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영국 런던에서 공연된 연극 ‘인형의 집’. 노라 역의 여배우는 ‘X파일’의 스컬리 요원으로 유명한 질리안 앤더슨이다. [gettyimages]
그로 인해 고위직 취임을 눈앞에 둔 남편은 큰 약점을 잡히게 됐고, 이를 무마하려면 남편이 ‘적폐’로 낙인찍었던 인사의 손아귀에 굴러떨어질 게 명약관화했다. 강직한 남편은 차라리 옷을 벗는 길을 택할 가능성이 컸다. 그런 남편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아내에겐 믿는 구석이 따로 있었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누구를 떠올렸는가. 얼핏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아내 정경심 동양대 교수를 떠올린 독자가 많으리라.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는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1879)의 여주인공 노라가 처한 딜레마다.
금융 사기에 연루된 노라
원작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노라가 남편의 가부장적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인형 같은 삶을 거부하고 주체적 삶을 살고자 가출을 감행한다는 결론만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원작에서 노라의 남편 토르발은 일반의 예상과 달리 억압적 가장이 아니다.그는 노라를 ‘종달새’ ‘다람쥐’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지극히 다정한 남편에 사회적 책임의식이 투철한 올곧은 지식인이다. 자신에겐 장인인 노라의 아버지가 공직에 있을 때 저지른 잘못을 눈감아준 적이 있긴 해도 부정부패 문제에 단호한 청렴 강직한 선비에 가깝다. 그래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도 큰돈을 벌지 못했다. 게다가 건강이 극도로 악화돼 이탈리아에서 오랜 세월 요양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인생만사 새옹지마라고, 이런 시련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다시 건강해져 노르웨이로 돌아오고 얼마 안 돼 큰 은행의 최고경영자(CEO)로 전격 발탁됐기 때문이다. 온갖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지조를 잃지 않았다는 점이 벼락 출세의 발판이 된 것이리라.
그렇게 취임을 앞두고 은행 경영 쇄신을 준비하는 토르발에게 청산해야 할 적폐가 하나 있었다. 자신의 법대 동창이자 그 은행 직원으로 있는 닐스 크로그스타드다. 서명 위조 문제로 변호사업계에 발을 못 붙이자 은행에 취업했지만 여전히 평판이 좋지 못했다. 토르발은 한때 친구였던 그를 정리해고함으로써 경영혁신의 본으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크로그스타드에겐 반격할 회심의 카드가 숨겨져 있었다. 토르발이 장인이 남긴 유산으로 충당했다고 알고 있는 자신의 해외요양자금이 실은 크로그스타드의 지갑에서 나간 것이라는 점이다. 노라가 위독한 남편을 살리려 거액의 빚을 져놓고선 마침 그때 숨진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이라고 둘러댔던 것이다. 그리고 다달이 그 이자를 갚기 위한 방편으로 낭비벽 심한 철부지 마나님을 연기해온 것이다.
크로그스타드는 이를 빌미로 노라를 협박한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을 넘어 승진까지 요구한다. 처음 노라의 반응은 남편이 곧 고액 연봉자가 되니 ‘빚을 갚으면 그만’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자들의 법’이 노라의 발목을 잡는다. 당시 노르웨이에선 여성이 차용증서를 작성할 때 그를 보증해주는 남자의 서명이 필수적이었다. 노라는 죽은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했는데 크로그스타드는 그 서명 날짜가 노라 아버지가 사망하고 사흘 뒤라는 점을 파고들었다. 은행 총수가 될 사람의 부인이 서류 위조범인 사실이 밝혀지는 건 치명적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노라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를 토르발에게 숨긴다. 남편의 위신을 상하게 하고 집안을 곤경에 몰아넣었다고 비난받을 게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한편으론 남편의 자존심을 지켜주고자 자신이 남몰래 겪었던 간난신고가 알려지는 것이 부끄러워서였고, 다른 한편으론 그 모든 것이 자신에 대한 헌신적 사랑 때문임을 알게 된다면 남편이 자기 대신 십자가를 짊어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아서였다.
