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1일 충남 태안 화력발전기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진 채 발견된 김용균 씨가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며 12월 1일 올린 인증사진. [뉴스1]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대사다. 말하는 주체는 소설 속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 ‘빅 브라더’라는 1인 독재체제 아래의 하위관료다. 독재체제 정당화를 위해 역사를 조작하는 진리부에서 일하던 그는 체제모순에 눈뜨고 체제전복을 꿈꾸지만 함정수사에 걸려들어 사상범을 색출하고 고문하는 애정부로 끌려간다. 거기서 굶주린 쥐 떼를 가둔 상자가 얼굴로 조금씩 다가오는 고문을 받던 그는 마지막까지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연인 줄리아에게 자기 대신 그 모진 고문을 받게 하라고 절규한다.
이 같은 ‘나 대신 남에게’가 현재 대한민국에서 되풀이해 발생하고 있다. 비정규직에게 위험을 떠넘기는 ‘위험의 외주화’가 그것이다.
스물넷 외동아들의 참혹한 죽음
고(故) 김용균 씨가 생전에 부모님이 사준 양복을 입고 즐거워하고 있는 동영상(왼쪽). 김씨의 유품 가방에서 끼니를 대신한 컵라면과 과자 등이 나왔다. [뉴시스]
입사 3개월 차 신입사원이 밤늦은 시간 홀로 컨베이어벨트에 떨어진 낙탄을 삽으로 퍼내고 이물질 제거 작업을 하던 중 벨트에 말려들어가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됐다. 안전수칙대로 2인1조가 돼 1명이 벨트에 낀 이물질을 제거하고 다른 1명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벨트 작동을 멈추는 역할을 했다면 피할 수 있는 사고였다.
하지만 3년마다 입찰로 하청계약을 따내야 하는 KEPS는 인건비를 줄일 수밖에 없었고, 2인1조로 할 일을 직원 1명이 떠맡는 경우가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안전을 위해 컨베이어벨트 라인을 멈추고 정비 작업을 하면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그만큼 손실을 떠안게 되는 구조적 문제가 더해졌다.
안전사고가 걱정된 KEPS 직원들은 2인1조 수칙을 지켜주거나, 컨베이어벨트 위로 몸을 숙이고 들어가 작업하지 않도록 장비설계의 개선을 28차례나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 사고는 처음이 아니었다. 2017년 11월 서부발전 3호기 보일러 정비현장에서도 하청노동자가 기계에 끼어 사망했다. 그런데 원청인 서부발전은 “작업자 과실”이라 주장하고, 하청업체 측에 과태료를 물린 것으로 밝혀졌다. 서부발전은 ‘무재해’라는 이유로 지난 5년 동안 산재보험료 22억5000만 원을 감면받은 게 드러났다.
서부발전 인명사고 집계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8년 현재까지 10년간 태안과 경기 평택, 서인천, 전북 군산 등 4개 화력발전소에서 김용균 씨 사고를 포함해 총 69건의 산재사고가 발생해 13명이 숨진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태안발전본부에서만 58건이 발생해 12명이 사망했다. 여기에 더해 2017년 국회 국정감사 보고 때 그해까지 서부발전 소속 화력발전소 사고 가운데 10건과 6명의 사망 사실이 누락됐음이 추가로 밝혀졌다.
사고를 당한 사람의 90% 이상은 하청업체 직원이다. 위험한 업무와 그로 인해 발생한 사고의 책임을 하청업체 비정규직에게 떠넘기고, 과실은 원청의 정규직이 나눠 먹은 셈이다.
맞벌이 부부의 외아들인 김씨는 고향 경북 구미를 떠나 태안에서 회사가 월세를 일부 부담하는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어머니 김미숙 씨는 아들의 작업환경을 직접 살펴보고는 “어느 부모가 자식을 살인병기에 맡기겠느냐”며 “아무리 일자리가 없어도, 놀고먹는 한이 있어도 이런 데 안 보낼 거”라며 통곡했다.
김씨의 가방에선 손전등 하나, 컵라면 세 개, 과자 한 봉지, 그리고 탄가루 묻은 얼굴을 닦을 물휴지 한 통이 나왔다. 석탄가루가 날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다 보니 손전등과 물휴지가 필요했고,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를 멈추지 않게 하려다 보니 컵라면과 과자로 끼니를 대신했다.
