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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교 시절 한 번쯤은 들었을 지청구가 이제는 단순한 잔소리가 아니게 됐다. 5월 24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중독성 행위 장애(Disorders due to addictive behaviors) 항목에 ‘게임이용장애’(게임 중독)를 정식 질병코드(6C51)로 추가 등록했다. 중독성 행위 장애의 대표적 사례는 도박 중독이다.
일각에서는 WHO의 이번 결정을 환영하는 목소리가 높다. 국내외 의학계와 일부 시민단체는 게임 중독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치료 근거가 생겼다며 WHO의 판단을 지지했다.
하지만 정작 게임에 과하게 의존하는 환자를 치료해온 현장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게임 과몰입은 일종의 증상일 뿐 질병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 오히려 이들은 게임 과몰입의 원인을 환자의 주변 환경에서 찾았다. 가정 불화, 학업 스트레스 등으로 정신적 문제가 발생하고 그 증상 가운데 하나가 게임 집착이라는 것이다.
게임 중독성에 대한 논의는 온라인게임의 시작과 궤를 같이한다. 한국학술정보와 논문 통합 검색 포털에서 게임 중독을 검색해보면 2002년 국내 온라인게임 서비스 초창기부터 게임 중독성에 관한 논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2013년 4월에는 관련법도 발의됐다. 의사 출신인 신의진 당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의원이 ‘중독 예방 관리 및 치료를 위한 법률안’(4대 중독법)을 발의했다. 4대 중독이란 알코올, 마약, 도박, 인터넷게임 중독으로 이를 통합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해 10월에는 황우여 전 교육부 장관(당시 새누리당 대표)이 이 주장에 힘을 실었다.
게임 중독으로 뇌 손상이 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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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게임업계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게임으로 인한 뇌 손상은 이미 폐기된 가설이라는 것. 보고서의 주장은 ‘게임뇌 이론’으로 불리는데, 모리 아키오 일본 니혼대 신경정신과 교수의 2002년 저서 ‘게임뇌의 공포’에 처음 소개됐다. 책에는 성장기에 게임을 많이 하면 전두엽의 발달이 늦어져 자극적인 콘텐츠만 찾게 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하지만 이 이론은 일본 의학계에서도 거센 비판에 부딪혔다. 가와시마 류타 일본 도호쿠대 신경정신과 교수는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게임뇌 이론에 대해 “게임 종류나 연령, 게임에 대한 대처 방법 등에 따른 뇌 연구 결과가 전혀 없었다. ‘게임뇌’라는 것은 단순한 망상과 같은 것”이라고 밝혔다. 2010년에는 일본 신경과학 학회지인 ‘신경과학 뉴스’에서도 이 이론을 비판했다. 게임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흥미를 느끼는 운동이나 독서 등을 할 때도 뇌가 비슷하게 반응했기 때문. 즉 게임뇌 이론의 주장대로라면 즐거움을 느끼는 어떤 오락 활동도 해서는 안 된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의학계에서는 게임의 폐해를 다룬 연구만 언급하지만 실제로는 게임이 지능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도 많다”고 주장했다.
2014년 독일 ‘막스 플랑크 인간발달연구소’는 게임이 뇌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슈퍼마리오 64’ 게임을 매일 30분씩 8주간 즐긴 성인 집단과 그렇지 않은 대조군을 비교할 때 우측 해마, 전두엽, 소뇌 회백질의 체적이 증가하는 것을 입증한 결과였다.
한국게임학회, 한국게임산업회, 한국모바일게임협회 등 게임산업 관련 협회와 단체 27곳은 최근 게임의 질병코드 등록에 반대하는 항의 서한을 WHO 측에 전달했다. 게임이용장애가 중독성 행위 장애에 포함되기에는 과학적 근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상황에서 게임이용장애가 중독성 행위로 인정된다면 게임과 게임산업을 잠재적 병인(病因)으로 보는 인식이 확대되고 게임산업의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업계와 관련 학계의 주장이다.
