컴퓨터의 뛰어난 계산 속도를 과시하는 용도였다. 

    2011년에는 역시 IBM의 슈퍼컴퓨터 왓슨(Watson)이 미국 인기 퀴즈쇼에 등장해 최고 상금왕과 최다 연승왕 모두를 큰 격차로 따돌리고 우승했다.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퀴즈 질문에 나온 핵심 단어를 보유한 정보들에서 검색하고, 그중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것을 정답으로 선택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여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 3초였다. 

    다음 목표는 바둑. 만만치 않았다. 돌을 올려놓을 수 있는 자리가 361곳이나 된다. 고작 8수를 내다보는 경우의 수만 계산해도 초당 2억 수를 계산하는 딥 블루로 4만 년가량이 걸린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형세를 읽을 수 있는 빠른 판단력과 수많은 경험을 통해 체득한 직관이 필요하다. 

    차원이 다른 새로운 AI를 세상에 내놓는 과정에서 구글이 가장 경계한 점은 대중이 알파고의 계산 능력에만 주목한다는 것이었다. 연산속도만 빠른 탁월한 계산기라는 오명을 벗으려면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아무 프로기사나 이겨서는 알파고가 인정받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상대로 이세돌 9단을 지목했다. 

    바둑을 두는 특유한 방식이나 개성을 기풍이라고 말한다. 이세돌 9단은 파격적 기풍의 소유자였다. 누구보다도 직관적인 바둑을 두는 인간 프로기사를 꺾는다면 기존 AI에 대한 위상이 완전히 달라질 개연성이 있었다. 

    ‘기계가 스스로 학습한다’는 의미의 ‘기계학습’이라는 용어는 1959년 미국 컴퓨터과학자 아서 새뮤얼이 만들어냈다. 생물의 신경망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인공신경망이 그 모델이었다. 다만, 이를 통해 AI가 학습하다 보면 불필요한 선입견이 쌓여 새로운 사실을 추론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경우가 발생했다. 결국 인간이 의미 없는 정보를 망각하듯 인공신경망을 무작위로 죽이는 방식으로 추론 능력을 개선하게 됐다. 이것이 그 유명한 ‘딥러닝(Deep Learning)’이다. 

    알파고는 딥러닝을 통해 기본적인 바둑 규칙을 익히고, 수많은 기보를 학습했다. 나중에는 학습할 기보가 모자라자 AI끼리 대국을 벌여 끊임없이 새로운 기보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승리하려면 전체적인 맥락을 읽고, 실제 수를 뒀을 때 이길 확률이 높은 쪽을 짧은 시간 안에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알파고는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이라는 방법을 활용했다. 

    갑자기 휴가를 떠나게 됐다고 치자. 여행 경비와 시간도 넉넉하게 주어지고,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다. 이제 세계지도를 펼쳐 목적지를 골라야겠지만, 모든 관광지에 대한 정보를 본다 해도 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 어떻게 할까. 보통 대표적인 관광지 몇 개만 뽑아 그중 하나를 정한다. 아마도 그 여행지는 적당히 마음에 들 것이다.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이 바로 이런 원리다. 예상되는 수많은 경우의 수 가운데 임의로 몇 개만 뽑아 승률을 예측하기 때문에 알파고가 계산하는 시간을 효과적으로 줄여준다. 그럼 이세돌 9단과 알파고, 그 역사적인 대국 결과는 어땠을까.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4승 1패로 알파고가 승리했다.

    AI 시대, 인간에게 길을 묻다

    알파고와 첫 대국에서 해설진은 대부분 실망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알파고의 수가 바둑고수의 수와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대국부터는 분위기가 반전됐다. 알파고는 여전히 악수로 보이는 수를 뒀고 이세돌 9단은 인간 방식대로 잘 뒀지만, 결과는 알파고의 압승이었다. 

    AI를 개발하려는 것은 인간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한 창조주의 교만함이 아니다. 인간이 하지 못하는 것, 인간보다 잘하는 것을 계속 찾아내는 것이다. 그게 다 인간을 위해서다. 아직 스카이넷처럼 자아를 갖고 스스로 결정하는 AI는 존재하지 않지만 특정 영역에 전문가 AI는 존재한다. 암을 진단하고 생존율을 계산해 효과적인 치료제를 추천하는 AI, ‘길치’를 위한 길 찾기 AI, 운동할 때 호통치는 개인트레이너 AI…. 

    AI 없는 삶은 조만간 상상하기조차 어려워질 것이다. 하지만 AI를 넘어선,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 무언가가 개발된다 해도 결국 최종 목적지는 인간이다. AI는 우리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단, 수많은 판단 속에서 AI의 결정은 대부분 옳겠지만, 도출된 결과만 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AI의 승리를 습관적으로 경험하다 어느새 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맹목적으로 추종한다면 아주 작은 프로그램 오류에서 시작된 부당한 지시 역시 그대로 진행될지 모른다. 핵미사일을 도심 한복판에 떨어뜨리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세돌 9단의 가장 큰 승리는 알파고로부터 1승을 따낸 것이 아니라, 패배할 때마다 홀로 복기를 시도한 인간성에 있다. 알파고는 데이터를 구축할 줄은 알아도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이해하기 위해 과정을 되짚을 줄은 모른다. 알파고를 뛰어넘는 또 다른 AI와 대국해도 여전히 이세돌 9단은 복기를 할 것이다. 그게 인간이다. 인류가 갖는 가장 위대한 차별점이다.

    궤도_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한 후 한국천문연구원 우주감시센터와 연세대 우주비행제어연구실에서 근무했다. ‘궤도’라는 예명으로 ‘팟캐스트 과장창’ ‘유튜브 안될과학’을 진행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궤도의 과학 허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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