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랩원오원 매장
얼마 전 택시업계와 카풀회사 간 논란이 한창일 때 만난 선배가 한 말이다. 워낙 야근이 잦아 ‘카카오택시’ 애플리케이션(앱)을 자주 썼는데 요즘에는 ‘타다’를 애용한다고 했다. 뭐가 가장 좋으냐고 묻자 “일단 여느 운전기사들과 달리 말을 걸지 않아서 제일 좋아”라고 답했다. 아무도 내게 관심을 주지 않고 유령처럼 대하는 서비스라니…, 좋은데?
남에게 말을 하고 남의 이야기를 들은 뒤 글로 쓰는 게 일상인 취재기자에게 ‘대화’는 노동에 가깝다. 정말 친하다 싶은 사람과는 만났을 때 아예 말도 섞지 않고 ‘멍 때리기’를 즐기며 힐링한다. ‘시발 비용’을 쓰고자 쇼핑을 가도 직원이 살갑게 말을 붙이며 밀착 마크를 시도하면 집어 든 물건도 내려놓고 나온다.
기자가 온라인 쇼핑의 달인이 된 데는 타고난 귀차니즘도 한몫했지만, 온라인에서는 직원과 흥정하거나 아이스브레이킹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작용했다. 처음에는 “아, 정말 기자로 먹고살기 힘든 성격이야”라고 여겼는데 알고 보니 이렇게 서비스 제공자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하는 소비자가 꽤 있었다. 오죽하면 화장품 가게에서도 “말 걸지 말아주세요”라는 의미의 컬러 장바구니를 별도로 구비했겠는가. ‘언택트 마케팅’이 대세인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대화는 귀찮지만 물건은 사고 싶어
접촉을 뜻하는 ‘콘택트(contact)’란 말에 ‘언(un)’이 붙어 ‘접촉하지 않는다’는 뜻의 언택트. 가상현실(VR) 쇼핑과 키오스크, 챗봇 등이 대표적인 언택트 서비스다. 언택트 마케팅과 연관된 키워드는 ‘조용한 소비’다. 금융권에서 직원과 말 한 마디 섞지 않고 은행 업무를 볼 수 있는 ‘비대면 거래’가 뜬 것처럼 유통업계에서도 다양한 ‘언택트 마케팅’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올해 업계에서 화제가 된 언택트 마케팅 사례를 살펴보면 ‘이러다 내 일자리도 없어지는 게 아닐까’ 불안한 느낌도 살짝 든다. 달콤커피는 전국 곳곳에 로봇카페 ‘비트’를 열고 카페를 찾는 이들에게 로봇 바리스타가 내린 커피를 제공한다. 얼마 전 성공적으로 종료한 KT의 ON식당 시즌2 대학로점에도 ‘비트’가 있었다. ‘비트’에는 인간 바리스타 대신 커다란 로봇 팔이 있다. 로봇 팔 바리스타는 사람이 내린 커피와 달리 균일한 맛과 정량을 제공한다. “에스프레소 샷 추가하고 휘핑크림 빼주세요” 같은 요구는 말로 하지 않고 무인 키오스크나 앱에서 설정해 주문하면 된다.
편의점도 속속 언택트 마케팅에 동참하는 추세다. 롯데에서 운영하는 세븐일레븐과 신세계의 이마트24, BGF리테일의 CU 등 편의점 일부 매장은 자율 결제 시스템이 갖춰진 무인점포로 운영되고 있다. 다만 술과 담배는 사람 손을 거치지 않고 판매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기에 직원이 상주하는 시간도 있다. 제품 도난 문제와 정리, 성인용품을 미성년자가 구매하는 문제 등이 해결된다면 언젠가는 ‘알바몬’과 ‘알바천국’ 같은 구인구직 포털사이트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모집’ 공고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매장에서 직원의 도움 없이 자유롭게 피팅을 하고 제품도 살 수 있다.
요즘 대세인 ‘방치형 게임’하듯 ‘방치형 쇼핑’
랩원오원 매장은 결제 가능한 자신의 카드를 출입증처럼 카드 리더기에 인식해야 들어갈 수 있는 구조다.