되풀이되는 비극
‘특성화고등학생 권리연합회’ 소속 고등학생 등 참가자들이 2017년 12월 5일 저녁 서울광장 인근 도로에서 고 이민호 군의 마지막 추모제를 열고 있다. [뉴시스]
2017년 11월 제주 용암해수 생수업체 ㈜제이크리에이션의 페트병 제작공장에서 현장실습을 하다 압착기에 몸이 끼어 숨진 제주 특성화고 3학년생 이민호(당시 18) 군 사망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현장실습을 할 때는 반드시 지도 담당자를 배치해야 하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그때도 재발 방지 목소리가 높았으나 1년 만에 비슷한 비극이 되풀이됐다. 올해 10월 20일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의 삼다수 페트병 공장에서 김모(35) 씨가 페트병 제작 기계에 몸이 끼어 숨졌다.
비정규직 젊은이들이 ‘잠수함 속 카나리아’처럼 목숨을 바쳐가며 산업현장의 위험성을 경고하지만 똑같은 비극이 되풀이되고 있다. 8월 16일 대전 대덕구 CJ대한통운 물류터미널에서 대학생 김모(22) 씨가 컨베이어벨트 아래를 청소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전기가 흐르는 기둥에 감전돼 열흘 만에 숨졌다. 사전에 누전 사실만 알려줬더라도 피할 수 있는 사고였다.
고용노동부가 이 사건으로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했지만 석 달도 안 돼 또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10월 29일 같은 터미널에서 CJ대한통운의 계약직 직원 유모(33) 씨가 작업하다 화물차에 치여 치료를 받던 중 20시간 만에 숨을 거뒀다. 유씨는 택배를 컨테이너에 싣는 상차 작업을 마치고 컨테이너 뒷문을 닫고 있었는데 이를 보지 못하고 후진하던 컨테이너 트레일러에 치여 변을 당한 것이다.
법과 제도를 바꿔야
한국은 세계 11위 경제대국이지만, 인구 10만 명당 산재 사망자 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1위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올해 국내 산재 사망자는 상반기에만 벌써 503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한 달에 83명꼴이다. 올 한 해 1000명이 넘을 것이란 비관적 전망도 나온다. 노동계의 통계는 그 2배가 넘는다. 노동계 자체 통계에 따르면 2001년부터 2016년까지 산재 사망자 수는 3만3902명. 연간 2118명꼴이다. 그중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라는 것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의 주장이다.산업현장에서는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비정규직에게 떠넘겨 그들만 사지로 몰아넣는 계급화·차별화가 심각하다. 이는 비정규직보다 열악한 처지에 내몰린 국내 외국인노동자 사망자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13~2017년 5년간 외국인노동자 사망자 수는 471명. 연간 85~107명이 산재로 목숨을 잃고 있다.
일본의 경우 외국인노동자 사망자 수가 지난해까지 10년간 125명에 이른 것으로 조사됐다고 NHK가 11월 23일 보도했다. 한국이 그만큼 사회적 취약계층에게 가혹한 사회라는 소리다.
김용균 씨가 남긴 유품 중에는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과 만납시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찍은 사진도 있었다. 12월 1일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인증샷 릴레이에 동참하며 찍은 인증사진이다. 비정규직 100인 대표는 12월 11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발전소 비정규직 대표 이태성 씨는 “정규직 안 돼도 좋으니 더 죽지만 않게 해달라고 했는데, 꽃다운 젊은 청춘이 또 목숨을 잃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2016년 구의역 김군 사망사건 이후 산업안전 보호입법이 여러 건 발의됐지만 국회에서 낮잠만 자고 있다. 정부 역시 노동 안전을 위한 땜질식 행정조치만 취하고 있다. 정의당은 다시 ‘김용균 3법’을 발의했다.
소설 ‘1984’에서 사랑하던 줄리아를 고문하라고 외치던 스미스는 이후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다 결국 모든 것을 망각에 던져놓고 ‘빅 브라더’를 진정으로 애정하게 된다. 자기 대신 새파란 젊은이들을 ‘살인병기’ 속으로 밀어넣는 것에 무관심하던 2018년의 한국인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