게임 중독 등록, 업계 크게 위축시켜
2014년 2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회의실에서 ‘중독 예방 관리 및 치료를 위한 법률안’(게임중독법) 법안심사소위원회 공청회가 열렸다. 당시 신의진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이 법안은 게임을 마약, 알코올, 도박과 함께 중독물질로 규정하고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반면 5월 24일 WHO 발표 이후인 6월 10일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대한예방의학회,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 한국역학회 등 5개 보건의학단체는 게임이용장애를 질병으로 분류한 WHO의 국제질병분류 11차 개정판(ICD-11)에 대한 지지 성명을 내놨다. 게임뇌 이론에 이어 의료계 주장의 핵심 근거는 도파민이었다. 도박, 알코올 중독과 같이 뇌 도파민 회로에 기능 이상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 게임이용장애에 대한 장기 추적 연구와 1000편 이상의 뇌기능 연구 등 확고한 과학적 근거가 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WHO가 게임이용장애를 중독성 행위 장애로 규정한 근거도 이 연구에 있었다. 지난해 7월 타릭 자세레비치 WHO 대변인은 게임매체 ‘인벤’과 인터뷰에서 “세계 각국에서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치료의 필요성, ICD-11의 발전 과정을 뒷받침하는 수백, 수천 권의 과학 출판물이 있다”고 밝혔다.
재미있는 점은 대다수 연구가 중국, 한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 시행됐다는 것. 2013년 ‘정신장애의 진단 및 통계 편람 제5판’(DSM-5)에 ‘인터넷게임장애’가 처음 이름을 올렸다. 물론 정식 질환이 아닌 ‘많은 연구가 필요한 새로운 현상’으로 반영됐다.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 DSM-5에는 ‘대부분의 연구 증거가 아시아 국가와 젊은 남성을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고 명시돼 있다.
WHO의 이번 결정에 영향을 미친 연구도 상당수 한국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연세대 산학협력단이 1월 한국콘텐츠진흥원에 제출한 ‘게임 과몰입 연구에 대한 메타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13~2017년 5년간 ‘게임 중독’ ‘게임 과몰입’ 등을 다룬 국내외 논문은 총 614편. 이 중 91편이 한국에서 발표된 논문으로 전체의 13.4%를 차지해 1위였다. 뒤를 이어 중국(85편), 미국(83편), 독일(64편), 호주(38편) 순이다.
한국에서의 연구가 가장 활발하긴 하지만 양으로만 따지면 중국과 미국도 이에 못지않다. 그러나 논문의 내용이 달랐다. 한국 논문 경우 정신의학계에서 작성한 비율이 59.4%로 글로벌 평균 28.4%보다 2배가량 높았으며, 그중 89.4%는 게임 과몰입, 중독 현상이 있다고 결론 내리거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연구였다. 이에 반해 미국에서 발표된 논문은 54.2%만 게임 과몰입 현상이 실재한다고 봤다. 이에 미국정신의학회(APA)는 게임 중독에 대한 과학적 연구나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질병코드로 등록하는 것을 보류했다. 게임 중독 관련 한국 논문은 전체의 82.4%가 정부의 지원으로 작성됐다. 한국연구재단 35개, 보건복지부 23개, 미래창조과학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17개 연구를 후원했다. 연세대 산학협력단은 한국 논문의 수준도 문제 삼았다. 한국에서 발표한 논문 중 전체의 8.2%만 조사한 게임을 1개 이상 명시했다.
WHO 질병코드 등록 일등공신은 한국
5월 29일 한국게임학회와 협회 등 89곳이 참여한 공동대책위원회는 사회적 합의 없이 국제보건기구(WHO)의 결정을 국내에 도입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WHO 행위중독 대응 TF(태스크포스) 한국위원인 이해국 가톨릭대 의정부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이 같은 의심에 대해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WHO 행위중독 대응 TF는 과반수가 심리학계 전문가로 구성돼 있다. 더군다나 공중보건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WHO가 일부 의사의 이익을 위해 질병코드 등록을 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잘못됐다. 무엇보다 이러한 문제 제기가 이윤 추구가 목적인 게임업계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이미 게임 중독세 추진에 나섰다는 소문도 돌았다. 보건복지부가 WHO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등록을 앞두고 게임 중독세에 관해 논의하고 있었다는 것. 하지만 보건복지부는 5월 20일 보도자료를 통해 이 같은 내용은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다.
게임 중독을 이유로 병원을 찾는 환자는 이번 WHO의 결정 이전에도 있었다. 이해국 교수는 “전체 인구의 2% 이상이 게임 중독을 앓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회나 군대에 적응하지 못해 정신과를 찾는 20대 초반 환자의 상당수가 청소년기에 게임 중독에 빠졌던 이들이다. 제때 치료받지 못하는 바람에 잃는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고 밝혔다.
