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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출산 후 나는 곧 그 뜻을 알게 됐다. 아이가 태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내 시간은 내 것이 아니었다. 밤에 깨지 않고 3시간 이상 내리 잠을 잔다거나, 방해받지 않고 밥을 먹는다거나, 마음 편하게 화장실을 간다거나 하는, 출산 전까지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들이 갑자기 불가능해졌다. 30여 년간 학교와 직장에서 갈고닦은 모든 능력은 아이의 탄생과 함께 내가 새로 마주한 도전, 즉 우는 아기 달래기와 늘어난 집안일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육아의 어려움은 초보 엄마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겪는다. 특히 30대 중·후반에 엄마가 된 ‘늦맘’에게 출산과 육아는 더욱 힘든 일이다. 육아란 그 무엇보다 체력이 필요한, 육체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고령 출산으로 약해진 무릎과 허리로 아이의 몸무게를 지탱할 때마다 ‘한 살만 더 젊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늦맘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를 갖고 싶다는 후배에게 “단연코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낳으라”고 권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출산 리스크↑, 산후우울증 위험↓
그렇다고 출산과 육아에서 늦맘이 젊은 엄마보다 불리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늦맘의 경우 유산이나 조산 등 출산 전 리스크가 젊은 엄마에 비해 크지만, 출산 후 산후우울증 위험은 오히려 낮은 것으로 밝혀졌다. 영국의 만 3세 아동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늦맘과 젊은 엄마 모두 비슷하게 육아의 어려움을 호소했으나 늦맘의 경우 젊은 엄마보다 아이와 갈등이 적었고, 아이와 친밀감이 좀 더 높았으며, 부정적 훈육보다 긍정적 상호작용을 통한 육아를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그 대신, 20대 중반 엄마에 비해 늦맘의 집은 좀 더 어질러져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또한 영국과 독일의 패널 데이터를 이용한 한 연구(Myrskyla.. and Margolis)에 의하면 늦게 엄마가 된 경우 젊은 나이에 엄마가 된 경우에 비해 첫아이를 낳은 후 행복도가 훨씬 더 증가했을 뿐 아니라 행복감도 오래 지속되는 것으로 확인됐다(그래프 참조).
이 연구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연구진은 아이를 낳기 전과 후, 그리고 아이가 18세가 될 때까지 엄마의 행복도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추적, 관찰했다. 18~22세의 젊은 엄마들은 첫아이를 낳은 후 오히려 아이를 낳기 전보다 행복도가 떨어진다. 23~34세에 첫아이를 낳은 엄마들은 아이의 출생 무렵 일시적으로 행복도가 증가하지만, 1~2년 후에는 출산 이전 수준으로 다시 감소한다. 그러나 35~49세에 엄마가 된 경우에는 아이 출산 무렵 행복도가 가장 큰 폭으로 증가하며, 이후 행복도가 약간 감소하긴 하지만 아이가 9세가 될 때까지도 아이가 없었을 때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행복도가 유지된다. 이 결과는 늦게 아빠가 된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왜 체력적 불리함에도 늦맘의 육아 행복도가 높을까. 학자들은 30대 중·후반 여성들이 적잖은 나이와 20대 같지 않은 체력 등 불리함을 알면서도 출산을 감행할 정도로 아이를 원해서 엄마가 됐다는 점, 나이가 많을수록 정서적으로 좀 더 안정된다는 점 등을 이유로 제시한다. 예를 들어 덴마크의 늦맘을 연구한 테아 트릴링스가르드(Tea Trillingsgaard)와 디온 솜메르(Dion Sommer)는 ‘늦맘은 각종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아이의 감정적 반응이나 행동에 쉽게 스트레스 받지 않을 정도의 정서적 강함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분석한다.
그러나 해외 연구에서 가장 중요하게 손꼽는 이유는 늦맘이 젊은 엄마에 비해 여러 가지 면에서 좀 더 준비돼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늦맘에 대한 미국의 한 연구는 30대 중·후반에 출산한 여성이 경제적으로 더 안정돼 있을 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어 유연한 근무가 가능하고, 양질의 아이돌봄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으며, 도움을 청할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다고 지적한다. 즉 젊은 엄마에 비해 부족한 체력과 에너지를 그동안 축적한 자원으로 보완한다는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행복한 육아는 엄마의 나이보다 안정적으로 육아를 할 수 있는 조건이 얼마나 잘 갖춰져 있는지에 달렸음을 보여준다. 경제적 안정, 유연한 근무조건, 믿을 수 있는 아이돌봄 서비스, 육아를 도와주는 네트워크는 늦맘뿐 아니라 모든 나이의 엄마에게 행복한 육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이 같은 조건의 사회적 부재는 스스로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출 때까지 출산을 미루거나 (따라서 고령 출산에 따른 추가 리스크를 감당해야만 하거나), 아예 출산을 포기하게 만드는 배경이 된다.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여성의 초산 연령이 가장 높은 동시에 전 세계에서 가장 출산율이 낮은 편에 속하는 현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시간의 소중함을 아는 늦맘들
그렇다면 한국의 늦맘은 육아 행복도가 낮을까. 아직 이를 실증적으로 분석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리고 조건만으로 보면 매우 열악하지만, 고군분투하면서도 아이에게 “빨리 자라라”고 말하기보다 ‘하루하루 크는 게 너무 아깝다’고 속으로 되뇌며 행복하게 육아를 하고 있는 여러 늦맘을 볼 때면 꼭 그렇지만은 않을 듯하다.비록 현실 상황은 녹록지 않지만 20대, 그리고 30대 초반을 지나온 늦맘들은 알고 있다. 좋은 시절은 금방 지나가버리고, 사랑스러운 대상들 역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젊은 연인의 예쁜 모습, 부모의 든든하고 따뜻한 손길이 그렇게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지금 눈앞에서 울어대며 엄마를 찾고, 화장실 갈 틈도 주지 않은 채 찰싹 붙어 있는 이 아이도 금방 자라 자신의 길로 타박타박 달려 나가리라는 것을. 모유 수유를 하느라 술도, 커피도 마실 수 없고 매운 음식도 먹을 수 없지만, 아이 때문에 잠도 마음껏 잘 수 없지만, 그것도 길어야 고작 2년이라는 것을. 아이는 자라면서 늘 새로운 모습으로 감동과 놀라움을 주겠지만, 내 품에 있는 이 ‘아기’와 마음껏 눈을 맞추고 사랑할 수 있는 순간은 지금뿐이라는 것을.
이러한 것들을 늦맘들은 가슴 사무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늦은 엄마’여서 쉽게 ‘한 번 더’를 외칠 수 없기 때문에 수많은 어려움에도 아이와 함께하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육아에 힘쓰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런 마음은 늦맘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테다. 20대 젊은 엄마와 아빠에게도, 느지막이 아빠가 된 30대 후반, 40대 초반에게도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무엇에 비할 수 없이 소중하니까. 나이와 관계없이 모든 엄마, 아빠가 좀 더 수월하고 행복하게 육아를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이러한 마음을 소중히 하는 우리의 몫일 테다.
전지원은 197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인류학과를 졸업한 후 동아일보 사회부 · 문화부 기자를 지내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고령화 및 시간사용 연구로 사회학 석 ·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토론토대 글로벌사회정책연구센터 연구원 및 옥스퍼드대 시간사용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