노라의 진짜 가출 사유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 ‘인형의 집’(1917) 포스터.
모든 사실이 밝혀지기 직전 가장무도회에서 노라가 춘 춤이 ‘타란텔라’라는 점이 의미심장한 이유도 여기 있다. 이탈리아 남부에서 유행한 이 무곡은 왕거미(타란튤라)에게 물리고 난 뒤 광기 어린 상태에서 추는 춤 같다고 해 그런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춤은 노라와 토르발 부부의 이탈리아 시절을 상기케 하는 동시에 노라가 꿈꿔온 사랑이 절정을 향해 치닫는 순간을 상징한다.
하지만 노라가 믿었던 ‘사랑의 기적’은 도래하지 않는다. 진실을 알게 된 토르발은 “분별없는 한 여성의 행동 때문에 초라하게 몰락하게 됐다”며 노라에게 분노와 비난을 쏟아낸다. 노라를 사기꾼, 거짓말쟁이, 범죄자라고 비난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책임감 없고 윤리의식 부족한 장인의 경박한 성향을 물려받은 탓이라며 혈통까지 비난의 도마에 올린다. 심지어 노라가 낳고 키운 3명의 자녀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며 자녀 양육에서 손을 떼라고까지 한다.
더욱 가관은 그다음이다. 진정한 사랑을 찾은 크로그스타드가 노라의 차용증서를 아무런 조건 없이 돌려보내자 안도한 토르발은 돌변한다. “내가 했던 심한 말에 얽매이지 마시오”라며 “당신을 용서하겠소”라고 일방적으로 선포한다. 그 용렬한 모습을 보고 노라는 깨닫는다. 자신의 사랑이 신기루였음을. 올곧은 줄 알았던 남편은 ‘적폐’라고 비난했던 크로그스타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속물이고, 자신은 그 속물이 심심할 때 갖고 노는 노리개에 불과했음을. 그래서 “나는 모든 일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설명을 찾아야 해요”라며 남자들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토르발의 변명이 등장한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명예를 희생하는 남자는 없어.” 노라가 바로 반박한다. “수십만 명의 여자가 그렇게 했어요.”
토르발 같은 졸장부는 한국 사회에 넘쳐난다. 특히 고위공직자가 되겠다는 이들일수록 청문회나 기자간담회에서 “아내가 나도 모르게 한 일일 뿐이며 나는 몰랐다”는 말로 아내에게 책임 전가해오지 않았던가.
노라였다면 뭐라고 했을까
정경심 동양대 교수가 10월 23일 자본시장법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한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출석하고 있다. [박해윤 기자]
결국 구속 수사를 받게 된 정 교수의 사모펀드 투자 및 경영 개입의 불법성 여부는 노라가 이해할 수 없던 ‘법의 잣대’에 따라 결정될 문제다. 하지만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에 저지른 아내의 실수와 잘못까지 남편이 모두 뒤집어쓰느냐 아니냐로 결정되는 노라의 ‘사랑의 잣대’에 따르면 조 전 장관은 유죄를 피하기 어렵다.
정 교수가 무수한 졸장부 남편들을 대신해 십자가를 짊어진 대장부 같은 한국 아내들의 전통에 충실하다면 그런 노라의 잣대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140년 전 발표된 페미니즘 고전 속 노라의 목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당신이 아주 확실하게 모든 책임을 지고 ‘모두 내 잘못입니다’라고 말할 줄 알았어요. (중략)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아내가 아니에요. (중략) 나는 더 이상 기적을 믿지 않아요.”
노라가 믿지 않는다는 그 기적을 실현시켜줄 고관대작의 남편은 언제쯤 이 땅에 도래하게 될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명예를 희생할 줄 아는, 드라마에서나 겨우 볼 수 있는 그런 남자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