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 극단 명작옥수수밭]
연극 ‘세기의 사나이’(차근호 작·최원종 연출)는 일제강점기 저항과 순응의 역사에서 용케 살아남은 산증인 박덕배를 조명한다. 3·1운동 당시 큰맘 먹고 태화관에 들렀다 우연히 3·1운동 행렬 선봉에 서게 된 박덕배(김동현 분)는 저승사자의 호명 실수로 동명이인의 죽음을 대신 맞는다. 격노한 염라대왕의 불호령을 걱정하는 저승사자(김왕근 분)에게 덕배는 이번 일을 무마해주는 조건으로 세계 최장수 기록을 세울 때까지 수명을 연장 받는다.
긴 수명만큼이나 덕배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어린 시절 차별과 구박만 받던 서자 덕배는 바람난 정실 어머니 때문에 풍비박산 난 집안을 건사한다. 학질로 장남을, 난산으로 부인을 먼저 떠나보낸 아픔 속에서도 덕배는 이복동생 도현(김승환 분)을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다. 의열단을 흠모한 도현이 만주로 떠나자 덕배는 주저 없이 동생을 찾아 나선다.
그 여정에서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안창남(최초의 한국인 비행사), 이상, 나운규, 윤심덕, 손기정, 김구, 윤봉길 같은 위인들과 절묘하게 만난 덕배는 그들에게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하며 역사적 사건에 일조한다. 역사의 단초는 뛰어난 영웅이 아니라 이름 없는 민초의 진심을 통해 제공된다는 것을 덕배는 몸소 보여준다. 그러나 결국 덕배와 그의 하나뿐인 혈육 순심(정아람 분)은 독립을 위해 만주로 떠난 투사 길자중(이갑선 분), 일본으로 유학 간 친일파 배민국(오민석 분)의 삶과 맞물리며 격동의 세월 속에서 온갖 고초를 겪는다. 125년 동안 풍파를 겪은 뒤 저승사자를 맞이하는 주름진 덕배의 얼굴에는 그제야 환한 웃음꽃이 핀다.
‘세기의 사나이’는 긴박하게 변화하는 시공간을 카툰(cartoon)식의 독특한 무대 기법으로 치밀하게 계산해 연출했다. 종횡무진하는 홍길동처럼 2시간 동안 쉴 새 없이 무대를 휘젓는 배우 김동현의 인상적인 연기를 통해 관객은 각자에게 부여된 시공을 헤아리는 나침반을 선사 받는다. 배우 25명이 옷 300벌을 갈아입고 나오는 것도 볼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