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로나 FC 1군 무대에 데뷔한 백승호가 아틀레코 마드리드와 스페인 국왕컵 16강전에 선발 출전해 볼 경합을 벌이고 있다. [뉴시스]
3년 전 이맘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6년 1월 바르셀로나가 마침내 숨통을 텄다. ‘만 18세 미만 외국인 선수 영입 금지’ 조항을 어긴 이들은 한동안 선수 등록이 불가능했다. 이 치명적 징계는 백승호, 이승우, 장결희 등 한국 국적 유망주에게도 막대한 타격을 줬다. 쉽게 말해 바르셀로나 소속이란 사실 자체를 부정당한 것. 고통스러운 기간을 보낸 뒤에야 다시 정식 선수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2016-2017 시즌 20분 밖에 못 뛰어
지로나 FC 백승호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아랫줄 왼쪽에서 두 번째). 2017년 지로나 FC(스페인)로 이적한 백승호.(왼쪽 부터) [ 지로나 FC 공식 트위터, 지로나 FC 홈페이지]
하지만 설렌 마음과 달리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백승호는 그날 공격형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해 58분을 소화했다. 근육 경련으로 쓰러져 더는 뛰기 힘들었다. 그동안 체력 테스트에선 합격점을 받았으나 실전을 치르는 이른바 ‘경기 체력’은 또 다른 얘기였다. 3년간 출전 정지 상태였으니 몸이 올라오려면 고생 좀 하겠다 싶었다. 백승호는 일단 실전에 익숙해져야 했다. 후반에만 들어서면 근육에 불편함을 느꼈고, 발목이나 허리도 성치 않았다.
달갑잖은 외풍이 불었다. 바르셀로나 같은 구단에서 선수들의 기량은 종이 한 장 차이. 외부 입김이 없을 수 없다. 가령 선수를 대리하는 에이전트의 구단 상대 정치력이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당시 백승호는 이중고를 겪었다. 유스 단계를 마치고 2군으로 올라가는 중차대한 시기에 백승호의 에이전트는 구단 단장과 갈등을 빚었고, 백승호를 총애했던 2군 감독은 내부 불화로 등을 돌렸다. 백승호가 2016-2017 시즌에 경기장을 누빈 시간은 20분이 채 안 됐다. 유스 시스템을 거친 또래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고, 리오넬 메시 등과 1군 훈련을 같이했던 유망주가 철저히 외면당하는 그림은 분명 예상 밖이었다.
백승호가 험난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그의 잠재력을 귀히 여긴 지도자들의 배려 덕분이었다. 먼저 루이스 엔리케 바르셀로나 1군 감독. 메시는 물론 루이스 수아레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세르히오 부스케츠 등을 지도하던 그가 1군 훈련에 백승호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20회 이상의 콜업은 백승호 연령대의 선수에겐 최고 선물이었다. 게다가 레알 마드리드와 엘 클라시코를 앞둔 최종 훈련에 유스 선수로는 유일하게 불렀다. 엔리케 감독은 백승호에게 ‘칼리다드(calidad)’란 표현을 썼다. 스페인어로 ‘좋은 퀄리티’를 뜻한다.
백승호는 2017년 여름 팀을 옮겼다. 구단 이름값보다 출전 시간이란 내실을 위해 지로나에서 새롭게 출발했다. 시작은 2군이었다. 실전 감각을 더 올려야 했다. 1군 안착도 꾸준히 준비했다. 당시 파블로 마친 감독은 백승호를 1군 훈련 멤버로 삼아 적응력을 높였다. ‘훈련 따로, 경기 따로’라는 어수선한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우수 선수들과 훈련하며 템포와 테크닉을 익혔다.
마친 감독 후임인 에우세비오 사크리스탄 감독은 1군 데뷔란 값진 순간을 선사했다. 경기 전 공식 기자회견에서 그는 백승호에 대해 “이 선수가 바르셀로나에 있던 게 생각나더라. 데리고 있어 보니 정말 좋은 재목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슈팅이 좋고 기술적으로도 엄청나다. 피지컬, 스피드, 민첩성 등 모두 갖췄다”고 칭찬했다. 데뷔전을 앞둔 어린 선수에게 짧지 않은 시간을 할애한 건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말 그대로 다재다능
백승호는 이제 또 다른 지도자와 만남을 기대한다. 아시안컵을 마친 뒤 고국 포르투갈로 향하면서 유럽파를 점검하기로 한 파울루 벤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이번 방문은 ‘세대교체’란 키워드가 맞물려 있다. 대표팀은 격동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10년 이상 개근한 기성용과 구자철이 동시에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2022 카타르월드컵을 대비해 벤투 감독은 입맛에 맞는 선수를 찾아내려 한다. 백승호도 당연히 그 후보군에 포함돼 있다.백승호의 원래 포지션은 ‘10번’(공격형 미드필더)이었다. 창의력을 발휘해 슈팅 직전의 상황을 만들거나, 직접 마무리해 득점을 뽑아내는 역할이다. 하지만 징계 해제 뒤 측면 공격수로 서는 시간이 길었다. 스피드가 괜찮고 결정력도 준수했던 덕분이다. 신태용 전 감독 역시 이에 착안했다. FIFA U-20 월드컵 당시 백승호를 측면에 세워 재미를 봤다. 지로나 2군에서는 팀 사정상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도 맡았다. 공을 소유하며 경기 전체를 조율했다. 최근 1군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복귀했다. 중원에 큰 구멍이 난 국가대표팀에서 요긴하게 쓰일 멀티 플레이어다.
최근 경기에서 백승호는 확실히 자신감이 붙은 모습을 보여줬다. ‘된다’는 걸 몸소 느끼면서 상승곡선에 올라탔다. 물론 더 좋아질 것이다. 백승호는 ‘아직’이다. 지금도 키가 크고 있다. 몸이 여물고 힘이 더 실리면 그동안 높게 평가받았던 기술도 정점을 찍을 것이다. 여기에 경기 경험을 쌓으면서 시야가 트이고 대표팀에도 발탁된다면 그동안의 불운을 씻고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