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0일 2018 KBO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넥센 히어로즈 김혜성이 몸을 던져 득점하는 모습. 잘 던지고 잘 칠수록 이런 역동적인 장면을 보기 어려워진다. [동아DB]
미국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이 한창이던 어느 날 한 지인으로부터 ‘롯데 자이언츠 야구가 끝나서 심심하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메이저리그를 보라’고 제안하자 이런 답변이 돌아온 겁니다. 물론 저는 ‘참 롯빠(열혈 롯데 팬)답다’고 다시 답을 보냈습니다(실제로는 ‘ㄲ’으로 시작하는 낱말을 썼습니다).
롯데는 올해 정규리그 144경기를 치르면서 실책을 117개(최다 1위) 저질렀습니다. 경기당 평균으로 따지면 0.81개. 올해 메이저리그 평균이 0.57개니까 롯데의 실책이 1.4배 더 많았습니다. 그러니 지인이 이렇게 생각하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한국 프로야구 전체(0.69개)로 봐도 메이저리그보다 20% 정도 실책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면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이렇게 실책이 적게 나오는 이유는 뭘까요. 수비수 실력이 뛰어나서? 물론 그게 중요한 이유겠지만 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타자들 실력도 그만큼 뛰어나 수비하기 까다로운 타구도 많이 나오니까요.
만약 실책 개수가 적을수록 수비력이 뛰어나다고 가정하면 일본 프로야구(올해 경기당 평균 실책 0.48개)가 최고일 겁니다. 그런데 이와무라 아키노리(39·3루수)나 마쓰이 가즈오(43·유격수) 같은 일본 국가대표 선수도 메이저리그 진출 후 타구 질에 적응하지 못해 2루수로 포지션을 옮겨야 했습니다. 그 뒤로 일본 (내)야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때마다 수비력 논란이 불거지는 건 특이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메이저리그가 건강식처럼 보이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제 생각에는 TTO(Three True Outcomes)가 바로 그 이유입니다.
“모든 야수들 정지”
정우영 SBS스포츠 아나운서는 대형 홈런 타구가 나올 때마다 “모든 야수들 정지”라고 외치곤 합니다. 이런 타구가 나오면 실제로 야수들이 자기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서 있는 일이 많습니다. 야수가 뭘 어떻게 한들 결과가 달라지는 게 아니니까요. 삼진과 볼넷도 마찬가지. 삼진과 볼넷도 배터리(투수·포수)와 타자 사이에서 승부가 끝이 납니다.이렇게 홈런, 삼진, 볼넷 등 세 가지 플레이는 △야수가 끼어들 틈이 없고 △타자 스피드(주력)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희생번트나 치고 달리기 등과 달리 공격팀 감독이 사인을 내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런 이유로 세이버메트릭스(야구 통계학) 사이트 ‘베이스볼 프로스펙터스’(prospectus·안내서)는 2000년 이 세 플레이를 한데 묶어 ‘TTO’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메이저리그를 건강식처럼 보이게 만드는 게 TTO라고 했으니까 메이저리그는 이 비율이 높겠죠? 네, 올해 메이저리그 전체 타석 가운데 33.8%가 이 세 가지 결과 중 하나로 끝이 났습니다. 한국 프로야구(30%)나 일본 프로야구(30.2%)보다 높은 비율입니다. 올해 메이저리그 경기당 평균 타석은 38타석이니까 메이저리그 쪽이 경기당 TTO가 3.8개 더 나온 셈입니다.
이게 대수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경기 도중 야수가 처리해야 할 타구가 3.8개 줄어든다는 뜻이니까요. 한 경기에 TTO가 3.8개 더 많다는 건 한 시즌(팀당 162경기)으로 따졌을 때 공이 움직이는 플레이가 616번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실책을 저지를 기회도 줄어듭니다. 참고로 올해 김혜성(19·넥센 히어로즈)은 타구를 총 621개 처리하면서 실책을 16개 저질렀습니다.