12월 19일 오전 10시 반 무렵 매장을 찾았다. 입구에 푸른색 염료가 담긴 링거를 잔뜩 꽂은 청바지가 전시돼 있었다. 한 남자가 안쪽에서 제품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문이 열리자 잠깐 문 쪽을 쳐다보더니 다시 제품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고는 바지 하나를 집어 들고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그가 피팅룸으로 들어가니 이 은색 네모난 방 안에 온전히 혼자가 됐다.
몇 분 뒤 피팅룸에서 나온 남자가 기계를 조작한 뒤 물건을 자연스럽게 정리하기에 “혹시 스태프세요?”라고 물었는데, 알고 보니 청바지를 사러 온 손님이었다. 그가 바지를 사서 떠나자 다시 혼자. 사진기자를 기다리며 매장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곳곳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 또 다른 남자가 매장에 들어왔다. 때맞춰 사진기자도 매장에 도착했다. 매장 사진을 찍는데 앞서 들어온 남자가 “지금 여기 사진을 찍는 거예요?”라고 물었다. 다시 “혹시 스태프세요?”라고 물었는데 “아뇨, 손님이에요. 사진에 나올까 봐 비켜드리려고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민망함에 벽면에 설치된 태블릿PC 화면의 ‘스태프’ 버튼을 계속 눌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 정도로 방치돼본 건 처음이었다. 여기 이 바지들, 그냥 들고 가도 모르는 거 아냐?
바코드 스캐너를 활용하면 피팅룸에서 마음에 드는 제품을 바로 살 수도 있다. (왼쪽) 랩원오원 매장은 결제 가능한 자신의 카드를 출입증처럼 카드 리더기에 인식해야 들어갈 수 있는 구조다.
매장 안쪽을 둘러보고 외관 사진을 찍는데 청바지 차림의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토록 찾던 스태프였다. 그러나 스태프가 매장에 계속 있는 건 아니다. 스태프는 손님이 버튼을 눌러 호출할 때만 와서 도움을 준다. 아까 버튼을 눌렀는데 스태프가 오지 않았던 건 근무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태프는 오전 11시 반부터 오후 8시 반까지 호출할 수 있다.
마침 기자가 찾아갔을 때는 홀리데이 시즌 할인 기간(12월 17~31일)이었다. 24시간 운영되는 랩원오원 매장의 스테디셀러는 데님을 블록 형태로 매치한 미드 블루 컬러의 청바지. 할인 가격은 13만8600원이었다. 미드 블루 컬러의 베이식 데님은 할인가 9만7300원이었다. 정형욱 랩원오원 마케팅 과장은 “매장이 젊은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있어 손님이 대부분 20, 30대다. 24시간 운영하다 보니 저녁식사나 퇴근 후 찾아와 쇼핑하는 분이 많다. 특히 심야에 친구들과 매장을 방문해 옷을 입어보는 고객이 꽤 있다”고 말했다.
오래 봐도 눈치 주는 사람 없어
한 공간에서 제품을 오랫동안 살펴보거나 옷을 여러 차례 입어봐도 눈치 주는 직원이 없으니 쇼핑할 때 장고하는 유형이라면 이곳이 꽤 마음에 들 것이다. 실크블라우스나 하얀 셔츠처럼 쉽게 오염되지 않는 데님 제품이라 무인이 가능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 과장은 “처음 무인매장을 운영한다고 할 때 내부에서도 고민이 많았다. 1년 가까이 미국 아마존과 중국 알리바바 외에도 일본, 유럽의 무인매장 등 해외 사례를 공부한 뒤 매장을 열었는데 고객 반응이 나쁘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했다.아무리 CCTV에 기록이 남는다고 하지만 사람이 없으니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우리도 걱정한 일인데, 오히려 직원이 없으니 손님들이 옷을 입어본 뒤 훨씬 깔끔하게 정리해놓고 돌아가 놀랐다”며 “그리고 들어올 때 자기 명의의 카드를 찍어야 해서인지 도난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쉬운 건 이 브랜드의 주력 상품이 남성용이다 보니 기자의 3대 욕구 가운데 하나인 ‘지름욕’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매장을 나오며 남성용 외에 여성용 제품을 무인으로 파는 매장도 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기사를 쓰기까지도 수없이 누군가와 말을 하고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처지이지만, 회사를 벗어나 쇼핑할 때만큼은 ‘묵언수행’하는 승려의 자세로 ‘조용한 지름’을 실천하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