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핑 전용 해변인 강원 양양군 서피비치에서 피서객들이 서핑을 즐기고 있다. 서피비치는 국내 최초 서핑 전용 해변으로 최근 해양수산부가 추천한 10대 바다여행지로 선정됐다. [뉴스1]
미국 뉴욕 브루클린부터 서울 문래동까지, 청년 문화에 탐닉한 이들은 늘 가난하기에 집값이 저렴하고 낙후된 동네에 터를 잡는 법이고, 이는 서핑도 예외가 아니었다. 해외에서나 가능하다고 여겨지던 서핑은 소셜미디어의 등장을 타고 알음알음 알려졌고, 그 결과 양양은 파도가 치는 주말이 되면 보드를 들고 바다로 나가는 이들로 가득 찼다. 양양시외종합터미널에서 죽도로 가는 택시를 타자마자 기사가 “서핑하러 가는 것 같은데 짐이 없네요?”라고 물을 정도였다.
이 이국적인 문화를 즐기려는 이들에게 특별한 음악은 필수일 터. 식당과 카페, 그리고 펍에서 흐르는 음악은 여느 관광지처럼 뻔하지 않았다. 요즘 제주의 인스타그램 친화적 카페에서는 말랑말랑한 어쿠스틱 싱어송라이터의 음악이 대부분이지만, 어쨌든 양양과 서핑은 그보다 역동적인 분위기다.
최근 제주의 여행자 패션은 차양 큰 모자에 하늘하늘한 원피스가 주를 이루는 반면, 양양에서는 보디 슈트 혹은 스트리트 패션 스타일이 대세다. 그들을 상대로 하는 가게에서도 EDM과 힙합이 주로 들려왔다. 그 자신이 유명한 서퍼인 잭 존슨의 음악을 쭉 틀어놓는 곳도 있었다. 젊은 층에게 가장 각광받는 두 해변 여행지, 제주와 양양의 상반되는 분위기가 여러 방면에서 느껴졌다.
베이비붐 세대가 잉태한 서핑문화
샌드라 디 주연의 영화 ‘기젯’. [IMDb]
이 모습을 잘 다룬 영화가 당대 틴에이저 스타였던 샌드라 디 주연의 1959년 작품 ‘기젯’이다. 최고 인기 배우가 찍은 틴에이저 무비가 서핑과 바다를 다루고 있었다는 사실이 당시 서핑 열기를 잘 보여준다. 모든 서브 컬처에는 그에 걸맞은 음악이 필요한 법. 전문가의 스포츠에서 멋쟁이의 레저가 된 서핑을 즐기던 이들을 위해 탄생한 음악이 바로 서프 록이다.
서프 록 하면 누구나 비치 보이스를 떠올리겠지만 서프 록의 원형은 1960년을 전후해 탄생했다. 벤처스, 링크 레이 같은 기타 연주 밴드들이 당시로서는 최신 기기였던 리버브 등을 활용해 기존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에 촉촉한 울림을 더했다. 또한 새로운 연주 방식으로 기타 사운드에 전율을 불어넣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벤처스의 ‘Pipeline’ 같은 곡이 서프 뮤직의 모태 중 하나다. 이런 연주 중심의 로큰롤은 새로운 세대의 댄스 음악으로 각광받았고, 이는 주말마다 해변에서 살다시피 하는 캘리포니아 젊은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음악과 새로운 레저, 이 둘을 결합시킨 이들이 바로 비치 보이스다. 브라이언 윌슨과 칼 윌슨 형제, 그리고 사촌인 마이크 러브 등을 중심으로 1950년대 후반 결성된 그들의 초기 이름은 체크 무늬 양모 셔츠로 유명한 패션 브랜드 이름을 딴 ‘펜들톤스(The Pendletones)’였다. 음악 콘셉트도 서핑과 무관했다. 하지만 윌슨 형제의 차남이자 서핑을 즐기던 데니스가 팀에 합류하면서 당대 가장 ‘핫’한 서핑 트렌드를 주제로 잡았고, 곧 팀의 첫 자작곡인 ‘Surfin’’을 작곡했다. 이윽고 계약한 레코드사는 이 콘셉트에 주목해 팀 이름을 임의로 비치 보이스로 바꿨다.
서핑족이 단 한 명이던 비치 보이스
비치 보이스. [Facebook@thebeachboys]
비치 보이스의 ‘Surfin’USA’ 앨범 재킷.
두 번째 싱글 ‘Surfin’ Safari’는 아예 서핑족을 위한 찬가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서핑하러 가자 / 모두가 배우고 있어 / 가서 나랑 즐기자’는 단순하면서도 압축적인 가사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헌팅턴, 말리부, 라구나, 도헤니 등 당대 서핑 명소를 언급하고, 이렇다 할 고민 없이 그저 태양과 바다를 즐기며 새로운 데이트를 기대하는 동시대 청년의 마음과 라이프 스타일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 노래들이 담긴 데뷔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32위를 기록했다. 비틀스가 미국에 상륙하기 2년 전이었다. 비치 보이스는 1950년대 엘비스 프레슬리의 영예를 잇는 새로운 백인 로큰롤 아이돌로 부상했다. 이들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알린 노래는 역시 이듬해 발매된 ‘Surfin’ USA’다.
이 노래는 1963년 5월 출시되자마자 빌보드 2위에 오르며 그해 여름을 장악하다시피 했다. 비록 척 베리의 ‘Sweet Sixteen’을 표절한 곡이었지만 이 노래의 전국적, 아니 세계적 히트로 서핑은 서부의 히피, 동부의 저항문화와는 달리 아직 순박하던, 그러나 새로운 세대의 욕망을 담아낸 문화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 비치 보이스의 인기와 함께 일본에서도 서핑족이 출현했을 정도니 말이다.
많은 서브 컬처는 음악과 함께 퍼져나간다. 그것은 때로 단순한 유행이 되고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기도 한다. 힙합이 비트와 랩뿐 아니라 패션, 그라피티 같은 문화와 함께 전파되는 것과 같다. 비치 보이스는 서핑이라는 레저문화를 음악과 결부시킨 선구자였다. 비록 그들 가운데 서핑을 즐기는 이는 데니스 윌슨밖에 없었지만, 심지어 대부분의 음악을 만든 브라이언 윌슨은 바다를 무서워하기까지 했지만 서브 컬처 관점에서 들여다보는 비치 보이스는 분명히 비틀스, 롤링 스톤스와는 또 다른 업적을 남겼다.
올여름 양양을 비롯한 한국의 서핑 명소들에서 비치 보이스의 음악을 더 많이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Surfin’ USA’ 말고도 그들의 서핑 찬가는 무수히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