공이 움직이는 플레이가 줄어든다는 건 실책뿐 아니라 안타가 감소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올해 메이저리그 경기당 평균 안타는 8.44개로 1972년(8.19개) 이후 가장 낮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삼진(경기당 평균 8.48개)이 오히려 안타보다 많았습니다. 삼진이 안타보다 많은 건 메이저리그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나마 이 8.44개도 안타에 홈런(1.15개)을 포함한 것입니다. 홈런을 제외한 안타 수(7.29개)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저 기록이었습니다.
이렇게 홈런이 아닌 안타가 감소하면 (타자) 주자가 열심히 뛰는 일도 줄어듭니다. 단타를 2루타로, 2루타를 3루타로 바꾸려면 타자 주자가 헬멧이 벗겨질 정도로 뛰어야 합니다. 하지만 타구가 담장을 넘어갈 경우 그저 묵묵히 베이스를 돌면 그만입니다. 이미 출루해 있던 주자 역시 한 베이스라도 더 가려고 열심히 뛸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홈플레이트에 걸어 들어가 타자를 기다리면 그만입니다.
요컨대 TTO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공격팀이나 수비팀이나 그라운드에서 선수가 뛰어다녀야 할 이유가 사라지게 됩니다. 공이 그라운드를 가로질러 날아다니는 장면도 그만큼 줄어듭니다. 야구가 던지고 치고 뛰고 잡고 다시 던지는 종목이 아니라, 그냥 던지고 치는 데서 끝나고 마는 겁니다. 그러니 야구를 보는 재미도 떨어집니다.
실제로 메이저리그는 올해 2003년 이후 15년 만에 처음으로 7000만 관중 달성에 실패했고, 리그를 대표하는 인기 구단 보스턴 레드삭스와 LA 다저스가 월드시리즈에서 맞붙었지만 평균 TV 시청자 수는 1430만 명으로 지난해(약 1870만 명)보다 23.5% 줄었습니다.
메이저리그도 원래부터 이렇게 TTO가 높았던 건 아닙니다. 20년 전인 1998년에는 TTO가 28.4%밖에 되지 않았고 2008년에도 28.8%로 10년간 0.4%p 오르는 데 그쳤습니다. 그러다 최근 10년 동안 5%p 넘게 상승한 겁니다.
야구를 잘할수록 재미가 없어지는 역설
5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18 프로야구 신한은행 마이카 KBO 한국시리즈 2차전 SK 와이번스 대 두산 베어스의 경기, 4회말 노아웃 주자 2루에서 두산 최주환이 투런 홈런을 치고 기뻐하고 있다. [뉴시스]
이렇게 한미일 모두 TTO가 늘어난 건 세이버메트릭스 분석 결과 이 기록이 승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볼넷을 예로 들면 예전에는 ‘투수 제구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었는데 (실제로 야구 초창기에 볼넷은 공식 기록으로 ‘투수 실책’이었습니다) 타자가 적극적으로 볼넷을 얻어내는 게 득점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선구안을 갖춘 타자의 몸값이 올라가게 됐고, 수비팀 쪽에서 삼진을 잘 잡는 투수를 앞세워 선구안을 무력화하려고 시도하자, 타자 쪽에서 이렇게 강력한 구위를 상대해서는 어차피 연속 안타를 치기 어려우니 ‘한 방’을 노리자고 생각하면서 홈런이 늘어나고… 이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된 겁니다. 이런 접근법이 메이저리그 팬까지 즐겁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관중 수나 TV 시청률을 보면 그렇지 않은 분위기입니다. 한 누리꾼은 “50전 전승을 기록한 플로이드 메이워더 주니어(41)가 복싱 기술을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렸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여전히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52)이 그립다”는 말로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는 심정을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꼭 롯데 같은 야구만 재미있다고 하기에는 건강이 걱정되는 게 사실인지라, 좀 적당히 건강한 야구란 도대체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