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미한 뺑소니사고의 경우 피해자의 상해가 치료가 필요 없는 정도라면 무죄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경미한 뺑소니사고의 경우 피해자의 상해가 치료가 필요 없는 정도라면 무죄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사진 제공 · 양산경찰서
문제는 피해가 너무 가벼울 때 발생한다. 현행 특가법은 경미한 접촉사고를 낸 후 상대방이 다치지 않은 줄 알고 그냥 가버린 운전자의 경우에도 피해자가 전치 2주 이상의 상해진단서만 받아 고소하면 벌금형과 4년 이상 운전면허 취소 처분이 내려진다. 보험 처리를 하고 추가로 합의해도 소용없다. 최근에는 이런 점을 악용하는 범죄 사례도 생겨나고 있다. 가벼운 접촉사고를 유발해 상대 운전자를 안심시켜 보낸 후 전치 2주 정도의 상해진단서를 받아 합의금을 챙기는 방식이다.
법조계에서 병원에 가지 않아도 치료가 될 정도의 경미한 상해를 입힌 가해자까지 뺑소니 혐의로 처벌하는 것에 대해 ‘과중한 처벌’이라는 지적이 확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엔 대법원도 의미 있는 판결을 내렸다. ‘운전자가 접촉사고를 내고 구호조치를 하지 아니하고 도주했더라도 피해자가 입은 부상이 무릎을 삔 정도에 불과하다면 특가법상의 도주차량(뺑소니 차량)으로 볼 수 없다’는 게 판결의 핵심이다.
승합차 운전자 A(56)씨는 지난해 3월 경기 안산시 인근 2차선 도로에서 우회전을 하다 B씨가 운전하는 버스를 살짝 들이받았다. B씨의 버스 왼쪽 사이드미러와 A씨의 승합차 창문 일부(수리비 36만 원 상당)가 파손됐다. 그런데 A씨는 사고 후 별다른 사과도 없이 자신의 차량만 살핀 뒤 그대로 현장을 떠났다. A씨의 뒤를 쫓다 잡지 못한 B씨는 며칠 뒤 병원을 찾아가 ‘무릎 염좌 및 긴장’ 등으로 전치 2주의 상해진단서를 발급받은 뒤 A씨를 뺑소니 혐의로 고소했다.
1심은 A씨에게 특가법 뺑소니, 도로교통법상 ‘사고 후 미조치’,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위반(자동차 의무보험 미가입) 등의 법조항을 적용해 벌금 350만 원을 선고했다. “사고 당시 충격이 크지 않았다 해도 피해 차량의 상태 등을 봤을 때 구호의 필요가 있음을 미필적으로 인식했는데도 그대로 도주했다”는 것. 2심은 “A씨의 차량이 버스를 스치듯 긁고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들이 사건 발생 사흘 후 진료받은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당시 구체적인 치료 내용을 확인할 객관적 자료가 없는 점 등을 종합하면 이들이 상해를 입었다고 단정하기 부족하다”며 뺑소니 혐의에 대해서만 무죄를 선고했다.
최근 대법원 형사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도 A씨의 상고심(2015도14535)에서 “특가법상 도주운전죄가 성립하려면 피해자에게 사상의 결과가 발생해야 하는데 생명·신체에 대한 단순한 위험에 그치거나 형법 제257조 1항에 규정된 ‘상해’로 평가될 수 없을 정도의 극히 하찮은 상처로 굳이 치료가 필요 없는 경우는 이에 해당하지 아니한다”며 “사고 운전자가 실제로 피해자를 구호하는 등의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고 인정되지 않을 때는 운전자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사고 장소를 떠났다고 해도 도주운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후 원심(2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로 비록 뺑소니사고라 하더라도 사고 발생 정도와 상해가 실제 치료를 필요로 하는지 여부 등에 따라 일선 경찰과 검찰의 뺑소니 사건 수사 및 기소 관행에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