현재 게임 중독 환자를 받는 대표적인 치료기관은 게임과몰입힐링센터. 중앙대병원 등 전국 5개 병원에 개설된 이 센터는 2011년부터 환자를 받아왔다. 게임 중독이 아니라 과몰입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게임에 집착하는 것과 중독 현상에 차이가 있어서다. 과몰입은 게임으로 일상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중독이라 부르기엔 일관된 진단 기준이 없어 이 용어를 쓰고 있다.
게임과몰입힐링센터장인 한덕현 중앙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지난해 4월 넥슨개발자콘퍼런스에서 ‘정신과 전문의가 알려주는 게임이용장애 A to Z’라는 강의를 진행했다. 이 강의에서 한 교수는 게임을 중독이라 보기 힘든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게임이 중독으로 분류되려면 내성이 있어야 한다. 알코올 중독만 봐도 술을 한 잔 마시면 다음 날은 두 잔 또 다음 날은 석 잔 생각이 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게임은 반대다. 게임 플레이 시간을 이렇게 늘려간다면 1년만 지나도 그 게임은 쳐다보기도 싫어진다”고 설명했다.
6월 3일 게임과몰입힐링센터는 그동안 게임 과몰입을 치료하며 알게 된 내용을 공유하는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한 교수는 게임 과몰입에 대해 “환자 일상생활에 문제의 주원인이 있는 가운데 게임이 관련 문제로 발현된 결과다. WHO 진단 기준에 이 같은 내용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게임과몰입힐링센터가 밝힌 내원자 자료에 따르면 게임 과몰입 환자가 주의력결핍 및 과잉행동장애(ADHD), 우울증 등 공존 질환에 함께 걸린 확률이 88.5%에 달했다. 센터 측은 “이(공존 질환)를 개선했을 때 게임 과몰입 증상이 크게 호전됐다”고 밝혔다.
엄마가 만든 게임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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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권 센터를 담당하는 김태호 건국대 충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친구나 부모와 갈등이 심하고 유대감이 절실한 아이에게는 게임이 이를 충족시켜주는 매체다. 또래 및 가족관계를 개선하면 게임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이 대폭 감소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호남권 센터장인 정하란 국립나주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과장은 “부모가 아이의 게임 몰두에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려 하는 것에서 게임 과몰입 치료가 시작된다”고 밝혔다.
학업 스트레스가 게임 중독을 만든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건국대 산학협력단과 강원대·아주대·서울대병원·중앙대병원이 6월 2일 ‘게임 과몰입과 게임문화 : 게임 이용자 패널 연구’를 주제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심포지엄을 열었다. 게임을 하는 초중고생 자녀를 둔 2000가구를 2년간 조사한 국내 최초의 ‘게임 중독’ 장기 추적 연구다. 연구를 총괄한 정의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게임 과몰입 증상의 원인은 자기통제력이다. 자기통제력이 저하될수록 게임 과몰입 상태에 빠지기 쉽다”고 밝혔다.
자기통제력이 낮아지는 핵심 변인은 학업 스트레스였다. 학업 스트레스가 높을수록 자기통제력이 낮아졌기 때문. 정 교수는 “특히 학업 스트레스는 부모의 과잉기대나 간섭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입시 문화가 치열한 (한국 사회의) 문화·환경적 특수성을 고려하고 부모의 과잉기대 및 간섭 등 학업 스트레스에 취약한 환경의 개선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게임 중독 기준이 뭔데?
5월 27일 제7회 중독 추방의 날 및 중독 예방 주간을 맞아 중독예방연대 회원들이 서울 청계광장 인근에서 집회를 열고 ‘중독예방치유법’ 제정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동아DB]
그렇다고 절대 이용 시간을 기준으로 삼기도 어렵다. 프로게이머 등 게임이 직업인 사람까지 게임 중독자로 볼 수 있기 때문. 의료계는 진단 기준에 따라 증상을 확인한 뒤 같은 증상이 1년 이상 사라지지 않아야 비로소 게임 중독으로 본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12개월 넘게 같은 증상이 반복되더라도 게임 중독으로 볼 수 없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1년간 증상을 보이더라도 자연히 호전되는 경우가 적잖았기 때문. 정의준 교수 연구팀은 5년간의 조사 결과 전문적 조치가 없음에도 매년 꽤 많은 학생이 게임 과몰입군에서 일반군으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했다. 5년간 단 한 번도 과몰입 증상을 보이지 않은 학생은 66.6%인 반면, 5년 연속 증상을 보인 학생은 전체의 1.1%에 불과했다. 정 교수는 “청소년 시기의 게임 과몰입 수준은 매우 탄력적이다. 매년 50~60%는 특별한 조치 없이도 일반군으로 이동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