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2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두산 베어스를 꺾고 우승을 달성한 SK 와이번스 선수들이 트레이 힐만 감독을 헹가래하고 있다. [동아DB]
니혼햄 파이터스가 2006년 일본시리즈에서 주니치 드래건스를 4승 1패로 물리치고 정상을 차지하자 이 팀 외국인 감독은 약간 어설픈 일본어 발음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해 니혼햄은 ‘도에이(東映) 파이터스’라는 이름을 쓰던 1962년 이후 44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시리즈 우승기를 들어 올렸습니다. 그러면서 이 외국인 감독이 남긴 저 한 마디는 여러 일본 언론에서 ‘올해의 유행어 톱 10’으로 꼽을 만큼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감독이 올해 11월 18일 니혼햄 연고지 삿포로(札幌)를 다시 찾았을 때도 홋카이도(北海道)신문은 이 표현을 잊지 않고 기사에 넣었습니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올해 이 감독은 우승 트로피를 한 번 더 품에 안았습니다. 이번에는 일본시리즈가 아니라 한국시리즈였습니다. 네, 이 감독은 바로 트레이 힐만(55) 전 SK 와이번스 감독입니다. SK가 올해 한국시리즈에서 두산 베어스를 4승 2패로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힐만 감독은 팀을 한국시리즈 정상으로 이끈 첫 번째 외국인 감독이 됐습니다. 동시에 세계 야구 역사에 한국시리즈와 일본시리즈를 제패한 첫 번째 감독으로 이름을 남기게 됐습니다.
홈런의 팀, 하지만 홈런이 전부는 아니다
트레이 힐만 SK 와이번스 감독이 한국시리즈 6차전 두산 베어스와경기에서 4회 초 2점 홈런을 터뜨린 강승호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동아DB]
두 번째 공통점은 희생번트도 많았다는 것. 2006년 니혼햄은 희생번트 133개로 리그 최다 기록을 남겼습니다. 올해 SK는 희생번트 54개로 이 부문 최다 1위인 삼성 라이온즈(57개)보다 3개 적은 3위에 올랐습니다.
포스트시즌 때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SK는 올해 플레이오프 5경기, 한국시리즈 6경기에서 홈런 21개를 치며 역대 포스트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새로 썼습니다. 동시에 희생번트도 10개를 성공했습니다. 포스트시즌 10경기를 치른 넥센 히어로즈가 기록한 희생번트가 4개였으니까 SK는 희생번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장타력이 떨어지는 팀이 이를 만회하려고 희생번트 작전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홈런과 희생번트가 동시에 많다는 건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도 좋았습니다. 올해 정규리그 때 SK 타자들이 희생번트에 이어 득점에 성공한 건 총 41번(75.9%). 횟수로는 1위, 성공률로는 롯데 자이언츠(88.9%)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성적입니다.
홈런과 희생번트가 동시에 많다는 건 선수를 다양하게 썼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보통은 홈런을 많이 치는 타자는 번트에 서투르게 마련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니까요. 힐만 감독은 올해 정규리그 144경기를 치르면서 129가지 선발 라인업을 사용했습니다. 역시 리그에서 제일 많은 숫자입니다. 선발 라인업 종류가 제일 적었던 LG 트윈스(74가지)와 비교하면 SK가 75% 가까이 많은 라인업을 썼습니다.
수비 쪽에서는 실점이 제일 적었다는 게 중요한 공통점입니다. 올해 SK는 경기당 평균 5.06점으로 리그 최소 실점을 기록한 팀이었고, 2006년 니혼햄은 경기당 3.32점밖에 내주지 않습니다.
올 시즌 SK가 실점을 줄일 수 있었던 최고 원동력은 범타처리율(Defensive Efficiency Ratio·DER)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DER는 문자 그대로 상대 타자가 때린 페어 타구를 야수들이 아웃으로 처리한 비율을 나타냅니다. 올해 SK는 DER 68.6%로 리그 1위 팀이었습니다. SK가 실책(104개·최다 2위)이 많았던 건 사실이지만 수비력이 떨어지는 팀이었다고 보기는 힘든 이유입니다.
요컨대 올해 SK 하면 ‘홈런 군단’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르고 홈런으로 포스트시즌에서도 성공을 거뒀지만, 꼭 홈런만이 전부는 아니었던 겁니다.
올해 SK는 2007년 니혼햄과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챔피언 결정전을 앞두고 힐만 감독이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힌 것입니다. 그런데 반응은 반대였습니다. 2007년 일본시리즈를 앞두고 힐만 감독이 “아이가 아프다”며 사퇴 의사를 밝혔을 때는 모리모토 히초리(森本稀哲·37·한국명 이희철) 등 팀 중심 선수들이 먼저 비판했습니다. 반면 올해 SK 선수단은 “힐만 감독에게 우승을 선물하자”며 똘똘 뭉쳤습니다. 결과도 반대였습니다. 니혼햄은 센트럴리그 챔피언 주니치와 리턴 매치에서 1승 4패로 패했지만, 올해 정규리그 2위 SK는 정규리그 챔피언 두산을 물리치고 우승했습니다.
물론 상황이 달랐기에 반응과 결과가 달랐을 겁니다. 당시 니혼햄은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일본시리즈를 치렀지만, SK는 ‘언더도그’(이길 가능성이 적은 약자)일 뿐이었다는 점은 사실 보통 차이가 아닙니다.
그렇다 해도 이미 작별을 고한 지도자를 위해 꼭 우승하자고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힐만 감독의 어떤 매력이 이렇게 팀원들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 SK 구성원이 꼽은 제일 큰 이유는 ‘가족’입니다. 힐만 감독은 외국인 선수 스카우트를 위해 장기간 출장을 다녀온 프런트 직원에게 “그래서 좋은 선수가 있었나”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오랫동안 집을 비웠는데 집에 별문제는 없나”라고 물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선수 개인 면담을 진행할 때도 첫 질문은 항상 “가족은 잘 지내나”였습니다.
‘간섭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눈치 보지 않게’
11월 15일 인천 구월동 신세계백화점 북측광장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트레이 힐만 SK 와이번스 감독이 박남춘 인천시장으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은 뒤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왼쪽). 힐만 감독이 든든한 지원군인 부인 마리 여사와 포옹하고 있다. [동아DB]
선수단도 힐만 감독을 가족처럼 생각했습니다. 언더핸드 투수 박종훈(27)은 “한마디로 선수들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는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감독님을 만났지만 내 속사정을 털어놓은 건 힐만 감독님이 처음이다. 아직 배울 게 많은 분이라 떠나보내기가 너무 아쉽다. ‘조금만 더 함께하면 좋겠다’고 느끼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닐 터”라고 말했습니다. 김성갑(56) 전 SK 수석코치는 “힐만 감독은 간섭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선수들이 눈치 보지 않고 야구를 하게 해줬다”고 평가했습니다.
힐만 감독은 SK를 떠나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표현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마디가 더 붙었습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만족스러웠다(unbelievably satisfi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